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 십자가의 도 / 전경렬bro
복음 : 십자가의 도 / 24년 12월 8일 일요일(요약) / 전경렬 형제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18-25, 개역한글)
18절에서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과 구원을 받는 사람의 기준이 됨을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해주신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멸망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멸망은 첫째로 우리에게 사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죽음이 온 결과가 죄 때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개역한글)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계시록 20장에서는 죽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짐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음을 말씀하고 그 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죽고, 그 결과로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은 영원한 불못에 던져짐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멸망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시험을 잘못보면 망했다고 말합니다. 또는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 사업이 망했다고도 얘기하고는 합니다. 또는 결혼문제, 건강의 문제를 겼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망치고, 사업을 망할수도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잘 볼수도 있고, 그것이 망했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잠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고 유력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일지라도 구원받아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또 4장에는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부정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시고 구원받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5장에는 38년동안 누워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시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고,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19, 개역한글)
이 말씀은 이사야 29장 1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사29:14, 개역한글)
이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게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임을 말씀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고 잘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그러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위해서 자기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도 이해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신 죄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어떤 분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할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죄인을 위해서 임시적으로 짐승이 대신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그림자적으로 보여주는 제사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양이 어떻게 대신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죄인의 생명을 넉넉히 감당하실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이해할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2, 개역한글)
사람들은 뭔가 기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이 강해서 기적적인 능력과 표적을 구했습니다. 또 이방인들은 지혜가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능력이나 지혜는 얼마나 한계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 능력과 지혜가 되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분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나오는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서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스스로 해결할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 사역을 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구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방법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래서 홍수가 시작되기 직전에 방주에 들어간 사람을 여덟명 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을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서 올렸을때, 그것을 보는 자마다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단순한 치료방법입니까?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이지만, 놋뱀을 쳐다볼 때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방법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음을 말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1-6, 개역한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에게 주셔서 쓰게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떠한 고난을 받으실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53:1, 개역한글)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 말씀을 멸시하고 배척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사람들이 멸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2, 개역한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가를 말씀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징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해할수 없는 징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리스도께서 나심을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무시합니다.
주님은 나사렛에서 나셨지만 유대인들은 나사렛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나겠느냐"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학문을 배우지 못했고,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외모를 보고 주님을 거절하는 분명한 이유로 삼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3, 개역한글)
이것은 주님의 공생애 기간의 말씀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않고 배척하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게 거절 당하신 창조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식에게 버림을 받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만드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피조물들을 보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죄인인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4-6, 개역한글)
잘 아시는 것처럼 십자가는 가장 악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에게는 죄가 없으시고 죄를 범치 않으신 분입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주님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무도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셨겠습니까? 왜 십자가에서 그 사랑하는 아들을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내 죄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담당하시고 그분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같이 놀라운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십니다. 이 십자가의 어떻게 대우하는가, 여전히 미련한 것으로 여기나요? 여전히 내 죄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나요?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내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고 발견하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발견할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발견할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이 저를 구원해주시지 않으면 제가 구원받을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성령께서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45:22, 개역한글)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 "모든 백성"에 해당하지 않는 분은 없습니다. "나를 앙망하라" 십자가에 못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라"
이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분이 계시면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