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언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덕언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11장 25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하는 구절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원래는 출애굽기에 보면 이제 모세가 그 양을 치다가 불타고 있는 관목에서 '왜 불이 타는데 나무가 없어지지 않지?' 하고 가다가 거기서 이제 주님을 만나죠. 그리고 이제 주님의 이름을 물어보죠. 그랬을 때 주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했던 그 표현을,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엇무엇이다라고 하는 표현을 이제 주님께서 신약에서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하는 건데요. 요한복음 11장 2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문맥상 잠깐 앞에를 좀 보겠습니다. 마르다 하고 이야기한 건데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1-26).
우선 이제 마르다는 이렇게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킬 때 안타깝게 병으로 죽은 나사로도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었죠. 이건 성경적으로 맞는 거죠. 그 마르다의 믿음에 주님께서 이제 더하십니다. 마지막 날 부활의 날이 있다라고 하는 것 이외에 주님께서 내가 부활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부활이다라고 하는 것은 우선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은 부활시키시는 분입니다. 마지막 날 모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킬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믿는 자의 부활입니다. 둘째 부활은 믿지 않는 자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은 부활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고 그리고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또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그 몸을 입고 그리고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제 그와 같은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죠.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다라고 했을 때, 믿는 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아계시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렇게 되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믿는 자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지만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일어난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부활의 핵심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나는 부활이다"라고 했을 때 두 번째는 예수님이 오셔야 부활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1장 볼 때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 예가 어디 있었냐면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왕의 신하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오죠.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가셔서 내 아들을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주님께서 가시지 않고 거기서 말씀하시죠. "네 아들이 살았다 가라." 시간과 공간이 주님에게는 제약이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님은 이곳에서 말씀하시면 이루어집니다. 또 로마의 백부장이 그랬었죠. 자기 병든 종을 고쳐달라고 그러니까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 이번에는 백부장이 말합니다. "주여 오시지 마옵소서. 주님께서 제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거기서 말씀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나사로가 무덤에 있어도, 있는 곳에서 떨어져 있으셔도 나사로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셔서 살려내십니다. 그러듯이 주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다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데살로니가 4장에 보시면 주님이 공중에 오십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부활시킵니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임재 하에서 주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부활한다. 그리고 주님이 임재해 있을 때 부활이 일어난다는 뜻이고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왜 부활을 먼저 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을 수 있는데 "부활이요 생명이니" 한 거죠. 부활은 그전에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은 먼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 합니다. 그 후에 부활하십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야 이제 영원한 생명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런데 주님이 죄 없으신 분이므로 주님은 부활하셔야 합니다. 혹은 주님의 대속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이므로 이제 아버지께서 다시 주님을 완성한 사역을 근거로 살려내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생명,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셨고요.
또 잠깐 이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교회가 부활할 때, 이제 주님이 공중에 오셔서 이제 휴거시키실 때 두 가지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때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그 당시까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죽은 무덤에 있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고 그리고 살아있는 자가 변화되어 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서상 먼저 부활이 있고 그다음에 생명이 그다음 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 더 말씀드리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했을 때 이제 동사가 '나는' im입니다. '나는' 현재 형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미래가 아니고 현재 형입니다. 마르다에게는 부활이 미래형입니다. 우선 마르다에게는 뭐가 문제냐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서, 부활이 오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어버렸습니다. 거리가 문제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 다 함께 부활하는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가 문제입니다.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의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제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시간도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부활이고 지금 영원한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마르다가 저희들처럼 마지막 날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고 있는 마르나에게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더 계시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나사로가 실제로 부활한 것을 봤는데요.
저희들은 실제로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으로 가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인데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혹은 부활은 믿는 자에게 이와 같은 동기를 부여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9절 보시겠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고전 15:29).
이게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입니다. 30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이제 수사적 의문문이죠.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고전 15:30).
29절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하여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30절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위험을 무릅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32절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2-33).
이게 이제 세 번째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세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29절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습니다. 이 구절은 이제 성경에서 굉장히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이제 구절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장 보편적인 해석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전체로 쭉 놓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전체로 사도행전 2장부터 교회가 세워졌을 때부터, 그리고 이제 주님 공중에 오실 때까지 교회를 전체적으로 놓고 봅니다. 어떤 성도가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며 삽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떤 성도가 죽습니다. 그러면 그 죽은 성도를 위해서 침례받습니다. 이제 침례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그 당시 사회적인 문맥상 이제 침례를 받으면 그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순교까지 당하는 시절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믿음을 증거하고 그 믿음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면 그다음 성도들이 그와 같은 믿음의 순교를 보고 자신도 다시 침례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 교회의 증거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왜 죽음을 무릅쓰고 침례를 받느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의 증거, 스데반이 주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증거를 보고 사도 바울이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침례받고 또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활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이 일어나도 그것으로 인하여 뒤로 물러가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고 담대하게 순교가 이어진다라고 하는 게 이제 첫 번째 해석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해석은 이렇게 보겠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받는다는 것은 어떤 성도가 죽습니다. 죽으면서 가장 이제 극적인 예를 들면 어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이제 자녀들과 이제 마지막으로 임종을 앞두고, 서로 이제 헤어집니다. 구원받은 자녀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보자. 곧 만나자."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도 돌아가실때, 이제 부모님 돌아가실 때 슬픔이 있지만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 중에 믿지 않는 자녀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부모가 죽으면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을 못합니다. 이게 이제 그런 거죠. 그래서 이제 임종하고 있는 부모가 믿지 않는 자녀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나와 함께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시 만날 소망이 있다. 단 네가 믿어야 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임종을 하면 이 자녀가 복음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가도 이제 이 부모의 사랑을 보고 그가 구원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침례는 아까는 순교로 해석했다면 여기서의 침례는 구원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침례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 동기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다시 만날 소망을 인하여 구원을 받는 일이 생긴다. 이게 첫 번째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30절, 어찌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절 보시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랬는데 날마다 죽노라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건 문자적인 죽음입니다. 그다음에 32절,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매일매일 죽음의 위협 앞에 서는 삶을 삽니다. 오늘 일어나면 오늘은 또 누가 죽이려고 할지 모릅니다. 또 내일 일어나면 내일도 또 누가 죽이려고 할지 모르는 그와 같은 삶을 삽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데요.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의 숫자가 40명이 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삶을 삽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보다 귀한 게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보다 귀한 게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있기 때문에 그가 위험한 목숨이 위협받는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동기를 줍니다. 부활은 첫째, 우리에게 구원받아야 된다는 동기를 줍니다. 두 번째, 우리가 주님을 섬겨야 된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위하여 기쁘시게 해드리는 인생을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32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부활이 없으면 사람의 삶은 짐승 같은 수준의 삶을 삽니다. 먹고 마시는 게 전부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제 거룩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제 주님을 닮고, 기도하고, 또 주님의 뜻을 순종하고, 라고 하는 참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가 가능하다. 세 가지 동기가 주어진답니다. 첫째, 부활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아야 합니다. 다시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주님, 생명보다 더 귀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처럼 살지 않고, 또 짐승처럼 살지 않고, 주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이 땅 가운데서 살다가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게 부활이 주는 세 가지 동기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이 말씀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참으로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의 근거가 되고 또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복된 근거가 될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아야 되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섬겨야 되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이 저희들에게 주시고, 또 도전하고, 저희들 마음속에 새겨질 말씀으로 받아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