성경읽기 : 창세기 12장
< 성경읽기 : 창세기 12장 >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첫 시간 창세기 12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창 12:1-20).
아멘, 우선 이제 서론적으로 몇 가지 말씀드리면 창세기는 이제 보통 시작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창세기에서 지금 저희들이 12장을 다루고 있는데요.
1장부터 11장까지 네 가지 사건을 쭉 다뤄왔습니다. 첫 번째, 창조입니다. 두 번째, 흔히 하는 표현을 쓰면 타락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이 죄가 들어온 거죠. 그리고 세 번째는 노아 홍수 심판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이제 11장 마지막 쪽에 나오는데 민족을 흩어버리십니다. 바벨탑에서 언어를 혼잡케하여 민족을 흩트는 사건이 큰 네 가지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요. 그다음에 이제 12장부터 50장까지는 창세기는 4명의 사람을 다룹니다. 첫 번째가 아브라함, 두 번째가 이삭, 세 번째 야곱, 네 번째 요셉, 이 4명을 다룹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데요.
잠깐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게 아브라함 생애의 주요한 주제입니다. 그다음에 이삭은 '아들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아들이란,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군가라고 하는 것이 이삭의 생애에 나타납니다. 이삭은 이 집으로 보면 이제 가족으로 보면 약간 조금 다릅니다마는 아버지가 아브라함이고 어머니가 사라죠. 이복이지만 형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 그리고 그는 두 번째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거듭난다라고 하는 단어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하는 건 뭔가, 아들은 누군가라고 하는 것이 이삭의 생애의 주제이고, 그다음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육신을 어떻게 다뤄가시는가, 어떤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가, 이게 이제 야곱의 생애입니다. 야곱은 굉장히 자기 욕심대로, 자기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열심히 추구해 가지만 하나님께서 계속 그를 다루시는 거죠. 그가 취한 것마다 그에게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게 이제 야곱 생애고, 그다음에 요셉은 약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요셉은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보면 요셉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애굽에 살아서 총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줄 알았던,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분이 부활하여 영광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이 요셉 생애의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렇게 이제 창세기가 4명의 사람을 다룹니다.
그중에서 저희들은 이제 아브라함의 생애를 이제 다루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생애 중에서 이제 한 가지만 이제 문맥상 말씀드리면 12장 바로
앞에 11장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흩으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12장이 시작되는데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하늘에까지 닿자'라고 이제 바벨탑을 쌓는데요.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면 이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과연 성경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된 놀라운 존재입니다. 그들의 건축술, 기술, 이런 게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로 그들의 기술이 창조적이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런데 이 하나님이 이렇게 놀랍게 창조해 주신 인간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뜻대로 살고 싶다. 이게 인간의 죄악된 모습입니다. 이게 이제 11장에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운 능력과 지혜가 있지만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존재한다고 하는 것, 이걸 이제 입증하셔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것이 복되고 영광스럽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작업을 하려고 하십니다. 자기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살고 하나님과 관계없으려고 하는 인간에게 너는 하나님이 만든 존재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제 아브라함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은 이걸 합니다. 아브라함의 책임이 이제 세 가지인데요. 첫 번째, 그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살고 문화를 일으키고 이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때, 여기 독특한 한 사람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라고 하는 견해를 가지고 그가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다고 하는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보이는 인생을 그가 살아야 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부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순종하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이해가 안 가도 그대로 따라가고 하는 이 인생이 얼마나 복된가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고 아니네, 이쪽이 훨씬 질이 높네라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이게 이제 아브라함의 두 번째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걸 입증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 가치 있다고 하는 것을 행복하다고 하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아브라함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해야 합니다. 이게 이제 아브라함의 이 세 가지 은혜와 책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제 저희들이 보고 그다음에 이제 12장은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처음 동행을 시작하시는 장면인데 12장은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이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떠나 이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12장 초반부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 10절부터 20절까지는 가난 땅에 왔는데 기근이 들었어요.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12장의 첫 번째 대목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부분은 실족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믿음이 뭔가, 다시 12장 1절부터 보면, 1절부터 3절까지는 믿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 이렇게 명령을 하시죠. 그리고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그다음에 이제 "아브라함이 말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잠깐 좀 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절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말씀을 따라 갔고" 5절은 그와 같이 믿음으로 갔을 때 생기는 열매들을 나타냅니다. 그다음에 이제 6절에서는 믿음의 사람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갔더니 딴 사람이 이미 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인데 이미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갈등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7절은 이때 단을 쌓습니다. 그 갈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 9절은 그와 같이 믿음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나그네 인생길을 삽니다. 여기가 이제 믿음의 삶을 나타내고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10절부터는 이제 실패하는 것입니다. 10절은 하나님이 믿음을 테스트합니다. 기근을 주십니다. 그럴 때, 기근이 있을 때,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결정합니다. 믿음대로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행한 거죠. 그렇게 했을 때 그에게 첫 번째로 두른 것은 11절의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은 12절에 거짓말을 합니다. 이제 자기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사람의 지혜를 취한 것이죠. 그래서 14절부터 17절까지 이제 아브라함이 애굽에 있었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18절부터 이제 20절까지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믿음의 실족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내용이 20절까지입니다.
일단 큰 흐름은 이렇게 돼 있고요. 이제 한 절 한 절 성경 읽기를 통해서 여러 형제님들이 교제해 주시고, 그리고 간혹 제가 잠깐 멈춰 서서 혹시 질문이나 다른 교제하시는 형제님들, 이렇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나 아니면 1절부터 이제 시작하시죠
- 김윤철 형제님 : 저희들이 오늘 12장을 보면 11장 1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을 하는 부분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이 앞장 11장을 볼 때 아브라함의 부친인 데라는 갈대아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하란에서 멈추고 그곳에서 우상 숭배를 하였던 것을 저희는 11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희들이 지금 살펴보고 있는 12장은 그런 데라의 내용은 전혀 기록되고 않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창세기의 저자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을 밝히신 책이고 이제 중요한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삭, 야곱, 요셉에 이어서 이들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제 오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저희 죄인들을 찾고 계시는데요.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디서 발견했는지를 저희들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갈대아우르라는 멸망의 땅에서 이 아브라함을 찾으셨습니다. 이처럼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을 발견하는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도 지금 이와 같은 곳에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되고, 우리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제 멸망으로 정해진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심을 저희들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도 죄인이었으며 그는 우상 숭배를 하던 가정에서 나왔음을 저희는 또 앞장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11장 마지막 줄에 "데라는 205세에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의 부친 데라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은 자와 그리고 영원히 죽은 자로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 목적이 있으셔서인데 저희는 그 이유를 2절, 3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2절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고, 3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들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고, 그로 인해서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복을 얻게 하셨음을 저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저희는 12장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3절까지 교제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예,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이제 부름 받은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나님은 은혜로 부르십니다. 자격 없는 사람을 은혜로 부르십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을 때도 마찬가지죠. 죄인일 때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렇게 부르시는 거죠.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의 표현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4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집안 사람입니다. 그때 부르신 거죠.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부름 받을 만한, 혹은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어떤 잠재력이 있어서 부르신 게 아니고 그가 죄인이었는데, 놔두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이제 히스토리가 이렇게 되는 거죠.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잠깐 보겠습니다. 창세기 11장 보시죠.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 11:31).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는데, 그때 실제로 갈대아우르에서 움직인 걸 보면 데라가 움직입니다. 잠깐 성경을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31장 5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창 31:53).
이제 나홀은 아브라함의 형이죠. 그리고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그랬는데요. 이건 조금 이제 번역을 다시 하면, 우리나라 말로는 조금 애매하니까 그들은 아브라함과 나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조상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버지로 바꿔보겠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나홀, 그리고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버지 데라의 하나님,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나홀이 구원받,고 그다음에 데라가 구원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고 그다음에 갈대아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라라고 했을 때 이들이 가야 되는데 아브라함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아버지 데라가 주도권을 잡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우르를 못 떠납니다. 못 떠나고 하란에 머무는데요. 하란이라고 하는 곳은 갈대아의 마지막 국경지대의 성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국 갈대아를 못 떠납니다. 그리고 데라가 죽자 다시 하나님이 12장 1절에서 다시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이제 12장 1절은 하란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갈대아우르에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자격 없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은 목표와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 이게 12장 1절입니다.
계속 형제님들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한 것, 이런 것도 좀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앞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부분에 대해서 교제를 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의 주권적인 그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 더 생각하는 부분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또 은혜롭고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서,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이제 아브라함의 그런 연약이 첫 번째는 창세기 11장 30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라가 이제 잉태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고, 또 12장 4절에 보면 이제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이 75세, 굉장히 나이가 많아서 이제 소망이 없는 그런 아브라함의 상태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약한 자들, 또 소망이 없는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1절에 하나님께서 이제 두 가지를 명령하시죠. 이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시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제 두 가지를 명령하시는데 이제 떠날 것이 이제 세 가지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
여기서 이제 '본토'는 이제 문자적으로는 '너희 땅'에서부터 이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저도 이제 본토가 문맥상으로는 이제 11장 32절에서 이제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 하란을 떠나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요. 앞에서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이제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4절을 보면 이제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네 고향 친척을 떠나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다음에 이제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음매 하나님께서 그걸 다시 옮기셨다. 그렇게 이제 사도행전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첫 번째 갈대아우르에서 이제 한 번 부르셨고, 그다음에 이제 하람에 거할 때 이제 데라가 죽게 되고 그때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두 번째 나타나셔서, 이제 사도행전 7장에서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제 여기 창세기 12장 1절에서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그래서 이제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이 추가된 거를 이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제 첫 번째 이제 본토라는 건 땅이죠. 이제 땅을 떠나라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속으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에 가실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본토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땅을 떠날 거 말씀하고 있고,
두 번째 이제 떠날 게 이제 '친척'입니다. 이제 친척은 이제 혈족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제 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자를 이제 의미하는데요. 그래서 이제 여기 11장에는 잘 언급이 안 돼 있는데 그 하란에 이제 나홀의 가족들도 함께 이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4장이죠. 24장에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이제 나홀의 아들, 이제 부두엘의 딸이었죠. 그래서 이제 리브가를 하란에서 이제 데려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마도 이 하란에 이제 나홀의 가족들도 함께 살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그 이제 친척들을 떠나라고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명령하고 계시고,
그리고 이제 '아비집'을 떠나야 됩니다.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라." 문자적으로 이제 그렇게 돼 있는데, 그런데 이제 여기서 조금 저는 말씀을 보면서 이상한 게 사실 11장 32절에서 아버지 데라가 이제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아비 집을 떠나라,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 이제 그런 부분을 생각을 해보게 되었는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서 24장에 보면 이 데라는 이제 우상숭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아브라함도 이제 그런 영향을 받았겠죠. 아버지로부터 그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미 죽었지만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그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그런 세상적인 가치관들, 또 우상숭배, 이런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서 이제 완전히 벗어나야 되고 이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된다, 이제 그런 명령임을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한 가지 좀 질문을 드려보고 싶은데요. 여기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제 본토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데라와 헤어지고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롯도 그와 함께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친척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형제님께서도 31장을 언급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룻하고도 헤어져야만 이제 완전한 상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친척을 데리고 갔고요. 그것은 이제 자기 마음 가운데 일부는 롯을 의지하는, 서로가 의지하는 이와 같은 상태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사실은 롯도 이때 헤어졌다면 나홀의 하나님과 같이 롯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인도함을 받았을 텐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1절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이제 떠나는 것을 말씀하시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두 번째 말씀하십니다. 하란은 이제 갈대아우르에서 약 한 1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말씀대로 이제 국경인데요.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것으로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아주 먼 거리인 1200km를 떠났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지시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란은 이제 국경이지만 거기에는 이제 큰 장애물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유브라데 강인데요. 이제 하라는 유브라데를 건너지 않은 동편이고요. 가나안은 유브라데를 건넌 다음에 이제 있는 땅입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인물들이 이제 이 강을 건너게 되는데요. 아브라함도 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야 했고요. 야곱은 특별히 이제 압복강을 건너서 다시금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또한 요단강을 건넜고요. 이와 같이 이제 많은 이제 강을 건너는 일들이 있는데, 사실은 구원받은 저희들도 다 강을 건너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이제 침례를 받고 물 아래서 물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이 침례라는 것은 나는 죽고 새 생명을 받은 저희들이 이제 새로운 삶을 사는 간증을 나타내는 것인데요.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특별히 이제 강을 건널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또 침례를 받을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희들은 이제 구원을 받고 세상과 분리되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지역 모임으로 이제 가는 것이 이제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구원을 받고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곳으로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또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란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또 하란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야만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곳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1절 부분을 교제 드렸습니다.
- 박용수 형제님 : 네, 형제님이 1절부터 3절까지 주제가 말씀으로 시작하는 믿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언어에서도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이 인상 깊었고요. 그리고 그 말씀의 내용이 '떠나'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는 것도 좀 인상 깊었다고 인상 깊었습니다. 제가 구원받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처럼 그 믿음의 본질이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 이병호 형제님 : 2절과 이제 3절에서는 이렇게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이제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이 7가지 복이 이제 2절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아브라함이 이제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크다'는 형용사는 이제 크기나 수요가 이제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고 또 존귀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수요가 많아지고 이제 큰 나라를 이룰 것이고 또 이제 존귀한 민족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복은 이제 "네게 복을 주어"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원어하고 흠정역을 참고해 보면, 이제 2절 말씀을 이제 흠정역을 참고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면 "그리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그리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그리고 너는 복이 될지라." 네 가지 복이 이렇게 흠정역을 참고에 보면 이 분열로 이렇게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이 2절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제 네 가지 복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거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제 복, 이제 4개 복을 주겠다. 이 복을 주겠다는 동사는 이제 미완료형 시제로 돼 있습니다. 미완료형 시제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이제 복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그런 약속이죠. 그리고 세 번째 복이 이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이 아브라함의 이름이 이제 높아질 것을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제 미완료형 시제인데요. 그래서 이 창대케 하는 역사가 이제 계속해서 있을 것임을 이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후에 보면, 이 아브라함의 이름이 실제로 높아지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주시죠. 이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라는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고, 또 창세기 23장에 보면 하나님의 방백이라는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고, 또 하나님의 선지자, 또 하나님의 친구라는 그런 명예스러운 이름을 아브라함이 이제 가지는 것을 이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복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걸 지역하면 그리고 '너는 복이 되어라'입니다. 그런데 이 복은 좀 다른 복과 좀 특이합니다. 이거는 명령형으로 돼 있습니다. 명령하는 것입니다. '너는 복이 되어라.' 아브라함에게 이제 복의 통로가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는 건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복들을 지금 받고 있죠. 이런 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된다. 이제 이런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복음서에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말씀하고 있고, 3절에서는 다섯 번째 복이 이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이것은 이제 아브라함과 이제 그의 후손들과 하나님과 그런 특별한 관계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제 그의 후손들을 지지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복을 받을 것이고,
여섯 번째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하나님과 이런 특별한 언약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이 후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아브라함을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 언약을 반대하는 것으로 이제 간주되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각별히 여기 이제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여기서 이제 앞에 저주하고 뒤에 저주하고 이제 다른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이제 같은 단어지만 앞에 저주는 이제 깔보다, 멸시하다, 이제 그런 단어인데요. 그래서 16장 4절에 이제 하갈이 그 사래를 멸시했는데 그때 사용된 단어고, 이제 뒤에 저주는 이제 강한 저주 진짜 저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제 땅이 저주를 받아서 이제 엉겅퀴와 이제 가시를 내게 되는데 이런 진짜 저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제 그의 후손을 멸시하는 자는 이렇게 결국은 그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또 각별히 여기 저주하는 자는 이제 단수로 돼 있습니다. 저주하는 자가 단수로 돼 있는데,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그렇게 다루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그런 이제 엄중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제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일곱 번째, "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이제 '너로 인하여'라는 단어는 '네 안에'서로 이제 번역할 수 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제 받을 복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실은 아브라함만 위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인류를 향한 이런 놀라운 계획을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그런 가운데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려고 지금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는 부분을 이제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아까 형제님이 이야기한 대로 이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이제 본토, 친척, 아비집이죠. 만약에 이렇게 세 가지를 저희들이 다른 세 가지하고 연결시켜보면 저희들이 많이 하잖아요. 그리스도인의 적이 세 가지죠. 사단, 세상, 육신, 이렇게 연결시켜 볼 수 있는 것 같고요.
이제 '본토'라고 했을 때는 이제 '하나님 없이' 이제 갈대아우르를 말하는 거니까요. 하나님 없이 문명을 일으켜서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친척은 이제 아브라함이 늘 실수하고 있는 거죠. 처음에 갈대아우르에서 아버지 데라, 그다음에 나홀, 이렇게 있을 때 떠났어야 되죠. 아버지를 떠나고, 나홀도 떠나고 해야 되죠. 그다음에 여기 12장에 오면 롯도 떠나야 되죠. 그런데 이제 떠나지를 못한 거죠. 친척에 대해서, 이게 이제 아브라함의 연약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면 나중에는 이스마엘도 보내야 되고요. 이삭도 보내야 됩니다. 이제 그런 측면이 이제 이렇게 놓여져 있다고 보고요.
그다음에 또 이제 아비집은, 그러니까 이제 본토는 어떤 정치적인 거라면 그다음에 이제 친척은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사회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비 집은 종교적인 것'으로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떠나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이제 세 가지를 버리면 7개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제 그중에서 특이한 것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세 번 시작하십니다. 아담하고 한 번 시작하시고요. 그런데 실패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노아하고 한번 시작하십니다. 홍수를 확 쓸고 이제 노아로 다시 새 인류가 시작되죠. 그런데 또 노아도 실패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시작입니다 세 번째 시작이 이제 아브라함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 아담과 시작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뭐라고 축복하셨냐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다스리라."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이 이제 생육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번성하라는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경우는 세상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을 잘 통치해서 이 에덴 동산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해야 된다. 이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노아의 경우는 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여기까지는 똑같죠. 그리고 "땅에 충만하라" 합니다. 그래서 노아의 후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제 에덴 동산이 아니고 세상 전체에 흩어져서 이렇게 살 것을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안 흩어지려고 바벨탑을 쌓는 거죠.
이제 세 번째 시작이 이제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건데 여기 이제 특별한 게 축복이 들어갑니다. 아담과 노아의 경우에는 축복이 안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축복이 들어가서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이렇게 돼 있고요. 그 대목이 이제 좀 다른 아담과 노아에 비해서 독특한 점이다. 그리고 이 축복은, 이제 여러 가지 축복이 있죠. 아브라함에게 땅에 속한 축복도 있을 거고 또 하늘에 속한 축복도 나중에 이제 아브라함이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다음에 축복을 받으면 자기가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이제 이런 복을 이제 7개를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특별히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한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동일시되고 있는 거죠. 거기까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되는 그 관계 가운데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선 여기까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요구 사항,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건데요. 이 대목에 대해서 혹시 더 혹시 교제하실 분이나, 질문이나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방지성 형제님 : 저는 아브라함에게 이제 1절에서 3절까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모습을 보게 될 때, 또한 다니엘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고 부르셨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위해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그 부르심은 각각에게 개인적인 부르심으로 부르신다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사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구원 또한 개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많이 교제해 주셨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순종하고 또한 말씀을 쫓아서 살아갈 수 있는 이러한 삶은 구원받은 이후에 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모습에 대해서 저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이제 죄가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그네 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요구였고 또한 그에 순종하게 되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 마음 가운데 성령님의 요구와 인도하심에 따라서 구원받기 전의 삶에서 벗어나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죠?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하여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이해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떤 형태로 듣는가라고 했을 때, 그러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음성으로 듣는가, 이런 것들을 저희들이 적용해 볼 수 있겠고요. 그다음에 저희들도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떠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떠나야 될 게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도 나와 있는 거죠. "너희는 거기서 나오라" 이렇게 돼 있죠. 또 아주 중요한 명령 말씀으로는 이렇게 돼 있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면을 저희들이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정말 이렇게 따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안 지낸다는 게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지만, 그러나 정말 구분된,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것들이 저희들이 적용해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그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4절부터 이제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그다음에 8절, 이제 순종하고 쭉 가서 드디어 세겜 모래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단을 쌓은 것까지 이 순종하는 모습을 또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박용수 형제님 :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제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왔는데 가나안 땅에 이미 사람들이 있어서 이것에 대해서 좀 당황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저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다 이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알 만하다 싶을 때는 어김없이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 싶은 상황이 발생하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 믿음의 여정이 다 그러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때도 계속해서 왜 이러셨을까 하고서 그걸 또 해결하는 과정이 7절부터 또 이어진다고 생각이 듭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세겜의 뜻은 '어깨'라는 뜻인데요. 많은 이 먼저 계신 형제님들의 분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누가복음 15장에 이제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이제 찾아서 그것을 어깨에 메고 기쁨 가운데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되어집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말씀하시고 가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이제 사실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온전한 곳으로 옮기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에게도 임해 있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 임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세겜의 어깨라는 뜻의 이 지명은 저희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병호 형제님 : 4절에서 보면 이제 원어와 흠정역을 참고해 보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갔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제 아브라함이 이제 즉각적으로 순종한 부분을 이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갔고, 그다음 구절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여기서 또 '그대로'가 이제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이제 판단의 기준으로 이제 삼았음을 말씀에서 이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롯도 그와 함께 간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좀 교제가 됐기 때문에, 그리고 갑자기 이제 그 나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 75세였다. 75세 하면 물론 지금과 이제 그때는 더 수명이 길었기 때문에 조금 지금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는 늦은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믿음에 있어서 이런 나이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이제 본으로서 이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이죠. 이 본문에 이제 12장 1절부터 9절까지 믿음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다 이제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보이는 상황이나 현실을 따르고 의지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이제 순종하는 것, 이게 이제 믿음이라는 것을 이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각별히 이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제 4절과 5절에서는 '가다', '떠났다'는 동사가 이제 여러 번 나옵니다. 4절에 보면은 "말씀을 쫓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하란을 떠날 때에" 그리고 5절에도 보면 이제 뒷부분에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들어갔더라." 그래서 이제 가다, 떠나다, 이런 동사가 많이 나오는 것들을 생각을 해보게 될 때 우리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갔기 때문에, 또 떠나서 들어갔기 때문에, 순종이죠. 실제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아브라함이 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 수가 있는데, 그래서 야고보서 2장 말씀과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그리고 행함이 그 믿음으로 온전케 되어진다. 그렇게 야고보서 2장에서 이제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들을 생각을 해보게 되고, 그리고 이제 5절에서는 간략하게 이제 아브라함이 이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마침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지극히 간략하게 아브라함이 이제 가나안에 도착한 사실을 이제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이제 하란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하란에서 이제 가나안 땅 그러니까 거리가 직선 거리는 한 70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 이제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이제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야 되고, 그리고 수리아와 이제 다메섹을 지나서 헐몬산 남쪽으로 해서 돌아서 이렇게 오다 보면, 그 길은 훨씬 멀고, 더 길고, 또 위험한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그런 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먼 거리를 또 위험한 거리를 사전에 준비 전혀 없이 다 모든 소유와 사람들을 이끌고 이제 출발했고 도착했다, 이제 그렇게 결론적으로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 생략되었지만 정말 그런 과정들을 저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떠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는가, 이것을 오히려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함으로 그게 이제 더 돋보이게 이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드디어 이제 도착하고 들어가서, 한 가지만 더 이제 교제를 하자면 이제 7절에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땅은 여기서 이제 '이것'이라는 지시 대명사와 또 그 앞에 이제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땅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정확하게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그것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래서 사실 이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이제 바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제 아브라함 자신도 이제 사도행전 7장 5절을 참고해 보면, 이제 여기서 이제 가나안 땅에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받지 못하였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후에 보면 계속 이제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나타나셔서 그 약속을 이제 계속 확인해 주시고, 그래서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좀 눈에 보이는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금 가나안 사람들이 이제 그 땅에 거하고 있고, 또 여기 모래 상수리 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그런 우상숭배가 가득한 그곳에 이제 도착해서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런 어떤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런 언약의 말씀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제 이 말씀을 생각을 하게 될 때, 이런 부분을 좀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요. 이제 가나안 땅에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이제 정착해 살고 있죠. 그런데 사실 그 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제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모든 주인이시고 그래서 지금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것은 지금 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 땅을 지금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이제 법적 소유권은 아브라함과 이제 그의 후손들에게 있는 것이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실은 이게 가나안 사람들이 거기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후에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의 실제적인 주인이 되는, 사실 이게 이제 근거가 되는 이제 말씀임을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김윤철 형제님 : 6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당시에 가나안 땅을 도착하여 세겜 지역에 이르렀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세겜은 고대 가나안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세겜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가나안 땅에 도착해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창세기 33장 18-19절을 보면 야곱이 이곳에 장막을 치고 땅을 사고 그곳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렐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야곱이 산 땅, 세겜은 여호수아 24장 32절에 보면 요셉의 유골이 나중에 묻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여호수아 24장 23절부터 27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곳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큰 돌을 취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갔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앞서 살펴보았던 11장 1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고, 이때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아브라함에게 순종하여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을 때, 비로소 7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구체적인 약속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절에서는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이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이곳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 비록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땅을 한 평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의 후손이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약속을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또한 저희들이 7절을 볼 때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나타나심을 기록한 성경의 첫 번째 언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도 말씀하셨고, 그리고 무드셀라와 에녹과 노아와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었고,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이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그리고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에 이전에 나타나셨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후에 16장 7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으로 광야의 샘물 곁에서 하갈 만나고, 주님께서는 다시 사자의 모습으로 22장에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오셔서 직접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직접 만나시고, 약속을 하신 장소가 이 세겜이라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이곳 세겜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각자의 마음속에 세겜이라는 내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이상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아브라함이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가라' 하고 어딘지 말씀 안 하셨죠?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온 거죠. 그래서 이제 쭉 가다가 세겜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여기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단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이 단은 '감사의 단'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또 여기가 그곳이라고 약속을 확인해 주신, 그에 대한 감사로 이제 단을 쌓았다고 보여지고요.
그다음에 조금 이제 구체적으로 해보면 거기가 이제 '세겜'이라는 단어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어깨죠. 그다음에 '모레'라고 하는 단어는 교훈, 혹은 가르침, 교사, 이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상수리 나무는 호세아서 4장에 보시면 이게 우상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중에 진멸하시고 그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 넣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들에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겜이라고 하는 곳에서 우상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이, 여기 이제 우상 신전을 세우고, 그 신전에서 가르침을 받고 이게 '모레'입니다. 신전이 있고 거기서 우상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모레고, 그리고 이제 그 땅 이름이 세겜이니까 그 우상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힘을 얻는 곳, 이게 세겜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땅이다',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런 걸 생각해 볼 때 저희들이 하나님 신약에 와서 교회를 세우실 때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 보면 굉장히 도덕적으로 타락한 고린도 지역에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사회에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도 유사합니다. 거기 보면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막 "크도다 아데미 신전이여." 이런 도시에 에베소 교회를 세우십니다. 또 계시록 2장에 보면 버가모 교회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있는 곳이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사단의 본부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렇게 하듯이 이 가나안에, 우상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용하셔서 단을 쌓았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계속해서 조금 더 나가보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8절 9절까지 해서 아브라함이 그다음에 거기서 단을 쌓고 그다음에 벧엘로 옮깁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옮기고, 그다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고 그다음에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 이제 이런 아브라함의 행로에 대해서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박용수 형제님 : 7절에 "네 자손" 이거 되게 중요한 건데 교제 안 된 것 같은데요. 갈라디아서에 그리스도 에 대해서 이 '네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죠.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리스도를 말한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 나타나신 분도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 땅은 이제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우상숭배의 중심지에서 내가 이것을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스도에게 줬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통치가 여기에서 시작될 거다. 하여튼 그런 선언으로 보인다는 교제를 들었었습니다.
그리고 8절 9절은 이제 믿음의 순종이라고 아까 말씀해 주셨고 그 믿음의 순종이 드러나는 모습들입니다. 산으로 옮겼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로 나아간다. 그리고 장막을 쳤다는 것,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벧엘과 아이라고 해서, 벧엘은 이제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나중에 황폐하게 되는 곳이니까, 그 사이에 구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단을 쌓았다는 건 예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을 의지했다, 이렇게 교제를 들었습니다.
- 이병호 형제님 : 8절에서 이제 벧엘 동편 산을 옮겨 장막을 쳤습니다. 장막을 쳤다는 것은 이제 우거하는 삶을 말하고 있고, 이제 산에 또 각별히 장막을 쳤다는 것은, 그 땅에 이제 거인들과의 그런 접촉을 피하고 이제 구별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지역이 이제 벧엘로 이동을 한 거죠. 이제 벧엘로 이동을 한 건데 사실 벧엘의 그 당시 이름은 이제 '루스'였습니다. 벧엘이라는 이름은 이제 성도님들도 아시는 것처럼 이 창세기 28장에서 이제 야곱이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던 중에 이제 꿈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이제 야곱이 이건 하나님의 집이다, 해서 이제 루스를 이제 벧엘 이름을 바꾸는데 여기서 이제 루스 대신에 벧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이 땅을 주실 것을 이제 믿음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벧엘이라는 믿음의 단어를 사용했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이제 8절에 보면은 그곳에서 단을 쌓고 이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기서 이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거는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불렀다' 이제 이런 의미인데 다시 말해서 공적으로 이제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이제 첫 번째 나온 부분이 이제 창세기 4장 26절에 이제 처음 나왔는데, 다시 이제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앞에서도 교제해 주신 것처럼 지금 우상이 가득하고 이제 대중들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이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제 공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현실이나 상황은 어렵지만, 지금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 주시고 능이 이 땅을 자기에게 주실 걸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어떤 믿음의 행동을 이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지고요.
그리고 이제 점점 이제 9절에 보면 남방으로 이제 옮겨 가게 되는데, 이제 이것은 이제 왜 난방으로 옮겨갔을까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되면, 일단 하나님께서 이제 가나안 땅을 이제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죠. 가나안 땅은 이제 보통 이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이제 전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이제 남방으로 또 계속 내려가지 않았나 이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고, 또 이제 10절에 이제 기근이 시작되는 거를 생각할 때 이제 북쪽에서부터 이제 서서히 이제 기근이 시작 되었기 때문에 이제 자연스럽게 이제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았나, 이제 이런 부분들을 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김윤철 형제님 : 이제 아브라함은 세겜을 지나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있는 모습을 저희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앞에 형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베델의 의미는 다들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서는 '페허' 또는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는 이 사이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집과 폐허로 무너진 곳 사이이고, 이곳은 하나님의 축복과 실패의 사이이고, 그리고 빛과 어둠의 경계에 아브라함이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님들한테 질문을 드려보면 왜 아브라함은 이곳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까? 하는 질문을 드려보고 싶고요.
저는 이곳이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완벽하지 않은 인생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항상 벧엘과 아이 사이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이 같은 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주님을 부르는 마음이 그 믿음이 약해졌을 때 저희는 금방 폐허라고 하는 아이로 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또한 이곳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쉬지 않고 그 이름을 불렀다면 저는 남방으로 내려간 게 아브라함의 실패라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처럼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는 실패를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고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잠깐 보면 두 개가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단을 쌓습니다. 단은 짐승들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제사 지내는 거죠. 희생 제사, 희생 제사는 아벨부터 쭉 이어져 왔습니다. 아벨이 했고, 노아가 했고, 그리고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이렇게 드리는 것이죠. 이걸 이제 약간 저희들에게 적용하면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저희들이 이제 모임에서 이제 떡과 잔을 놓고 감사드리고 잠깐 짧게 덕언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단을 쌓으면 이제 짐승을 죽이기 위해서 약간 흙이나 돌로 이렇게 약간 높게 해놓은 거잖아요. 이 단에서 이제 짐승을 죽이고, 태우고, 이제 이렇게 했을 텐데, 이 단이라고 하는 것은 우상들의 경우에는 이 신전에 보면 거기 그 우상의 모양이 있어야 합니다. 전부 돌로 만들든지, 나무로 만들든지, 뭐 이렇게 만든 우상이 있어야 되는데 아브라함이 쌓은 단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리도 신을 믿는데 너도 신을 믿는구나. 우리도 신에게 뭔가 제사를 드리고 뭐 이렇게 갖다 바치는데, 너도 신에게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구나. 그런데 왜 너는 신의 모양이 왜 없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제 가장 큰 차이가 되죠. 그 이유에 대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한 한 하나님인데 세상을 창조하셨고, 영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하는 이 두 개가 이제 아브라함이 했던 것으로 보여지고요.
그다음에 이제 아브라함은 계속 이동합니다. 이게 세상 용어를 쓰면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대목은 전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리 가라, 세겜에서 벧엘로 가라. 그다음에 다시 남방으로 가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말씀을 따라 믿음의 행로를 갑니다. 이건 이제 원리로 치면 로마서 1장 17절인가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례자의 시편 84편인가요? 힘을 얻고 더 얻어 예루살렘까지 가는 이제 이런 모습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이제 시간 관계상 쑥 나가겠습니다.
10절부터는 이제 기근이 있고, 그다음에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고, 그다음에 누이라고 거짓말하고, 그랬더니 바로가 사라를 데려가고,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주는 이 대목에 대해서 이제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여기서 이제 아브라함의 첫 번째 실패를 보게 되는데요. 첫 번째로 그는 말씀이 없이 기근이 있으므로 애굽으로 데려갔습니다. 저희들이 말씀이 없을 때 이제 보이는 양상을 여기서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첫 번째는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 이렇게 이제 애굽에 가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가까이 갈 때 그는 이제 걱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사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특별히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또 자기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제 걱정을 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되고요.
12절에서는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기보다는 애굽 사람이 사라를 볼 때 어떨까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그는 더 이제 마음에 두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 또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12절에서는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라고 해서 자기가 죽지 않았는데 죽을 것을 걱정합니다. 사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인데, 그는 너무나도 쉽게 이제 그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또 지금 상황을 살피는 이와 같은 것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13절에서는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라고 해서 그의 목숨을 이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고 있는 사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이제 말씀이 없이 행하게 될 때에는 결국은 이제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또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고요. 또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그 자기 옆에 있는 자기보다 약한 사래에게 자기의 목숨을 이렇게 의존하게 되는 그와 같은 이제 연약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제 아브라함의 비단 모습이 아니라 말씀을 확보하지 않고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또한 하나님께서 교훈을 해 주시는 거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상입니다.
- 이병호 형제님 : 10절에 보면, 이제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이제 아브라함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이 기근이 찾아오니까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이제 '우거'한다는 거는 잠시 머무는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잠시 이제 애굽 땅에도 이제 잠깐 머물려고 이렇게 내려갔는데 이게 우거한다는 것은, 이제 거하는 거하고 어떻게 보면 이제 반대 개념이죠. 아브라함은 돌아올 걸 생각하고 이제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저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여기서 잘못한 거죠.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이제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까지 그곳에 있었어야 되는데, 그리고 왜 이런 기근을 허락하셨을까, 이제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물었어야 되는데 묻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죠. 먹고 사는 문제죠.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그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동안 저희가 쭉 이제 살펴봤던 것처럼, 1절에서 9절까지 살펴봤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했던 그 정작 중요한 하나님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잊고, 그냥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부분들은 저희들도 참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고 또 우리가 또 경계로 삼아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애굽으로 내려가니까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이제 아브라함에게 이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이 찾아와서 이제 12절에 보면 사래로 인해서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이제 이렇게 아브라함이 두려움 가운데 말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절대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지금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2절에서 이제 첫 번째로 하신 약속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하는데, 아직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죽게 하나님께서 그래서 이렇게 허락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지금 잊고 있고, 또 이제 하나님의 능력도 이제 불신하고 있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애굽은 이제 그 당시에 이제 최강대국이죠. 지금으로 하면 미국과 같이 그런 최강대국인데, 정말 하나님이 이 바로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다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아직 지금 정확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제 어려움과 아브라함의 실패를 통해서 분명하게 이제 아브라함에게 이제 교훈해 주시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이 이제 꾀를 대는데요. 13절에 보면 이제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지금 시키고 있는 거죠. 그런데 사실 이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닙니다. 이 창세기 20장 12절에 보면은 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데, 이제 그때 사래는 사실 이복 누이다, 이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이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이게 또 진실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제 사라에게 "나의 누이라 하라" 그렇게 말하면서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여기서 이제 '내가', '내 목숨' 이런 말이 나오면 위험한 거죠. 사라의 그런 안전과 보존보다 이제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더 우선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1절에서 9절까지 참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정말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그냥 믿음으로 온전히 떠났고, 또 그 약속의 땅에 믿음으로 이렇게 우거했던 그 아브라함이 이렇게 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을 때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때 또 저희가 또 위로가 되고, 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아브라함도 우리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특별히 위대한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거고,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의지하지 못하고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을 때 언제든지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을 해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잘못했는데 이제 17절에 보면 그 재앙이 사실 바로의 집에 내려집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잘못된 결정을 했고, 아브라함이 그런 연약한 가운데 이제 거짓말을 해서 이런 재앙이 이제 애굽에 닥친 건데, 그 재앙이 구체적으로는 안 나와 있기 때문에 이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재앙을 내리심으로 인해서 이제 사래가 이제 바로의 아내가 되는 걸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이때 개입을 하신 거죠.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런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렇게 인도하시는데, 지금 그 사래가 이제 바로의 아내가 되면은 그게 깨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제 개입하셔서 신실하게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제 지키시는 걸 알 수가 있고 그래서 사실 바로는 이제 억울한 부분이 있죠. 자기는 잘못한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잘못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제 바로가 인식했든 못했든, 그것을 방해한 결과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정말 억울할 수도 있지만, 이런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아마 아브라함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렇게 거짓말을 했구나. 그걸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구나.'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있냐면요.
18절에 보면은 이제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제 "어찌하여" 이런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의문사가 이제 두 번 반복 사용하면서 이제 발언을 통해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제 이제 책망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10절에서 이제 20절까지 이 단락을 통해서는 이게 대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약함, 아브라함은 기근이 두려웠고, 이제 바로가 두려워서 이제 이런 실수들을 하고, 연약함을 보게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강하신가,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상황들을 정리하시고 또 바로가 꼼짝 못하게 하시는, 그런 정말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신실하신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 아브라함은 그런 교훈을 분명히 얻었을 것이고, 이제 마태복음 10장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데, 정말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신 자를 두려워하라" 저희들도 사실 아브라함처럼 그런 현실의 어려움 가운데 연약함 가운데 저희들도 그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고 정말 우리가 두려워할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함으로 저희들도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가나안에 오기보다 가나안에 남아 있는 게 더 어렵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아브라함의 행동은 굉장히 모순적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그는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자식 한 명은 있어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후손이 와야 되는데 아직 자식 없잖아요. 절대로 안 죽죠. 이걸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그렇게 하죠. 베드로가 갇혔는데 다음 날 저기 사형 집행 날 저녁에 잘 잡니다. 왜요? 그는 하나님께서 늙어서 다른 사람이 네게 띠 띄우고 가리라 아직 안 늙었거든요. 그러니까 평안하게 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걸 했어야 되고요.
그리고 우리도 그렇죠, 영원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직장을 못 맡깁니다. 이건 모순인 거죠. 어마어마하게 큰 것을 맡겼어요. 그런데 현실에 물질 작은 걸 못 맡깁니다. 이런 게 이제 아브라함이 했던 것 같은 이렇게 모순적인 겁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이제 기근을 주신 이유는 딱 이겁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왔잖아요. 말씀 이외에 어떤 것도 따라가면 안 된다, 이걸 교훈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잠시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죠. 그런데 그가 믿음에 실패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에서 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데 움직인 것입니다.
이제 이런 게 이제 항상 문제인데요. 어떤 사람의 강점이 그의 약점이 됩니다. 다시 예를 들면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전무후무합니다. 그런데 그가 우상을 숭배합니다. 보통 어리석은 사람도 안 할 짓을 합니다. 그런 거죠. 그다음에 모세는 이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평가합니다. 성질나서 지팡이 때려서 못 들어갑니다. 가장 온유한 사람이 화를 냅니다. 사도 요한, 사랑의 사도죠.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한번 태워버릴까요? 우리가 가진 강점이 우리의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강점에 대해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에게 주고 있는 교훈이고요.
그래서 하여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너는 말씀 없이는 움직이면 안 된다. 너는 믿음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교훈하고, 다시 한 번 우리는 실패해서 더 많이 배웁니다. 성공보다 실패해서 더 많이 교훈 받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이때 배울것 같습니다.
시간 약속된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이 정도로 창세기 12장 성경 읽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