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전의석 형제님(요약)

성도 : 요단강을 건너는 언약궤

박이레 2025. 2. 9. 12:48

성도 : 요단강을 건너는 언약궤 / 25년 2월 9일 일요일(요약2) / 전의석 형제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막10:35-40, 개역한글)

제가 언약궤에 대해서 계속 교제를 드리고 있는데요. 출애굽기 25장에서 언약궤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이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비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최종적으로 성전에 안치되는 것을 비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들어가는 가운데 다윗과 솔로몬의 전에 여호수아 때에 언약궤가 요단강을 건넙니다. 언약궤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졌습니다.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 언약궤가 주어졌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최종적으로 안치가 됩니다.

그같은 요단강을 언약궤가 건널때에 그냥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는 백성들 앞서 먼저 요단강을 지납니다.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두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는 잔과 나의 받는 침례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주님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직 받지 않은 곧 받을 침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받을 침례" 그리고 앞으로 마실 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받을 잔"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잔에 대해서 기도하십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주님은 사실 이 잔을 마시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 베드로가 검으로 하속의 귀를 쳤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하속의 귀를 낫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이 잔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침례과 잔은 구별이 됩니다. 둘다 액체이지만, 잔은 그 액체가 사람의 속으로 들어갑니다. 침례는 그 사람의 외형적인 것을 다 잠기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고난, 두가지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두가지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잔이 먼저고 침례가 그 다음입니다. 제가 막 구원받을 때에는 주님의 외적인 고난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영적으로 성장할 때에 인도함을 받는 것은 내적인 고난이 주님의 마음을 심히 고민하게 했고, 죽기까지의 고민이 있으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의 관계는 늘 하나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한 가운데서 이 세상을 사셨지만 주님은 늘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부관계를 맺고 이혼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이혼하는 것인데도, 그 관계의 단절 때문에 울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관계도, 부모 자식과의 관계도 애통하고 슬퍼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드님의 관계는 그것을 뛰어넘는 관계였을텐데, 십자가에서 그것이 끊어졌습니다.
제가 자녀를 낳아보니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 아들로써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할수 없습니다. 그 고난의 정도를 상상할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외적인 고난과 내적인 고난을 다 살피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생각해 보는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잔을 보면서 언약궤가 요단강을 넘어가는 것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수3:1-17, 개역한글)

특별히 홍해와 요단강의 차이가 있습니다. 홍해는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해가 갈라져서 애굽군대와 이스라엘을 갈랐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또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서서 보라고 하셧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미리 성결케 하는 준비해야 했습니다.
홍해는 밤에 갈라졌습니다. 요단강은 낮에 갈라졌습니다. 왜녀하면 언약궤를 보고 백성들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밝은 낮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홍해는 강한 바람이 홍해를 갈랐다면 요단강은 그런것이 없었습니다.
홍해는 좌우로 갈라져서 나뉘어졌다면 요단강은 강이 끊어져서 아랫물은 흘러가 버렸습니다. 홍해는 애굽의 군대가 다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요단강은 그 건넌 강에 열두돌을 세워두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언약궤를 메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핫 자손들이 메었습니다. 여기는 특별히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표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깨에 메는 것은 무언가를 드는 것이기에 힘들고 피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특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체험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어깨에 멘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책임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주님을 기념하고 증거하고 나타내었습니다.
이 만찬을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영적인 일입니다. 일주일동안 주님을 묵상하며 주님이 주신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때로 피곤한 일일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준비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 자리에 와서야 무엇을 말할까, 기념하까 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 나가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행하시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거가 2천규빗 정도, 약 800m입니다. 주님의 나가심을 보는 가운데서 좇아가야 합니다.
4절에서 언약궤가 먼저 가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푯대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가게 될때, 불안하거나 우왕좌왕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여리고입니다. 이 위치를 다른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8-29, 개역한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를 보면 그 위치가 여리고 건너편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주님께서 침례를 받은 이 자리가 언약궤가 요단강을 건너는 그 자리와 유사할 것이라고 봅니다.
요단과 안드레와 빌립이 주님을 따라갑니다. 백성들이 언약궤가 가는것을 먼저 보는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을 좇았던 것처럼 백성들이 언약궤를 좇아갑니다.
언역궤는 앞서 갈뿐만 아니라 요단강 안에 (물가로)들어갑니다. 그리고 요단강 한 가운데 서 있을뿐 아니라, 그리고 이 언약궤가 요단에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받으시는 침례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받을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하시는 모습,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 그리고 부활하셔서 베다니에서 승천하십니다. 주님은 베다니에서 시작하셔서 베다니로 끝납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지명은 다르지만 크게 베다니라는 틀은 같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4장에 대해서도 교제드리겠습니다.

이제 지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수3:16-17, 개역한글)

아담은 첫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물이 끝에 흘러가는 것은 염해, 곧 사해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첫 사람의 본성대로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죽습니다. 그리고 말라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여정은 아담으로 태어난 본성으로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요단강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다 지나갑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이 강을 건너는데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특별히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약해서 못합니다, 라는 말을 할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요단강을 지날 때에 속히 지나갑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섰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수4:10, 개역한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이 힘든일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속히 지나가지 않으면 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피곤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단강을 속히 건너는 것은 또한 주님의 기사와 능력을 선전하는 일입니다.

이와같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풍부한 교훈을 저희에게 줍니다. 제가 이 말씀의 1/100 이라도 제대로 소개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주님을 묵상하며 이번 한주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과 같은 힘있는 한주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