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신 주 예수 그리스도
< 나귀를 타신 주 예수 그리스도 > 기드온 쿠 형제님
예, 안녕하십니까. 다시 한 번 이번 집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따뜻한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이 시간을 빌어 마포 모임의 성도님들께 여러분의 친절 감사와 저희의 인사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참 저와 제 아내는 여러분께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저에게 보여주신 여러분의 친절과 그 접대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큰 감사의 인사를 대신 전해드립니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말레이시아 성도님들을 대표해서 또한 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기에 말레이시아에서 온 성도님들은 이제 한국에 방문해서 이와 같이 한국 성도님들과 처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 여러분과 함께 또 그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 교제를 나눌 때에 여러분들이 하는 그런 말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또 여러분들이 보여주신 여러 가지 태도와 친절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말레이시아 성도님들을 대신해서 여러분에게 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중에 많은 분들이 이미 말레이시아 방문하셨죠? 이미 여러분과 저희 사이에 특별한 그 느낌이 관계가 맺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올해 말에는 한 수양회가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분들이 그 수양회에 참석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이번 시간에 다룰 주제는 우리 주님의 여정 가운데 있었던 나귀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의 관심사는 그 짐승 위에 타셨던 분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단지 짐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한 이번 시간에도 그와 같이 실질적인 교훈을 여기서 얻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번 시간에는 우리 주님께서 그 위에 타셨던 그 나귀로부터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절부터 9절까지 형제님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1-9).
그리고 33절부터 46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33-46).
이 말씀 읽어주신 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기를 의지하게 됩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교제하기 전에 또 다른 한 분에게 감사드리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옆에 강 형제님이 저와 함께 12일 동안 여행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집회를 할 수없었을 것입니다. 또 옆에 형제님께서 열심히 한국어로 통역을 해 주셨습니다. 목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기드온 형제님 아주 피곤하신가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제 좋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피곤하다면 강 형제님이 저보다 더 피곤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통역을 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천 킬로를 또 운전을 해야 합니다. 아 그래서 저는 통역하는 형제님이 더 피곤하실 거라 생각이 듭니다. 저의 비행기가 이제 연기되었다고 말했을 때에, 형제님께서 몇 가지 미팅을 더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집회를 만든다면 가장 먼저 쓰러질 사람이, 강 형제님이 가장 먼저 쓰러질 것입니다. 참으로 강 형제님이 여러 가지로 도와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집회의 마지막으로 상고해 볼 그 인물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적당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읽은 이 장은 이제 십자가를 앞두고 매우 가까운 시점입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그분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일주, 또는 그보다 더 가까이에 바로 그 나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이 사건에서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일요일에 일어났던 일일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신다면, 거기에 종려나무 길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건이 말하고 있는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던 그 성전의 동편에 있는 길입니다. 그것은 '종려나무 일요일 길'이라고 불리는데요. 바로 이 사건이 그 일요일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그들의 손에 들고 그분을 환영하였습니다. 만약 이제 그 날짜가 정확하다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한 5일 전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지금 이 성으로 오시는 이가 누구뇨?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곧 갈보리에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또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것은 이 종려나무 잎을 들고 흔든 그 사람들은 바로 갈릴리부터 북쪽에서 남쪽까지 계속 주님과 함께 여행했던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 나중에 소리를 지르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를 없이하라, 없이하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대부분이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 거기 사람들이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시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그 관점을 택하게 될 때에, 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사람들이 북쪽에서부터 왔던 사람들이건 간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그들은 더욱 주님을 미워하고 시기했던 사람들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두 무리의 사람들을 이제 한 나라로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 한 전체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유대인들이, 너희들이 십자가에 그를 못 박았도다." 그것은 그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이렇게 관점을 택하게 될 때 참으로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이 얼마 안 되는 일요일에는 주님을 환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이제 자기들을 구원할 자라고 그를 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빠르게, 며칠 안에 그들은 그 방향을 바꿔버립니까? 바로 전 일요일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금요일에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그 주권과 통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에, 특별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시기 24시간 전에, 이게 여러 사건들이 빠르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실 어떤 1년이나 한 달 안에 일어날 만한 사건이 그냥 쭉 일어나버린 것입니다. 그 24시간 안에 여러 사건들이 기존과 다르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여러 번 오랫동안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24시간 동안 이제 가롯유다가 배신하였고, 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음모가 이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사실 지난 2~3년 동안 그렇게 하고자 시도했지만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24시간 안에 쭉 빠르게 일어나버린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이 갑자기 아주 똑똑해진 걸까요? 이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있어서 아주 현명하게 창조적으로 된 건가요?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모두 주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전에는 그들이 수년간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여러 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이르자 바로 그 날이 왔고, 이 모든 일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요한복음 13장을 보게 될 때 그래서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습니다. 요한이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그 때가 이미 이룬 줄을 아시고"라고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이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그때가 온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때입니다. 그래서 이 24시간 안에 수년간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 그 모든 것들이 24시간 안에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일은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읽은 부분이 시작 부분입니다. 이제 종려, 그 일요일 길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이제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이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온성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분이 누구신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실망하고 맙니다. 참으로 그분은 이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오시는 분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그 나라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가져오신 것은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분에 대해서 실망한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 이 배경은 아주 흥미로운 점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행해야 하는 것을 필요를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마을로 가서 이제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제 엄마 나귀와 그 새끼 나귀가 있을 것이다. 여기 이제 나와 있는 언어가 영어로는 조금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엄마 나귀 그리고 애기 나귀, 이제 제자들에게 그 나이들을 찾거든 이제 풀어서 내게로 끌고 와라. 물론 그 나귀의 주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금 이 나귀를 가지고 뭐 하려고 하는데?"라고 뭍는다면 이제 네가 말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그들이 그 나귀를 너에게 쓰게 할 것이다." 이거와 비슷한 사건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먹기 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때,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그 장소를 찾아봐라. 그리고 이 장소로 가서 다락방을 찾아라. 그리고 그 주인이 묻거든 주께서 이 장소를 필요로 한다라고 말하라고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유월절 만찬이 준비돼 있는 장소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 다락방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우리는 하늘에서 그것을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 나이의 새끼 주인이 누구였는지, 그 다락방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성경에 그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지만 바로 그분들이 주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아주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그분에게 제공해 드렸습니다.
사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들은 참 영광을 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아주 중요한 것들을 제공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것은 얼마나 기쁜 것입니까? 많은 성도님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 없이는 이런 수양회를 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 없이는 이와 같은 음식이 준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섬김이 없다면 이런 장소가 제공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에선 그 설교자만 보겠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들 뒤에 가려져 있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분들 없이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집회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로 그런 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서 일하는 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죠. 하지만 그 나귀의 주인처럼 그렇게 일하는 것입니다. 그 다락방 주인처럼 그렇게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신다면, 하지만 주님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하나하나 작은 것까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상급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께서는 그 하늘에 설교사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 중요한 일들을 또한 조용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마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마을 안으로 갔을 때에, 그 나귀들이 매어 있는 것을 그들은 즉시 발견합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이 나귀에 대해서 좀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막 11:2).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 나귀 새끼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입니다. 이것은 나귀 새끼라고 되어 있고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귀 새끼는 매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자들이 가서 4절에서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풉니다. 첫 번째로 그 나귀 새끼는 묶여 있었고, 그리고 두 번째로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이고, 4절에서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 앞 거리라는 것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이 갈림길이 연결되어 있는 그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실질적인 교훈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이 나귀 새끼가 주님께 사용됩니다. 그것은 주님을 모셔드리는데 사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에 바로 주님을 예루살렘 안으로 모셔드리는 일을 하게 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나귀 새끼의 또한 어떤 면을 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묶여 있었고, 어느 누구도 타지 못했고, 그리고 문 앞 거리에 매어 있습니다. 저는 이 나귀를 우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며칠 지난 다음에 우리에게 나귀라고 말한다는 건가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 우리에게 실질적인 교훈을 줍니다. 참 실질적으로 또 교훈적인 의미에서 바로 이 나귀는 저와 같습니다. 제가 주님께 사용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기는 주님을 모셔드렸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그 나귀를 알아차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위에 주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영광은 주님께만 있고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 나귀 새끼처럼 사용돼야 됩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귀는 어떠한 짐승이었습니까? 사실 여기에 그냥 다른 아무런 나귀와 다를 것이 없는 그런 나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머릿속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 특정한 나귀를, 그분이 사용할 나귀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가 정확히 어느 장소에 있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문 앞 거리에 매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특정한 집에 매여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문 앞 거리에 매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거 외에 다른 나귀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특정한 나귀를 관심을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짐승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를 한 개인, 개인을 보십니다. 제가 오전 시간에 이 구원이 개인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그분을 위한 섬기는 것도 이와 같이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각을 아시고 우리의 힘과 능력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은사와 그 가능성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른 사람이 모르는 어두운 비밀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우리 자신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나귀나 데려와라, 그것을 쓰겠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 나귀를 지정하셨습니다. 오늘날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여기 모인 성도님들을 다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주님께서 쓰고자 하시는 그 특별한 나귀입니까? 여러분께서 어떠한 은사를 가졌든지 간에, 여러분께서 어떠한 섬김에 참여해서 하고 계시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각자가 그 특별한 나귀 한 마리인 것입니다. 참 우리 각각이, 하나님께 각각 다른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여러분을 보시고 또한 저를 보십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그분에게 특별하게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까?
여기에 젊은 성도님들이 특별히 젊은 나이에 그것을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이제 이 젊은 성도님들께서 일하는 그 그룹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들은 첫 직장에서 월급을 받을 날이 있습니다. 참 그 첫 월급을 받는 날이 영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제 바로 그것이 두 길 가운데 묶여 있는 나귀와 같은 상황입니다. 저는 제가 첫 월급을 받은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 아주 특별한 그 감정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전에는 항상 용돈을 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제 은행 계좌에 돈이 딱 찍히던 날, 여기 입금이 되었구나! 그때 느낀 감정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저는 이제 재정적으로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을 내가 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거 살 수 있고, 이제 아버지 어머니에게 이거 좀 사도 돼요? 라고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자라나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젊은 성도님들에게 바로 그 순간이 위험한 순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이 일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아주 잘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 대학교도 가고 아주 잘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인생을, 그렇게 여러분이 성장하면서 이 중요한 순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됩니까? 이 나귀는 아직 어느 누구도 타보지 않은 그런 나귀입니다. 어느 주인도 이제 공식적으로 이 나귀를 이렇게 쓰겠다,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제 그의 첫 주인이 거기에 앉지 않은 그러한 나귀입이다. 이제 누구든지 그 위에 앉는 사람이 그 나귀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두 길의 갈림길에 묶여져 있는 나귀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택할지, 이제 여러분이 세상을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시간을 성경을 읽는 데 사용할 것인지, 여러분의 시간을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들에 추구하는 데 사용할 것인지, 여러분의 에너지를 모임을 위해 사용할지, 아니면 세상의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는데 그 시간을 사용할 것인지, 바로 이 두 길의 갈림길에 서 있는 묶여 있는 나귀와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젊은 성도 여러분, 현명하게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위한 나귀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나의 첫 주인이 되길 바랍니다. 참으로 주님의 그 짐과 그분의 멍에를 같이 매길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짐승 중에 어떤 짐도 매지 않은 짐승이 또 있습니다. 어떤 짐도 메지 않은 그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짐승은 붉은 암송아지입니다. 그것은 민수기 19장에 나옵니다. 그 짐승은 흠 없고 점 없는 짐승이어야 되고 또한 기록되기를 어떠한 짐도 메이지 않은 암송아지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그 붉은 암송아지에 대해서 어떤 짐도 아직 매어 있지 않은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말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우리는 신경을 많이 씁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는 신경을 쓰죠. 그리고 때때로 우리 주위의 환경들이 또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때때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고, 마치 그 주식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합니다. 이제 좋을 때는 아주 올라갑니다. 이제 안 좋을 때는 아주 밑으로 내려갑니다. 많은 친구들이 좋아할 때는 나도 좋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어려울 때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려갑니다. 사람들이 바쁘고 집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업이 잘 진행되면 또한 집회 나옵니다. 또 그 반대인 경우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나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에 너무나 많은 짐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짐을 등에 메고 가는 짐승과 같습니다.
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독특하신 분이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미워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죽이기까지 시도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거절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의 감정은 아주 요동을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여러 가지 시험과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분에게 가한 그 미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분을 죽이고자 했던 그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참 그러한 순간에도 우리 주님의 그 사역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적으로 또한 감정적으로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분께서는 "그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굳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데 어떤 것도 그분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어떠한 짐도 매이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의 죄에 그 짐을 안 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분을 향한 사람들의 미움과 거절에도, 그 주위 환경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 어떠한 짐도 매이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느 사람도 그 위에 앉은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의 나귀 새끼입니까?
"아유, 기드온 형제님, 저는 제 사장님의 나귀 새끼인 것 같은데요. 그가 더 일하라고 말하면 일 더 해야 돼요. 집회에 가지 말고 일해라고 하면 저는 어쩔 수 없어요. 그분이 제 월급을 다 결정하는데요. 그리고 그 사장님이 저에게 손님들 만나가지고 또 술 마시면서 접대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 해야 돼요. 저도 제가 주님의 나귀 새끼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사장님의 나귀 새끼인 걸요."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의 어떤 그런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나귀는 주님께만 특별히 그분께서 사용하시도록 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나귀는 매어 있었습니다. 그분께만 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매어놓지 않으면 그냥 아무 데나 다 다니겠죠. 제가 짐승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나귀는 다루기가 어려운, 말을 안 듣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나귀처럼 완고한'이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이 나귀는 매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갔다 저기 갔다가 이렇게 하지 않도록 메워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든지 막 갑니다. 어디든지 있지만 또 어느 한 곳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어디든지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지금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모든 성경 학도들은 이 한 가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훈련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훈련, 또는 징계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자고 싶을 때 잡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그냥 쓸모없는 것을 하는 데 낭비해버립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그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매어 있는 나귀 새끼,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랬을 때 이제 주님께 헌신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이제 그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이 나귀는 두 갈림길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이 그것을 풀어서 한쪽 길로 데려갑니다. 그것은 주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께서 그분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 그분을 위해서 헌신되는 것으로 선택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에게 훈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귀가 주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나귀 위에 앉으십니다.이 짐승으로부터 어떤 저항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나귀는 주님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갑니다.
그리고 그 성에 도착했을 때에 마태와 또한 요한을 기록하기를, 그분이 그 예언을 성취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스가랴서 9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슥 9:9-12).
여러분이 읽으신 바와 같이 마태와 또 요한복음 22장에서는 스가랴서 9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참 이 스가랴서 9장 9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온전하게 그때 당시 시점에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복음 기자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가랴서를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책의 그 구조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스가랴서 1장부터 6장까지는 놀라운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부분, 7장부터 특별히 이 9장에 이르러서는 스가랴는 그 이스라엘의 장래의 소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가랴서의 마지막 장에 있어서, 그 각 장에서 우리 주님의 초림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스가랴서의 후반부에 이 몇 개의 장마다 우리 주님의 초림에 대해서 구절들마다 구절들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스가랴서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또한 말하고 있지만, 그때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가랴서 장 9절부터 12절을 읽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선지자가 우리 주님의 초림에 대해서 예언한 그 예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계십니다. 우리가 스가랴서 11장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이 11장에 대해서 이것은 역시 장래 일, 그 종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 이 11장에 그 '불법의 사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초림할 때의 이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2절과 13절이 그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2-13).
그래서 스가랴서 11장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 두 개의 구절은 아마도 여러분이 익숙한 구절일 텐데요. 이것은 주님의 초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룢 유다가 우리 주님을 은 30을 받고 배반한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12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12장, 우리가 읽은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장래에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 우리가 그 구절에서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이 부분에서 우리 우주의 죽으심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우리 주님의 초림의 장면이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을 보면, 이 13장의 대부분의 내용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그 속죄와 그 속죄의 제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게 될 때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여기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이것은 분명히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그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이 장에서 볼 수 있지만, 다시 한 번 이 부분에서 갈보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초림입니다. 그래서 9장부터 11장, 12장, 13장, 이 장들 중에 몇 개 부분에서 우리 주님의 초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미래에 있을 일 그 사이에, 우리가 알다시피 이미 2천년이 지금 흐른 그런 시간 간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구절 사이에 그 간격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목포에서도 말씀을 드렸는데요. 우리는 그 간격에 대해서 고전적인 예를 여기서 찾아보게 됩니다. 어떤 구절 사이에 2천 년이나 되는 간격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성령께서 2천년 전의 일을 언급하면서 기록하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바로 다음 구절에 2천년 후의 일을 언급하는 그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는 어떠한 의도로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스가랴라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것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장래에 이스라엘의 회복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된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장래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2천년 후가 그 이상이 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이 하나님의 예언의 그 기초가 바로 그리스도의 초림이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서 9장 9절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위에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귀였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을 타고 이 세상에 임하신다는 것은 계시록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타시고 주님께서는 전장으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나귀를 탈 때는 그것은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평화를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이 대신 싸워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그 주님이 로마 제국들을 몰아내길 바랐습니다. 그들은 이 스가랴서 9장 9절이 말하고 있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님이 나귀를 타고 계십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전쟁에서 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구원을 베풀며 이것을 위해 오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9장 9절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라고 기록한 이유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마태와 요한이 이것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마태와 요한 모두 이 구절 전체를 다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그 마태와 요한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스가랴서 9장의 문맥에서는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인 구원에 그것을 관심을 두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와 요한은 이 의미를 알고 오직 이 구절에 이 부분만 인용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이 구원을 위해서 들어오신 이 부분만을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용문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나귀 새끼가 특별히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 특별한 표현으로 언급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제 히브리 단어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아인 벤 아톤'이라는 히브리 언어입니다. 여러분께서 이런 히브리 말을 들었는데요. 아톤 여기에 '아인 벤 아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 '벤'이라는 단어를 아마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아들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이제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람이 있죠. 이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여기 조백인 형제님이 깜짝 놀라 일어났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죠. 이 사람의 이름은 '오사마 벤 라딘'입니다. '라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이제 이 짐승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아인 벤 아톤'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나귀의 새끼'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여러분께서 이제 고고학적인 그 문서를 보게 될 때에, 그런데 이 '아인 벤 아톤'이라는 이 특별한 나귀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나귀입니다. 이것은 어떤 언약과 관련된 나귀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을 위해서 사용되는 나귀입니까?
제가 이제 찬 형제님과 어떤 계약을 맺었습니다. "찬형제님 말레이시아 온다면 제가 아주 좋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제가 형제님 말씀하신 거 지킬지 어떻게 알죠?" "그러면 우리가 계약서를 씁시다. 그것을 이제 아주 언약으로 분명히 맺읍시다." 이제 고대 시대에는 이 '아인 벤 아톤'이라는 나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인 벤 아톤'이라는 짐승을 데려다, "찬 형제님 이걸 가지고 이제 계약을 하는 겁니다. 내가 아인 벤 아톤을 죽이고" 그 언약에 사용되는 나귀라는 것입니다. 그 피를 취해서 그 계약서에 이 피로 이제 서명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인증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찬 형제님이 말레이시아에 온다면 제가 커피를 사겠습니다." 형제님이 말레이시아 온다면 제가 사고, 제가 한국에 간다면 형제님이 사고, 이 계약이 완성됩니다. 언약의 나귀를 이용해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나귀에 주님께서 올라타신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나귀었습니다. 아인 벤 아톤이라는 나귀였습니다.
주님께서 아인 벤 아톤이라는 나귀에 타신 그 특별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그 나귀의 위에 올라타신 것은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귀는 전통적으로 이 언약을 인증하는 데 사용되는, 그 계약하는 데 사용되는 나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죽으시고 그 피를 흘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가랴서 9장입니다. 그래서 9장 9절에서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아인 벤 아톤을 볼 뿐만 아니라 11절에 어떻게 돼 있습니까?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 9:11).
여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장래에 그 이스라엘의 구원도 총과 미사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갇혔던 자들이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인해서 그렇게 풀려납니까? 바로 내 언약의 피를 인하여 풀려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 언약의 피는 어디서 취하는 것입니까? 두 구절 앞에 우리는 그 아인 벤 아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그 계약을 맺는 데 사용되는 나귀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바로 그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이제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언약을 맺게 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 호산나라는 것은 시편 118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 '호산나'라는 것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구원을 그들이 원하고 있었습니다. 21장 9절에서, 그 시편 118편을 인용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 시편 118편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이 118편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그 구원을 소망하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입성하시는 것을 보며 그 118편을 인용하여 그들이 이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태복음 21장 전체를 읽을 때에 주님께서 이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집주인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종들을 보내서 그 실과를 받으려고 보냅니다. 주인이 고용한 종들을 농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잡아죽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들을 더 보냅니다. 이것은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또한 그 종들을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은 아들을 보냅니다. "이제 이 아들은 존중하리라." 하지만 농부들이 그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이제 우리가 좋은 기회를 잡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다. 이 상속자를 죽이고 그의 모든 유산을 가로채자." 그리고 그를 죽입니다. 그 잡아죽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그 포도원의 주인에게까지 가게 됩니다. 이제 매우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군대를 보내 그들을 모두 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주님께서 다시 한 번 시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인용하였습니다. 그것은 118편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118편의 중간 부분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이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이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그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청지기로서 맡아 가꾸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을 교정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뭘로 유명합니까? 그들은 선지자를 죽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부분에서 그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아 너에게 보낸 선지자들을 다 돌로 쳐 죽였도다." 그들은 종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어떻게 하십니까? 이제 다시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분께서 바로 앞두고 있는 그 죽음을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종들이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그분을 오늘 마지막일 거라고 종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43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비유를 계속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악인들을 주인이 와서 다 진멸할 것입니다. 이제 그 포도원을 뺏어서 열매 맺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맡길 것입니다. 이제 그 포도원을 맡아서 지킬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참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몸인 교회.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밭, 그 포도원을 지키는 청지기가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포도원을 지키는 이 새로운 이 가정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머릿돌이라는 것은 빌딩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먼저 기초가 되는 돌을 놓은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그와 같은 머릿돌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종들을 죽이고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그 지키는 것을 교회에 맡기십니다. 거절한 그 머릿돌이 이제 다른 나라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돌을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것입니다. "아, 기드온 형제님 어디서 그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죠? 당신의 그냥 그런 교리 아닙니까?" 라고 에베소서 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절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장 이 부분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교회에 모퉁이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때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습니다. 그들은 이 118편의 마지막을 인용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메시아의 그 자기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아직 그 시점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그 나라가 주님을 못 박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거절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 시편 118편을 인용하시지만 그 118편의 중간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건축자들의 버린 돌, 그것은 이스라엘의 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로 그 돌이 이제 교회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오실 때에 그때 우리는 그분을 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나귀 새끼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 왕이 이 나귀 새끼 위에 타시는 것을 바랄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은 아마 여러분에게 놀랄 만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왕은 아닙니다. 그분은 나의 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주님의 왕권은 이스라엘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왕이 아니라면 그분은 뭐지? 우리가 서신서를 보게 될 때에 바울은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나의 관계는 주님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언급하 아주 드물게 '나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몇 가지 예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의 신약의 전체에 걸쳐서 우리 주님은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주님이시고, 또한 그분이 왕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의 주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오늘 밤 이와 같은 나귀를 발견하였습니다. 매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앉지 않은 나귀입니다. 그리고 두 길이 갈라지는 그 길 가운데에 매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그 삶의 갈림길에 직면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서 더 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위해서 더 나아갈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그 순간에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더 헌신된 종이 되는 그 길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이제 6시 반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함께 방문한 모임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께서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수천 킬로가 떨어져 있는 그 두 곳의 성도님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교제입니까? 참으로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