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 앞의 네가지 복
< 산상수훈: 앞의 네가지 복 > 강성찬 형제님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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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제 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우리 주님께서 이 산에 올라가사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이제 '산상수훈' 이제 산에서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산상수훈', 이제 그 부분에 이제 시작 부분이고요. 특별히 누가 복이 있는 자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산'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보통 그 '높은 권세'를 상징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제 산에서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은 이제 그분께서 이제 왕으로서, 그 왕의 권세로 이 말씀을 이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사람들, 예수님을 이제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 이제 그 사람들은 참으로 무엇을 참된 복으로 삼는지 이제 그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제 적용할 수 있는 범위는 이제 여러 범위를 생각할 수 있는데요. 특별히 이제 이 시대에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배워야 되는 이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제 이 복 중에 이제 앞부분에 있는 네 가지의 복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데요.
여기 주님께서 누가 복이 있다, 누가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걸 보면 참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하고는 다르다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누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하겠습니까? 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누가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복이 있는 자들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 이게 하나님의 백성들하고 이 세상 사람들하고는 뭐가 차이가 있냐면, 어떤 것을 복으로 생각하냐,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걸 복으로 생각하느냐. 참 성도님들하고 같이 만나서 대화하면 이제 마음이 이제 편안합니다. 그런데 다른 세상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런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생각하는 복, 그들이 추구하는 것, 그들이 좋게 생각하는 것, 이제 그런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 여기에 이제 차이가 있다는 걸 금방 알게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이제 복으로 생각하냐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것이 실제로 복이 안 될 때가 많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세상에서도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이제 어떤 변방에 할아버지가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그 말이 도망쳐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말을 잃어버려서 이게 안 좋은 일이 돼버린 거죠. 그런데 좀 있다 보니까 그 도망친 말이 다른 말을 한 마리 같이 데려온 겁니다. 그러니까는 말이 두 마리가 생겼죠. 그랬더니 이제 말이 도망친 것을 안 좋은 걸로 생각했었는데, 말이 이제 다시 말이 두 마리가 되었으니까 이제 좋은 일이 돼버린 거죠. 그럼데 이번에는 그 새로 들어온 말을 자기 아들이 타고 나가서 그 말에서 떨어져서 그 아들 다리가 부러진 겁니다. 이게 또 이제 안 좋은 일이 돼버린 거죠. 이 세상 사람들도 뭔가 좋은 일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이제 안 좋은 일이 되고, 안 좋은 일처럼 보였는데 좋은 일이 되고, 이제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복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한 번 좋으면 끝까지 좋은 겁니다. 여기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령이 가난한 게 복이 안 될 수가 있을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은 변하지 않는 복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이게 세상이 말하고 있는 복하고 이제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 이제 첫 번째로 이제 종류에서 차이가 났고, 세상에서는 이제 부유하고, 건강하고, 이런 것을 이제 복이라고 생각하죠.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게 복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이렇게 그 복 자체가 다른 것이고요. 또 성격도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이게 복이 될 때가 있고, 복이 안 될 때가 있고, 막 이렇습니다. 실제로 돈 많은 게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이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사실 그렇게 되는 거죠. 건강한 게 복이지만 그 건강한 게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좀 여러 가지 병치레 많이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복되게 사는 게 있는 것이죠. 세상의 복은 이게 뒤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그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계속 그 복은 시작부터 복이었고 계속적으로 복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가보면 거기에 이제 '천국의 비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 그러냐면 사람들이 천국을 거절했을 때, 그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이제 가리워지게 됩니다. 천국이 이제 비밀이 돼버립니다. 그들이 뭐가 진짜 천국인지, 뭐가 진짜 그 천국의 복인지 알 수 없게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천국의 비밀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태복음 5장은 이제 그것과 대조적으로 '천국의 진실'입니다. 여기서는 뭐가 진짜 천국인가, 뭐가 천국의 복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가보면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는 그냥 여러 밭이 있고, 그냥 거기다가 그냥 씨를 쫙쫙 뿌리는 이제 그런 것이 이제 있습니다. 이제 거기 보면 이제 사람들이 '여기 씨를 많이 뿌렸으니까 다 잘 자라겠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열매를 맺는 것은 좋은 밭 뿐입니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고요. 또 마태복음 13장 그 천국의 비밀에서는 밭에 많은 식물들이 자라는 것이 보입니다. '농사 잘 되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수많은 식물들이 가라지입니다. 거기에 실제로 알곡은 얼마 안 되고 잡초가 많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다 파랗게 보이니까, 아이고 지금 농사 잘 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봤을 때 그럴듯해 보이면 지금 잘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13장은 계속 그런 얘기입니다. 거기 보면 겨자씨가 아주 큰 나무로 자랍니다. 아주 그냥 나무가 그냥 크게 자라 가지고 잘 됐네. 아주 좋은 나무네, 생각하는데 이게 기형적으로 자라버린 나무입니다. 원래 이제 겨자씨가 조그맣게 자라야 되는데 이상하게 잘못 자란, 이제 그런 나무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제 떡도 누룩을 넣어가지고 크게 부풀려져 있는, 원래 그 양은 얼마 안 되는 건데 발효돼서 그냥 크게 양만 커져 보이는 그런 빵이 되어진, 이제 이런 게 이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는 지금 번성하네, 성공하고 있네, 이제 이런 것의 모습입니다. 가려져 있는 거죠. 천국의 진짜 모습이,
그래서 그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있냐면은 이제 그물에 많은 고기가 잡혀 있는데, 그 그물에서 좋은 것을 갈라내고 못된 것은 버리는 이제 이런 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제 항상 갈라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갈라내는 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진짜는 정말 보화는 작은 것에 묻혀 있는데 이제 사람들에게 보이기에는 이제 그냥 덮여져 있는 밭으로 보이는 거죠. 감추인 보화, 천국의 모습이 이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주, 정말 작은 진주이지만은 굉장히 값진 것입니다. 이제 실제 진짜배기, 진짜 복된 것은 그렇게 작은 것, 감추어져 있는 것,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걸러내시는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마태복음 5장에서는 그 천국의 이제 진짜가 뭔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이 부분입니다.
이 나와 있는 이제 복들의 특징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건데 이제 그 가운데서 바뀌는 게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했는데, 그들이 실제로는 천국을 가지고 있는 이렇게 되는 거고요. 애통했는데 위로를 받는 게 되고요. 그리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온유한 자에 대조되는 사람이 이제 나중에 찾아보겠지만, 이제 아주 그냥 자기 힘을 써서, 자기의 완력을 써서, 높은 자리에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 자기 힘으로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 이제 그런 사람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이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게 나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불러지,고 이제 이게 바뀌는 게 있습니다. 여기 이제 바뀌는 것은 바로 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뀌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놀라운 상태로 바뀌는 것, 이것을 경험하는 사람, 이게 정말로 복된 것이다. 이게 진짜배기다. 이게 참된 천국의 진실이다. 이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예로 3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이제 가난하다는 것은 이제 여기 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제 심령이, 그의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제 그가 이제 물질적으로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 나와 있는 이런 복들이 전부 이제 영적인 이제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에서 만들어내는 그런 상태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내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역사할 때에 우리 마음의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게 되고, 온유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고, 긍휼히 여기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는데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래서 돈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의 영원히 지금 겸손하게 낮아져 있는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에게 능력이 없고, 나에게 가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는 상태라는 것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시편 23편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여호와께서 안 계셨다면 이 사람은 완전히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다면,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이거를 인정하고 있는 사람, 이걸 느끼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여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표현을 한번 생각을 해볼 텐데요.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제 여러 가지가 언급이 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구절도 그러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말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서술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제 원문으로 보면은 이게 조사라든지 그런 서술어 없이 "여호와 나의 목자" 이렇게 간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하나가 '여호와 목자'라는 것입니다. 이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2절부터는 이제 어떻게 채우시는지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여기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이것은 그 양에게 꼴을 먹이시는, 그 양식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런 구절 구절들마다, 이 시편 23편의 각 구절마다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지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부족할 뿐이었는데, 이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부족들이 다 채워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게 되는 복인 것입니다. 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참으로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 이레',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그 양들을 푸른 초장에 인도하시고 꼴을 먹이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잔잔한 물가에 인도하시고 거기서 평화롭게 쉬는 모습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장면에 언급되는 그런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샬롬'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평안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거기서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 소생시키다라는 것은 우리를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여호와 라파'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말씀을 하십니다. 참 그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시고, 또한 그들 가운데 병이 들지 않게 하시고, 그들이 병들었을 때 치료하시는, 참 그들을 소생시키시는,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낙담하였을 때, 우리의 영혼이 침체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그것을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3절 후반부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는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분이 의를 이 땅에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래서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라" 예레미야 23장 6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 '여홍하 치켄누'라고 그 원어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에스겔서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보면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그 경륜을 다 이루셨을 때, 이제 거기에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해 주시는 그런 이름입니다. '여호와 삼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그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들이, 그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승리케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우리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그 대적에게서 승리를 이루시는, 대적에게서 보호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이기도록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
참으로 우리가 살아있을 때,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를 것이고, 또한 이 생을 마감한 후에도 나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입니다. 참 이 시편 23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족함이 없음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분입니다. 참 우리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능력을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누리는 것이 참 우리에게 참된 복입니다. 참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공급하시고, 쉬게 하시고,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분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실 이 복은 미래적인 것이기도 하면서 굉장히 현재적인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천년 왕국이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서 누리는 복이 아니라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누리는 그런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나중에 천국이 저희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미래형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형으로 지금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지금 이 인생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인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도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지금 현재 이 인생의 그 길 가운데서 누리는 하나님의 그 부족함 없는 공급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돌아가서 두 번째 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애통하다는 것은 이제 무엇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특별히 이제 이 애통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한 군데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고린도전서 5장 말씀 보겠습니다. 여기에 어떤 한 성도가 범죄하였을 때, 이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1-2).
여기서 이 '애통하다'는 것이 여기서요. 이제 '통한히'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애통하다, 슬퍼하다, 근심하다, 여러 가지 단어가 있는데요. 그런데 정확히 마태복음 5장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애통하다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데, 특별히 이제 사용된 데가 이 5장 2절에 "통한히 여기다" 되어 있습니다. 이 '통한히 여기다'라는 것이 여기서는 누가 죄를 범했는데, 특별히 음행이라는 죄를 범했는데, 그 죄에 대해서 마땅히 보여야 되는 반응이 그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제 심각하게 통곡하는 것, 이제 그것을 이제 애통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애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게 문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앞에도 말씀 복음 집회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죄라는 것이 사실 가장 고통스럽게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고요. 사도는 그것을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애통하냐면 계시록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성경책 18장 19절,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애통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아닌데 또 18장 19절에 이렇게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9).
그 큰 성이 망했을 때, 17절에 보면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계 18:17).
그 많은 부가 갑자기 망한 것을 보고, 많은 아주 부요한 그런 성이 망한 것을 보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애통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날려버렸을 때, 많은 돈을 잃어버렸을 때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정말로 애통해야 되는 죄에 대해서는 애통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이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 이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이 죄를 처리를 해야 되는데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특별히 "그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돼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이 애통하는 것에 대해서 위로는 무엇입니까? 아까 특별히 이 애통이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거라고 되어 있는데요. 특별히 이 위로도 죄에 대해서 위로하는 게 있습니다. 요한일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여기서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성경적으로 잘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이 '대언자'라는 것이 '위로하다'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제 이 위로자, 이 대언자라는 단어가 이제 위로자로도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앞에 "위로를 받을 것이요"랑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죄에 대해서 애통할 때 제대로 위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을 통해서 그 죄에서 회복되는 것이 정말 참된 위로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합당하게 처리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피가 흘려졌고 모든 것이 다 처리 되었다는 이 합당한 화목 제물만이 우리를 정말로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에 '아, 나의 죄를 위하여 2천 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지, 그때 이미 그분께서 값을 다 치르셨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큰 희생을 치르셨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참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위로를 하는 게 아니라 이제 잘못 위로하는 게 또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 앞에 이제 여러 가지 잘못들이 쭉 나오고요. 1장 32절에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이 같은 일'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이제 죄들, 불의 추악, 탐욕, 살인, 분쟁, 사기 이런 일들입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잘못된 위로는 "그거 다 그렇게 해.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게 하고, 저 사람들도 다 그대 하잖아." 그 일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하는 것, "괜찮아." 그게 이제 아까 그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애통히 여기지 않고, 그건 이제 그건 교만해진 것입니다. 잘못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제 애통해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것을 이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유한 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에 대해서 이제 같이 이제 생각을 이제 해보려고 하는데요. 우선 시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25편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여기서 성경은 온유한 자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어떤 것이 의로운 것인지를 지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그런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우리 이제 한국 사람에게서는 땅은 그냥 이제 재산이죠. 그런데 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땅은 앞에 복음 집회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일하는 장소'입니다.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그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땅이라는 것은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곳,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섬겨야 되는 곳. 그런데 그렇게 섬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받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잘 받기 때문에 그가 이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이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성경에 이제 여러 가지 부분에서 또 예로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말씀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2-3).
여기에 이제 이 모세가 온유하다라고 돼 있는데요. 이게 이 부분이 이제 성경에서 '온유'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제일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입니다. 이제 어떻게 첫 번째로 언급된 부분을 살펴볼 때에 이 온유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요. 이 상황이 어떤 거냐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만 말씀하시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지 않느냐? 왜 모세가 우리보다 더 높냐? 우리도 모세와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런 말에 대해서 잠잠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서 경쟁하지 않고 그것을 이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이제 온유함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더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온유함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미리암과 아론은 스스로 자기를 높입니다. "아니, 나도 지금 모세 정도 위치에 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이때 당시에 모세가 인도자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인도자들이고 아론과 미리암은 이제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미리암과 아론이 그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도 모세와 같은 레벨이다, 이렇게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게 온유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 모세가 온유하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계속 사용하십니다. 모세가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높이시고, 그를 인도자의 자리에 두시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또 한 군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7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7-11).
사실 이제 이 구약의 말씀을 주님께서 인용하셔서 말씀을 하신 것이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여기서도 37편 7절에 보면, 온유한 사람의 반대되는 사람이 이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 자기가 높아지기 위하여, 형통해지기 위하여 자기의 꾀를 쓰고 자기의 능력으로 높아지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차피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땅을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는 곧 있으면 무대에서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이다. 그는 어떠한 일도 이루지 못하고 없어질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을 즐기리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온유한 사람을 보존하시고, 그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신약으로 가서 갈라디아서 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여기서는 이제 교회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사용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온유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교회 가운데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제 넘어진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일은 신령한 사람, 그리고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온유한 사람이 그 하나님의 도를 잘 알고 하나님의 공의를 지도함을 받고 사용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또한 천년 왕국을 세우실 때에, 이 땅 가운데 그 나라를 세우실 때, 정말 이 온유한 사람들이 문자적으로도 땅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그 많은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인격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참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네 번째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라고 돼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밥 안 먹고 이제 물 조금 안 마시면 금방 주리고 목 마르죠. 우리가 이제 잘 알고 있는 이제 그런 경험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의 몸에 관련된 이제 경험인데요. 우리의 몸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리고 목마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양식과 물이 있다는 것을 이제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주리고 목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주리고 목마른 것은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그리고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저는 여기에 이제 이 '의'를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시편에 보면 이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의로운 규례'라고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군데 또 찾아보자은 구약 성경 신명기 말씀 한 군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8).
여기서도 이 하나님의 말씀, 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공의롭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그 의로운 특징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 이제 '말씀'이라고도 해도 되는데, 이 '말씀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배부를 것이요' 이렇게 해도 되는데, 특별히 이제 '의'라고 표현한 것은 그 말씀이 실제로 이제 실행되는 면까지 같이 포함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행하는 것을, 그것까지 이제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으로 잠깐 돌아가서 마태복음 4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도 이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말씀을 먹는 것과 관련돼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이 산상수훈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말씀에 간절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간절한 사람, 그 사람들이 정말 복이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이 '간절함'을 '주리고 목마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이제 간절한, 가장 시급하게 채워야 되는 이제 그러한 욕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이 채워졌을 때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한 번 채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또 매 끼마다 채워져야 되는 이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이렇게 대할 때에 참으로 그것이 복되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정말 간절하고, 시급하고, 그리고 매일, 그리고 매 끼니마다 채워야 되는 그러한 것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이 채워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빈약하게 말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먹는 것처럼, 마시는 물처럼, 이 말씀을 간절히 찾을 때에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이 참 그와 같은 배부름을 모두 경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참 성경은 말씀에 대해서 여러 번 먹는 것으로 이제 비유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주님께서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반드시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에 대해서 '의로움'이라고 이제 말씀을 하셨는데요. 성경에 그 의로움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그 의로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이 뭔지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 성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가운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인지 궁금하고 간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든 답이 여기에 성경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하버드 교수님이 쓰신 책인데 '정의란 무엇인가?' 이런 유명한 책이 있어서 한번 봤습니다. 정말 궁금하잖아요. 정말 정의가 뭘까? 그런데 그 책에 보니까, 하버드 교수님이 쓰신 책인데 내용을 보니까 결론적으로 이런 것이더라고요. '정의가 뭔지 잘 모르겠다'인 것입니다. 거기에 이제 여러 가지 사례들을 많이 이렇게 언급을 하세요. 이런 경우, 이런 경우, 이런 경우가 있는데, 도대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정의로운 것인가? 대답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많은 갈증을 느낍니다. 참 이런 가운데 어떤 것이 정말 의로운 것인가,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말씀을 펴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주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그런 가운데서 정말 이 모든 성도님들이 배부름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복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이제 그 팔복의 네 가지 것을 말씀을 드렸고요. 그 이후에 또한 4가지가 이제 계속 언급이 됩니다. 그 네 가지는 이제 긍휼히 여기는 것, 그리고 이제 마음이 청결한 것, 또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이제 이런 것이 나옵니다. 이런 것은 그 앞에 복들을 누린 사람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나오는 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나에게 능력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 그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여기는 사람, 그리고 온유한 사람,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정말 말씀에 주리고 목말라서 배고파하는 사람, 그래서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 그래서 말씀을 들은 사람, 이제 그런 사람은 이제 긍휼이 그 가운데서 나올 것입니다. 그 마음이 청결해질 것입니다. 정말 그 말씀이 그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일을 하셨던 것처럼 정말 이 땅에 참된 화평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기꺼이 이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더욱 더욱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전혀 다른 복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참된 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면서 누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이런 복들을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정말 이런 주님이 말씀하신 복, 이런 영적인 복,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깨닫는 복, 이런 복들을 우리가 소망하고 더욱 누리기를 이제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이 대전 중구 모임 성도님들이 더욱 이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