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4장 : 하나님의 회복의 시작과 온전한 결과(요약)
< 룻기 4장 : 하나님의 회복의 시작과 온전한 결과 > / 25년 2월 16일 일요일(요약2) / 강성찬 형제님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룻1:6, 개역한글)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4:13-17, 개역한글)
앞부분은 룻의 가정의 첫 회복의 부분이 나와 있고요. 4장에서는 최종적으로 룻이 결혼을 하게 되고 아무런 소망이 있던 시모 나오미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아들은 이후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4장은 여호와께서 아이를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여호와께서 하셨다는 첫번째것과 마지막 것을 살피기를 원합니다. 이 두가지가 하나님의 하시는 기본적인 것과 모든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고 아이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양식을 얻고 결혼해서 살다보면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발달한 사회 가운데서도 양식도 아이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기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두가지 회복의 경우입니다.
특별히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을 상징하는것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것들을 받아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이가 필요합니다. 이 아이에 대해서 14절은 특별히 "기업무를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아이는 그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적으로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양식이 필요할뿐 아니라 그 축복을 계속 누리게 할 아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도 먹을 양식이 있고 아이가 있다면 필요한 모든것을 충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을 다시 말씀드리자면 아이라는 것은 그 가정이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재 이어지는 복이 그 다음세대에도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특별히 "기업무를 자"라고 나와 있는데요. 성경에서 특별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25:25,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나눠주십니다. 이 가문은, 이 지파는 이 지역의 땅을 계속 소유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잘못해서 파산하게 되어 그 땅을 다른사람에게 팔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처음 나눠주신 것을 그 백성들이 계속 소유하고 누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파산해서 어쩔수 없이 그 땅을 팔았다 할지라도 다시 되살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것이 없습니다. 한번 팔았던 집을 다시 살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되살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되살수 있는 권리를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가까운 친족이 그것을 대신 사줄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문이 계속해서 그 땅을 소유할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에서 그 아기가 "기업 무를 자"가 되산다는 뜻이고, 가난해서 그 땅을 팔았는데, 그 땅을 다시 살수있는 사람을 기업을 무를 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많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불순종해서, 소홀히 여겨서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아주 좋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정원을 만드시고 그 안에서 그들이 누리게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신 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기업무를 자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업무를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의 기업을 얻게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대가를 치루시고 우리가 기업을 다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레25:48, 개역한글)
여기서는 이 사람이 파산해서 그 땅을 팔았을뿐 아니라 이제 자기를 노예로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다시 되살수 있도록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자기의 형제 중에 하나가 부유해서 충분한 돈이 있으면 대신 돈을 내주고 속량하는 것입니다. 속량이 돈을 내주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는순간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없이하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주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19:25, 개역한글)
여기 구속자가 앞에 나온 기업 무를 자와 같은 단어입니다. 욥은 여기서 그의 명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와같이 고난을 겪는지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또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곤나을 받는 것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이는 나를 변호해줄, 기업무를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업무를 자는 우리의 기업을 되찾아줄 뿐만 아니라, 자유를 되찾아 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명예도 되찾아 줍니다. 우리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명예를 되찾아 줄 대언자가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말씀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또 구약성경에서 이 기업 무를자가 사용된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민35:19, 개역한글)
여기 보면 어떤 사람이 일부러 다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 대적을 심판하는 일을 하는 "피를 보수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피를 보수하는 자가 앞에 나온 기업무를 자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피를 보수하는 자가 대신해서 그 대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마귀를 없이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업무를 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업을, 생명을, 이름을, 자유를 보장하실 기업 무를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사실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있어서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그 복을 잃어버립니다. 빼앗기고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온전히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빛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룻4:15, 개역한글)
여기서는 나오미가 나이가 많았을 때에, 그 아기가 나오미를 잘 봉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과 대조해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가 할머니를 봉양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마지막에 가장 심각한 어려움을 겪에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이고 그로 인해서 많은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노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중심이 되는, 수도가 되는 나라로서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 관점에서 이 일을 말씀드리고자 하는데요. 이 나오미의 회복의 시작점은 이 양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온전히 회복되는 시점은 아이입니다. 룻기를 계속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룻기 중간 중간에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로부터 양식을 얻는것이 나와 있습니다. 룻이 이삭줍기를 했던 보리를 한에바를 주워 옵니다. 3장에서는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를 여섯번 되어 줍니다. 보면 점점 그 양식이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은혜로 받게되는 양식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이제 4장에서는 보리가 아니라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우리의 회복의 결론은 이 아기를 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을 기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면서 기뻐하지만, 결국에는 그 기업무를 자에게, 복을 주시는 그분에게 나오고 그분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양식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그 땅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때는 그 양식을 품에 안고있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양식을 주시는 분, 그 아이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 아기가 기업무를 자일 뿐만 아니라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입니다. 이 기업 무를 자는 베들레헴에 계속 있었습니다. 기근이 왔지만 보아스는 신실하게 그 땅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런 축복들이 없을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금방 어려워하고 낙심해서 그 자리를 떠나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없이 보아스처럼 계속해서 거기까지 남아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거기까지 회복됩니다. 아기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4:16, 개역한글)
우리가 아기를 품어보면 거기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양식을 많이 안고 있어도 기분이 좋습니다만, 아기를 안았을 때에 그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육자"라는 것이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이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기서 "믿으니"라는 단어입니다. 전혀 다른 단어지만, 히브리어의 문법적인 것을 고려할때에 이것이 맞게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가 많은 경우에 '믿다'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상징적으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안고 참된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하실 때에 항상 이렇게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온전히 회복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만족할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데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마포모임에서는 룻기 성경읽기를 끝내고 에스라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도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실패하고 회복이 필요하기에,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회복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포로되어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원래 땅으로 되돌리시는 하나님의 회복이 기록된 책입니다.
에스라서를 우리가 천천히 읽어보면 그 회복이 단지 원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정도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거기 돌아와서 살뿐만 아니라 성전을 짓도록 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가는 목적이 분명히 나옵니다.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 하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더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에스라가 10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6장이 성전 건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랜 시간의 갭이 있습니다. 60-70년의 시간의 갭이 있고요, 에스더 왕비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7-10장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바베론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인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에스라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스7:27, 개역한글)
에스라 7-10장까지는 그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어떻게 아름답게 꾸밀까요? 7-10장의 내용을 보면 성전에 뭔가 아름다운 것들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7:10, 개역한글)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침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회복의 모습입니다.
단지 이 땅으로 돌아올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것을 준행하여 성전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회복의 목적이고 모습입니다. 이것이 나모이가 아이를 안고있는 것과 동일한 모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7, 개역한글)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열심을 낸 것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열심을 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모든것을 다 희생하실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2:13-16, 개역한글)
주님께서 열심을 내는 것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요한복음 2장 뒷부분을 보면, 주님께서 참된 성전이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주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에 열심을 내셨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아름답게 아버지 하나님께 보여지는 것이 우리 주님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2:1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열심으로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선한일에 열심하는 백성이 되게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디도서 2장도 성전을 깨끗게 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디도서는 지역교회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집이 이 지역교회입니다. 어떤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각 성도들이, 늙은 남자이든지, 여자든지, 젊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딛2:10, 개역한글)
여기는 측별히 그 지역교회를 이루는 종들에게 하는 말씀이지만, 이는 동일하게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받게 됩니다. 누구라도 받는 말씀입니다. 이는 범사에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꾸민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성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집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고 회복의 최종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러가지 침체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낙심하고 영적인 회복이 필요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나오미를 그렇게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임재로 온전히 만족할수 있는 거기까지 오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여러 성도들을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회복의 온전한 수준을 항상 누리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