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데이빗 길리란드 형제님

< 헤롯 성전 4.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전의 전도자들 >

박이레 2021. 7. 23. 21:53

< 헤롯 성전 4.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전의 전도자들 > 데이빗 길리란드 형제님

오늘 이 시간으로서 헤롯 성전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헤롯성전을 보았습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 성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헤롯성전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부분이 바로 이 사도행전 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을 나가기 전에 미처 지난시간에 나가지 못했던 몇가지 사진을 함께 보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이 '왕의 창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이 지역에 있는 건물이고 우리는 이 사진을 통해서 안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바닥에 있는 두개의 문이 지하에 있는 힐다문으로부터 지하를 통과해서 나오게되는 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이 돈을 바꾸는 상인들이 자신의 상을 펴놓고 장사를 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 복도 끝의 한쪽 코너에서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소, 말씀드렸던 다른 장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그 '십자가의 날'에 우리 주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이른 아침에 사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바로 그 회의가 이 장소에서 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형을 선고한 후에 그들은 주님을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이 성전 뜰을 지나, 이 도로를 내려와서 빌라도의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 문은 '거절의 문'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분의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벽 앞에서 유대인들이 오늘날에도 와서 울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남자가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시 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벽, 왼쪽을 올려다 본다면, 바로 그 메시아께서 거절 당하셔서 그 '거절의 문'을 통과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 길을 볼수있는 것입니다. 그 참된 메시아를 거절한 것이 이 유대인 나라에 많은 통곡을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장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떠나셨던 그 장소에서 유대인들은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성전을 방문하시고 나가셔서 감람산으로 가셨다는것을 어제 보았습니다. 그 감람산으로 올라갔을때 건너편 기드론 계곡 저편에 있는 성전이 햇빛 아래서 아름답게 그 빛을 반사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도 그 건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며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성전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돌 하나도 그 위에 남기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 아름다운 그 건물이 다 훼파된다는 뉴스는 참으로 그들에게 당혹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셨던 계시는 AD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 오늘날에 지금까지도 이렇게 놓여져있는 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사실 이 지역은 10m정도되는 높이까지 흙으로 덮여져있던 지역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돌이 그 속에 파뭍혀있는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40여년 전에 고고학자들이 이 흙들을 걷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여기에 이 돌 무더기가 놓여져 있는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것은 2t, 어떤것은 4t, 어떤것은 15t까지되는 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돌들이 그 로마 병사들이 성전 위에서부터 무너뜨린 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동안 손대지 않고 흙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돌들이 구세주를 거절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그들의 삶은 이 무너진 돌들처럼 완전히 훼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그 무거운 돌이 위에서부터 떨어져서 그 아래를 망가뜨린 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인도석에 돌이 떨여졌던 것입니다. 이 인도석은 30cm 정도되는 두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큰 돌이 성전에서 무너져 떨어져 내릴때에 그 무게의 충격으로 이 두꺼운 인도석을 다 부셔뜨린 것입니다. 때때로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의 플랫폼, 돌들은 아직도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주님께서 돌 위에 돌이 한돌도 남겨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판론자들은 이것을 잘못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 것은 그 건물 자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성전의 플랫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성전의 거대한 돌들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전 자체 건물에 있는 돌들과 이 둘러싼 돌들의 그 벽들의 돌들은 완전히 다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이 위에있는 건물들의 잔해는, 그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사진으로 본 돌 무더기 외에는 찾아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 성전 플랫폼에 관련된 돌들은 사실상 기술적으로 분리해 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 성전뜰, 플랫폼 밑에있는 그 기초석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이 홀의 길이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크기 입니다. 그리고 이 방의 1.5배정도 되는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4m정도 되는 폭입니다. 그리고 무게는 600t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버스 크기정도 되는 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돌들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성전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다 말씀을 드린것 같은데요, 성전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통곡의 벽 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길이 주님께서 빌라도에게로 끌려갔던 길입니다.

제가 다른 또 흥미로운 한가지를 빠르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성전에서 여러가지 의식들을 할때에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물을 어디서 구하는가, 입니다. 그 성전 의식에 있어서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고, 그 의식이 끝났을때 그들은 많은 물동이들을 다 열어서 물을 흘려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아주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 방 크기가 되는 물 저장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을 저장해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제물에서 나오는 그 피들을 모두 다 씻은 물은 이제 기드론 계곡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피로 말미암아 기드론 시내의 물은 검게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드론의 그 의미는 '검은 시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드론 그 시내는 20마일을 거쳐서 사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물들을 어디서 가져와서 저장해 놓는가, 입니다. 예루살렘에는 1년에 수개월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롯왕은 6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 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에 있는 장소 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축구장 크기만한 저장소가 세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깊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저장소에서부터 경사를 만들어서 이 물이 성전으로 흘러 들어오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수천겔론에 해당하는 물이 매일과 같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될때에 그 수로 파이프를 지금도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 헤롯이 공학자이고 건축가라는 것을 충분히 아실수 있을 겁니다. 참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흥미로운 감명을 주는 건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오히려 이 성전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조물의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방문하게 될때에 그 광장에 세워져 있는 이 기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금 등대입니다. 그들은 이것은 완전히 정금으로 만들었고 성전이 세워질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슬람 사원이 제거되고 그들이 거기에 새로운 성전을 만들었을때 이제 거기에 갖다 놓으려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성전 연구소는 여러가지 성전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마노라라는 기구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이 세상의 빛은 이 성전이 아니고, 세상의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제 사도행전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문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전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가, 입니다. 초기에는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전에 여전히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이 성전을 완전히 떠나기를 주저하였는지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행전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이제 마지막에 가서는 그들은 성전과 완전히 결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 말씀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 3:1-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1-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 4:1-2).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5-12).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행 4:1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2-15).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행 7:1).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5-60).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행 21:26-30).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이는 이 말로, 어떤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행 21:33-36).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행 21:40).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행 22:1).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17-21).

많은 부분을 읽었는데요, 이것을 빠르게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오게 될때에 사복음서에서 본것과 꽤 다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한해에 특별한 세 절기에 성전에 와야 하는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개의 절기는 순례자의 절기라 불리웁니다. 첫번째가 유월절이고 그리고 오순절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게 될때에 주님께서는 유월절과 초막절에 성전을 방문하십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주님이 방문하셨다는 기록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보게 될때에 그 초기의 전도자는 오순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도자들이 유월절과 초막절에 성전에 있는 모습을 발견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왜 그 강조점이 다른가?' 왜냐하면 그 대답으로 그 절기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유월절과 초막절은 특별히 유대인들과 관련된 절기 입니다. 그 유월절은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그들 나라의 장래의 미래 영광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에 그분은 그분 자신을 이스라엘 나라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유대 민족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유월절과 초막절에 성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이라는 절기는 특별히 이 시대의 경륜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밭에서 곡물들을 다 추수한때의 절기 입니다. 그것은 이제 이방인의 밭으로 나아가는것을 또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가진 오순절을 강조해서 보여줍니다. 그 복음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 복음은 이방인의 그 넓은 밭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 성전과 관련되서 세명의 주요 전도자를 보게 됩니다. 첫번째가 베드로 입니다. 또한 다른 사도들도 그와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스데반입니다. 세번째가 사도바울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점점 더 여러가지 것들이 보여지는 것이,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세명의 전도자 베드로, 스데반, 바울이 모두 이 장소에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던, 주님을 사형선고를 내렸던 그 장소입니다. 전도자들은 그들이 죽였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하며 지금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전도 하였습니다. 그 베드로 역시 이 공회에 서서 심문을 받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불러다놓고 바로 이 장소에서 대제사장과 다른 유력자들이 그들을 심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단지 이 장소에서 심문을 받았을뿐 아니라 그리고 이 장소에서 그는 사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서로 대립된 관계가 여기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이 이 지역을 방문하였을때 그도 역시 이 공회가 열린 장소에 오게 됩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참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젋었을때 그는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는 공회의 70인 중 하나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사도바울이 공회원들에게 자기가 심문을 당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성전에 들어오게 될때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오게 됬을때에 이제 폭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 지역에서 사도바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 지역이 로마부대가 주둔하고있는 요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군대의 인도자가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고 부하들을 보내서 그를 구해내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도바울을 구해냈을때에 성전문이 닫혔다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다시 그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분리된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두개가 분리된 것입니다. 이제 초기의 전도자들과 성전은 그것으로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군인들이 사도바울을 데리고 갈때에 그는 여기에 서게 됩니다. 그가 층계에 올라가서 여기에 섰을때에 그는 이 지역에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을 할수가 있게 됩니다. 제가 이것을 다시한번 요약을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성전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성전에서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성전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문이 닫혔다'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명의 중요한 전도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베드로 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성전에 올라가게 될때에 그들은 앉아있는 병자를 보게 됩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항상 이 성전문 앞에 두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미문이라는 곳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아름다운 문 앞에 걷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아주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그 불쌍한 사람을 도울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전도 그를 도울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전혀 도움을 받을수 없이 성전 문앞에 앉아 있었고 그는 결코 성전 안으로 들어갈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라는것은 단지 사람들이 몇푼의 동전을 쥐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로앞에 앉아있는 걷지 못하는 이 남자는 그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불쌍한 남자는 그 성전이 그를 도울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동정의 동전이 그를 도울수 없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를 고칠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는 은과금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갑자기 두발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 층계를 걸어올라 갑니다. 그는 다리에 힘이생겨 그는 뛰어오르며 올라갔던 것입니다. 아주 절름거리며 겨우겨우 그 층계를 올라갔던것이 아닙니다. 그 성전이 할수 없었던 일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러한 일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완전히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단지 육체적으로만 그 복을 받은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복을 입게 됩니다. 그는 이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찬송할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고쳐진 사람을 보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해 볼수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솔로몬 행각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그들은 이제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이 그늘에 모여 있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겨울에 이 솔로몬 행각에 다니셨습니다. 그 복도는 이 방의 넓이와 같은 넓이를 가지고있는 넓은 복도 입니다. 그리고 이 방의 길이의 열배의 길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 남자가 고침을 받았을때, 그는 사도 베드로, 요한과 함께 걸어서 솔로몬 행각으로 가고 수천의 사람들이 그들 주위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는 수년동안 도움받지 못하고 그렇게 앉아있던 남자였습니다. 어떻게 고침을 받을수 있는가? 베드로는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된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분이 이 남자를 건강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전에 있었던 비슷한 일을 기억해낼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셨을때, 약 그때로부터 3년전의 일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38년된 병자가 있었는데 고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고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고침을 받은후에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5장에서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그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바로 그분께서 지금도 살아 계시고 여전히 동일한 능력으로 이러한 일을 하고 계시다는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을 생각해 볼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위대한 성전보다 더 놀라우신 분이란 말인가?" "바로 그 분이 이 성전보다 더 위대하신 분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것이 무엇인지 조사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놀람과 흥분 가운데 공회가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 모이게 됩니다. 이것은 그날 오후 늦은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오후 3시경에 기도시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제 해가 점점 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세시간 정도 그 병고침을 받은 여러가지 흥분과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성전 뜰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회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몇주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며 이 일을 완전히 종결 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이름이 예전보다 더 크게 지금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도 그분을 종결시킬수 없는 분입니다. 누구도 그분을 멀리 보내버릴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대적들 위에 그분은 밝게 항상 빛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이미 늦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으로 보내고 그들은 이른 아침에 공회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은 '어떻게 이 나은자가 고침을 받았는가?' 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기를 단지 한 이름으로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헤롯왕의 이름도 아니고 성전의 이름도 아니고 바로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른 이름은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높아지셨을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이름은 배제시켰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오직 유일한 구세주인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되서 오직 그분의 이름만이 유일한 이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은 어떻습니까? 부처라는 이름은 어떻습니까? 모하마드라는 이름은 어떻습니까? 이 다양한 세상 가운데 많은 구원자의 이름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기독교를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종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베드로의 말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오직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다. 오직 그분만이 사람들의 생명을, 삶을 바꿀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분이다. 오직 그분만이 이 땅에 앉아있는 사람을 다시 걷게 만들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오직 그분만이 이제 사람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할수있는 유일한 분이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다리에 힘을 주시고 우리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그렇게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모여있는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그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와같이 공회원 앞에서 그가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가지 이름을 그가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일곱가지 이름을 같이 합쳐서 단 하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이름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곱개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일곱가지를 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3-4장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행 3:14). 여기 두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거룩한 자', 그리고 '의로운 자'. 그리고 15절 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세번째로 '새명의 주' 입니다.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행 3:18). 네번째로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고 22절에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선지자' 입니다. 그리고 26절에 여섯번째로 "하나님의 종을 세워" '하나님의 종' 입니다. 그리고 4장 11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 '버린 돌' 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베드로는 이 일곱가지의 이름을 가진 바로 이분에게만 구원이 있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일곱가지의 단 한가지 이름으로도 이 말씀집회를 한시간 풍성하게 할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우주를 가득채우실만한 영광을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의 모든 이름이 그 우주의 별 하나하나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름을 하나로 합쳤을때 밝게 빛나는 해와같이 그러한 영광의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기의 전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용기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러한 영광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기쁨가운데 그분의 이름과 자신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받는것을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의 이름과 함께 연합된것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유명한 지도자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며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주 의미있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 건축자들이 버린, 너희들이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한국 성경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그것이 두가지 의미가 될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어로도 두가지 의미가 될수 있습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돌이 그 집의 모퉁이돌 입니까? 헬라어로는 단지 '가장 중요한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요한 돌은 기초에 놓여지는 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돌은 그 모퉁이의 가장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두가지를 동시에 가리키는 단어 입니다. 역시 이 성경도 이 두가지를 동시에 가지는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공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것을 통해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거절한 이 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두셨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보여주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제 너희들이 거절한 그 돌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건축물을 시작하는 첫번째 돌로 놓으셨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두번째 의미입니다. 이것은 아주 혁명적인 그러한 말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건물을 시작하는 첫번째 돌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공회원들은 이 성전보다 더 놀라운 건축물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건축물을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성전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거할 장소가 없었다. 그를 내쫓았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떠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건축물을 시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뻐하는것은 그 건축물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지어져가고 있고 우리는 산돌로서 그 건축물의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 건축을 시작하는 첫번째 돌이라고 말할때 그가 기억하고 있는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언젠가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베드로는 이 말을 통해서 공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과 관련된것을 모두 다 끝나셨다. 이제 그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신다." 이 헤롯성전은 오래전에 이미 훼파되었지만 이 새로운 건축물은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와같이 복음을 전하면서 새로운 기초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이 성전에 대해서 너희들은 신경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 건축하는 건물을 알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새로운 기초에 대해서 말하는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두번째로 그 성전 안에서 두번째 전도자를 보겠습니다. 그는 이 열두사도 중에 한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총명한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었습니다. 그의 봉사는 그의 목숨을 댓가로 지불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공회원들은 그를 이 공회실로 불러 심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비난하기를 스데반이 이 성전을 모욕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은 이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건물이고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노한것이 이제 스데반이 여기에 계시지 않고 성전을 떠나셨다고 암시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그와같은 말을 할때에 그는 얼굴이 천사와같이 빛이 났습니다. 스데반이 그가 서 있는곳은 바로 얼마전에 우리 주님께서 서있던 자리라는것을 생각하게 될때에 참으로 저의 마음에 감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그곳에 서 있을때 그들은 스데반의 얼굴을 주목하게 됩니다. 참으로 스데반이 그곳에 섰을때에 주님의 영광이 스데반의 얼굴이 비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게 되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와있는 스데반의 전도는 '스데반의 별론'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전체적으로 다 다루지는 않겠지만 몇가지를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데반이 말한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 놀라운 건물에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통곡의 벽에 가서 볼때에 거기옆에 작은 사인판이 붙어져있고 거기에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싸인이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믿기를 그 성전이 이미 다 훼파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 계시다고 믿고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전혀 다른방식으로 말합니다. 아주 그들에게 급진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아주 싫어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면서 시작 합니다. 참으로 젊은 사람으로서 그가 구약성경을 그렇게 손으로 잘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볼때에 저에게 또한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경과 그 자신의 영혼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는 이 변론을 아주 놀랍게 하고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 성경을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는 젊은이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임 가운데에 참 의학에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학에 유능한 젊은이도 있을수 있습니다. 또한 컴퓨터에 아주 유능한 젊은이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성경에 박학한 젊은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오후시간에 많은 젊은 성도님들이 와 계신것을 볼때에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과 정열을 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쏟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학교생활의 바쁨으로 졸업하고 내가 나중에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예언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그것을 나중에 할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이 되면 더욱 바빠질 것입니다. 결혼하고,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을 돌보고, 많은 다중적인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을 연구할수 있는 가장 좋은때는 여러분의 10대와 20대 입니다. 제가 그래서 심각하게 젊은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10대와 20대에 이 성경에 대해서 확고하게 붙잡고 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곧 다 놓치게 될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아주 정직하게 호소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 최고의 시간들을 여러분의 지적인 능력이 가장 활발한 시간을 단지 세상 일에만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마지막에 돌아보게 될때에 나의 가장 최선과 최고의 것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쏟았다는 것을 알게될때 정말 슬픈일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에 그렇게 많은것을 쏟고 그리고 저 영원한 세상에 아주 조금 쏟았다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그냥 먼지와같이 그냥 다 사라지고 말것입니다. 그 저세상, 영원한 세상에, 여러분의 영원한, 여러분의 시간을 드리기 바랍니다.

다른것을 한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스데반이 이 놀라운 전도를 하게 될때에 그는 그때가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젊은 분에게 다시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길이가 짧을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퇴하고 오랫동안 살것을 꿈꾸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오지 않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성경으로 충만한, 성령으로 충만한, 그래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할수 있는 이러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되지 못하는 것을 볼때에 참으로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공회원들은 "네가 말하기를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다는 말인가?"물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역사를 통해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때에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그때 메소포타미아에서 영광을 보이셨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요셉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라. 요셉은 이집트에 있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때 요셉과 함께 하나님이 계셨다. 요셉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집트에 있지 않았는가? 모세를 생각해 보아라. 모세가 그 광야의 사막에 있을때에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시지 않았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이 건축물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와같이 단정적으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것이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단지 이 건물을 그냥 보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세주께 했던일을 동일하게 스데반에게 행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성문 밖으로 내어가고 거기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문 밖으로 끌고가고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을 집행하는 곳에 있던 무리 중의 한사람이 그 다음 전도자가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짐작할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다소의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전도자가 되었고 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빠르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그렇게 전도한 것이 완전히 참된 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가 빠르게 말씀드릴것이기 때문에 주의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임재가 단지 이 건물에 제한받는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8장, 9장 10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에서 광야에 자신의 병거 위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여기서 발견할수 있는 아이러니는 그가 하나님을 뵈러 예루살렘에 왔고 그 성전에도 왔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는 길에 광야에서 그의 수레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참으로 스데반의 말을 맞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성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9장을 보시겠습니다. 그 다소의 사울은 어디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는 완전히 이방 도시인 다마스커스(다메섹)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주님의 임재가 그를 멈추고 그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10장은 어떻습니까? 고넬료가 구원 받습니다. 고넬료가 어디서 구원 받았습니까? 성전에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가이샤라에 있는 자기 자신의 집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전파하기를 "하나님은 새로운 기초를 놓으셨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선을 넓히셨다."라고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이 성전에서 말한 그 전도를 보겠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아주 자주 성전을 방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에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이 성전에 이방인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그는 성전에 들어갑니다. 이제 그 중에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성에서 그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있는것을 보고 그들이 생각하기를 사도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고 생각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전혀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유대인이 본 것은 사도바울과 그의 이방인 친구가 성에서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도바울이 그 다음날, 성전안에 있는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이방인들은 이 펜스 안으로 더 이상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2+1을, 5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추측은 중상모략을 낳았고 그것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제가 아닌데 우리의 추측으로 다른 사람을 중상하는 경우가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또한 컴퓨터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게 됩니다. 저는 많은 지역교회에서 단지 사람들이 추측한 것으로 중상이 시작되고 그것이 폭동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왔을때 그 폭동이 일어났고 이제 사도바울은 안으로 들어갔고 성전문은 닫혔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이 로마의 군 요새 위에 서서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된 상태로 그가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놀라운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아주 충격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말했고 그가 어떤 임무를 받았는지를 말했습니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나는 이 성전 가운데에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셨을때 이 성전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하셨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냥 사도바울이 스스로 생각해 낸, 좀 이상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도바울이 구원받고 성전에 있을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그가 그 명령을 따라서 한 것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전한 그 전도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게 된 이방인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청중들에게 이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제 여러가지 것들은 닫아졌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갈수 없는, 유대인들만 갈수있는 구역을 나누는 그 담을 허무셨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성전을 가지고 계시고 그 안에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그 벽을 다 허무셨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됬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그러한 사실입니다.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2등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례를 통해 믿는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유대인의 성전을 통해서 믿는자가 된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온전한 그런 관계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깊게 생각해야 됩니다. 단지 이방인들이 완전 유대인 수준으로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들 모두 예전에는 갖지못한 놀라운 수준으로 함께 하나가 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성전문이 닫혔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다시 이 헤롯성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새로운 기초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새로운 지평선을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건물을 넘어서 더 넓은곳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새로운 교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교제 안에서는 이 성전에 있었던 것처럼 그런 의식들, 그런 옷들, 그런 악기들, 더이상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더 이상 제가 오늘 말씀집회를 안맏아서 다행입니다.(웃음) 제가 이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더 이상 성전에 관여할 것이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 성전을 관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많은 수고와 많은 시간들이 들어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성전을 잘 관리해야 되는 책임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아주 심각한 소식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 성도님들과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두개의 성전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개나 되는 성전을 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가 아니고 우리는 두개를 관리해야 됩니다. 첫번째 성전은 우리 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성전은 우리 지역교회 입니다. 그 성전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 성전은 정결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우리가 우리 몸을 정결케하고 또한 우리 지역교회를 정결케 보존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전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모든 각각의 성도님들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고 또한 지역교회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정결한 곳이고 또한 주님께서 임재한 곳이고 또한 여기 성전은 찬송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한 이 지역교회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찬양을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가 이 성전을 정결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곳으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헤롯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여러분과 제가 이 거룩한 성전을 위해서 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할것인가 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해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