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요나 1장 : 요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순종함

박이레 2024. 12. 5. 12:12

< 요나 1장 : 요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순종함 > 기드온 쿠 형제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시 한 번 여러분께서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 자리에 함께 교제하기 위해 모여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제 1시에 시작되는 이 집회를 이제 무덤의 집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두가 여기 와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한국의 성도님들께서 이 말씀에 아주 열심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오신 것을 봅니다. 참으로 이곳 성도님들에게 저의 감사와 칭찬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것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열심은 참으로 본이 될 만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선한 일을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아주 좋은 말을 먼저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은 졸아서는 안 되는 그런 부담을 느끼실 것입니다.
요나서 1장입니다. 요나서 1장 전체를 여기 앞에 형제님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욘 1:1-17).

예, 말씀을 읽어주신 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부탁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본문 말씀을 이제 어떤 속도로, 이제 어떻게 전개하게 될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요나서 2장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다시 한 번 요나서 2장 말씀을 읽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앞으로 진행해 나가겠습니다.

이 요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요나서가 모든 사람이 다 자세히 읽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한국 성도님들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요나의 이야기를 주일학교 어린이 성경책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 제가 이제 일반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국 성도님들은 안 그러시겠지만 이 요나서를 정말 꼼꼼하게 읽어보신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이 요나서는 히브리 학자들이 그냥 거기서 논쟁을 벌이는 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원어가 아주 다양한 단어와 표현을 사용해서 기록된 그런 풍부한 언어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우리도 또한 이제 몇 군데 이러한 사용된 그 다채로운 그 언어적인 표현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 요나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열왕기하 14장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는 여러보암에게 하나님께서 사용해서 보내신 그 선지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여로보암, 첫 번째 왕이 아니라 그 여로보암 2세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 선지자로 사용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때 열왕기하 14장에 기록된 사건이 이 요나서의 사건의 앞에 있었던 일인지 뒤에 있었던 일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 열왕기하 14장에 나와 있는 사건은 이 요나의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어떤 대답도 없이 끝나버리는 그런 결론을 요나서 마지막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서의 마지막은 이제 하나님의 질문으로 그 물음표로 끝났는데 이제 어떤 맺음 없이 끝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후에 열왕기하 14장 사건이 일어났음을 확인하게 될 때, 그는 다시 회복돼서 선지자로 활동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요나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친히 언급하신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시간에 주님께서 그 요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자 했던 선지자였지만, 그가 그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그 경험은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이제 한 이적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요나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는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요나는 우리 주님께서 주님의 자신의 경험을 말씀하실 때 사용한 인물로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서 2장에서 이것과 관련돼서 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이제 1장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요나의 배경이 어떤지 자세히 듣지는 못합니다. 그가 어느 고향 사람인지 열왕기하 14장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아밋대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 외에 다른 그의 배경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어떠한 다른 설명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갑자기 이 사건으로 데려와서 나타내 보이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 성경에 그와 같이 등장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인 계층의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제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우리가 순종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간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시험은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에게 전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저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임무에 대해서 시험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순종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어떤 사자를 만나거나 어떤 굴에 던져지는 경험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해야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일 가운데서 이제 믿음으로 어떻게 그것을 통과해 나갈 것인지 그런 결단을 하고 있지만, 하지만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는 시험은 굉장히 명확하고 우리가 순종만 한다면 바로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그런 시험들이 대부분입니다. 열왕기상 13장에서 주어진 그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그 시험은 단순하게 여러보암에게 가서 그 말을 전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에게 주어진 것도 그의 그 모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은 그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것인가입니다. 저는 저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언제 분명하게 시험하실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도 언제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분명하게 시험을 하실 때입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마치 사진으로 찍는 것 같은 그 순간이 여러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통과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 시험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저의 삶에서 깨어 있어야 됩니다. 물론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오랜 그런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저는 그때 어떤 것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까? 저의 하나님을 섬기는 그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그 시험의 순간은 언제가 될 것인가?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여기 요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험 가운데 우리가 통과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요나서를 읽을 때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오후에 이 말씀 집회 시간은 굉장히 여러분에게 실질적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요나의 뜻은 '비둘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어떤 한 새의 일종입니다. 사실 그에게 이제 적당한 이름입니다. 새는 도망가기 마련이죠. 그것이 바로 그 요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요나서 1장 1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였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시는 그 지시 사항은 항상 대부분의 경우에 아주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제 여러보암에게 가서 그에게 외치고 이제 다른 길로 돌아오라 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되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였습니다. 이것은 그냥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그러한 명령입니다. 어느 한 문장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지만 항상 단순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지만 슬픈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단순하게 만드신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제 엉터리로 실수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 이제 이 요나가 한 방향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기서 이제 하나님은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장을 읽어갈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요나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그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간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기록되기를 "욥바로 내려갔더니"입니다. 단지 그가 욥바로 내려갔을 뿐만 아니라 5절 중간부에 보면은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라고 돼 있습니다. 그가 그 배 밑층에 내려가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싫어요."라고 말하고 다시스로 내려가고, 그리고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자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는 이제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장 6절에서 말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6절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욘 2:6).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것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이제 다시스로 내려갔고, 그리고 이제 배 2층으로 자러 내려갔고, 그는 던져져서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바다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요나처럼 행동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반대 방향으로 돌이키고, 그리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더 내려갑니다. 그리고 밑에까지 내려갑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내려가는, 내려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를 아주 밑에까지 내려가도록 허락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그 다루심의 형벌 가운데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때에, 우리가 일어나기보다는 아래로 내려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려가고, 내려가고, 아주 바닥까지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결국에는 그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그는 이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고 다시 한 번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가 바닥 깊은 곳까지 이제 가라앉았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큰 물고기를 통해서 건져올리십니다. 그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가 이제 딱 그 장소로 데려다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하고자 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참으로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한 더 큰 책임을 담당하고자 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부르고 계시는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특별히 이제 젊은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책임을 담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에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님들한테 "이걸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도와준다면 다음에 나보고 더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작도 안 하는 게 낫겠어, 그러니까 내가 너무 많은, 너무 무거운 짐을 지는 거 아니야? "그냥 주일학교 좀 할게요."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 시작도 안 하는 게 낫겠어. 내가 그걸 한다면, 주일 학교 한다고 하면 나중에는 또 복음 전하러 갈 거 아니야, 그럼 말씀 준비도 한번 해봐라고 하면 어떡하지? 기드온 형제님 한번 봐봐. 하루에 세 번이나 말씀 지금 전하고 있잖아, 아유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돼. 그렇게 돼서 어떻게 살겠어? 내일은 또 세 번이나 더 해야 될 거아냐. 12일 동안 계속해서 집회를 한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하면 어떻게? 그냥 다시스로 가야지, 아유 그냥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게 낫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젊은 성도님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일어나서 기도드리는 것이 참 잘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일어나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이제 곧 그 형제님의 이름이 이제 복음 집회 강사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여기에 있는 성도님들께, 특별히 또 젊은 형제 자매님들께,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책임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 읽기 시간에 디모데후서 1장에서 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위한 은사를 받은 특권을 누리지 않습니다. 그 공적인 사역을 위한 은사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형제님이건, 자매님이건,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특별한 그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길 바랍니다.

참으로 요나에게 그와 같은 하나님을 위한 그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요나가 굉장히 대단한 복음 전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서 그를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꽤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약간 꼬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많이 분석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에 대해서 완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것에 대해서 잠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목요일에 이것을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요나에 보면 여기 나와 있는 모든 사람들, 또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요나만 빼고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이제 배 표를 샀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만납니다. 그는 특별히 여기에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몇번에 걸쳐 "여호와의 낯"이 나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3절에, 그리고 또 3절 후반부에도 "여호와의 낮을 피하여" 10절에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는 사실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배를 돈을 주고 샀지만, 그리고 그래서 이제 그 배에 올라탔고, 그리고 그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제 나는 휴가만 즐기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이제 점점 가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여기에 개입하십니다. 이제 4절에 하나님께서 대풍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그 결과,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적합니다. 이 요나서에는 또한 이제 '크다'라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크다'라는 표현이, 여기에 태풍, 그리고 폭풍이 '대작'하여, 그리고 또한 이 니느웨가 '큰 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그 무리가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17절에,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그리고 3장에서 또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리고 4장에 가서 또 보게 될 때에, 그리고 요나가 아주 '크게' 싫어하였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주 크게 싫어하였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4장, '심히' 기뻐하였더니, 그래서 이 요나서에는 많은 것들이 이제 '크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 요나서는 우리 옷 치수의 이제 가장 큰 사이즈, XXL 사이즈입니다. 모든 것이 다 큰 걸로 주세요,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크다는 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 니느웨는 큰 성이었고, 그 큰 성업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폭풍을 주관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 배의 선원들은 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봤을 때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크신 은혜 가운데서 이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 좋지 않은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자기의 '자아'입니다. 요나는 심히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것들을 모두 다 주관하실 수 있지만, 그분께서는 큰 바람과 큰 파도를 만드실 수 있지만, 그 이방인 선원들의 마음속에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실 수 있지만, 참으로 그것이 큰 성음이지만, 거기에도 큰 구원을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 어떤 것도 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과 대조적으로 이제 부정적으로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의 그 크게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저는 '큰 그의 자아'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의 모임 생활 가운데서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 우리의 큰 자아입니다. 우리의 교만함, 우리는 이 모임이 얼마나 자주 그 사람들의 그 자존심과 개성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큰 거라도 다 다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제가 이제 경건한 태도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하나님께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통제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그 큰 자유 의지, 우리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요나서에 나와 있는 그 다채로운 그 단어들을 보게 됩니다. 여기 "일어나라" 그는 하지만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큰 것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좀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요나는 배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람과 큰 파도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이제 이상하게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있습니다. 4절에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그 원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배가 지금 깨어질 것 같다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가 생각하기를, '나 지금 이렇게 깨질 것 같은데?' 이런 표현입니다. 이 배에 대해서 표현하기에 굉장히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때 요나의 시대는 배가 인공지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때 당시에 인공지능이 없죠. 그런데 이 배가 생각하기에 이것도 깨어질 것 같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큰 바람과 큰 파도 가운데서 배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는 생명이 없는 것이죠. 배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 요나서의 그 문체가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귀가 말할 수 없는 거죠. 나귀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갑자기 발람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나귀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한 적이 있느냐?" 그 나귀가 기억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동안 너한테 내가 이렇게 섬겼는데, 내가 앉아가지고 움직이지 않은 적이 있었냐? 왜 나를 때리는데?" 그 나귀가 불만을 토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배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은 볼 수 없었지만 나귀는 볼 수 있었습니다. 발람은 영적인 그 논리를 잃어버렸지만 나귀는 그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요나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요나는 전혀 생각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주시고 지적인 능력을 주신 사람은, 이 하나님이 행하시고 있는 일에 지금 반응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이 생명이 없는 배도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바로 그 요나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배는 자기가 지금 깨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사공들도, 그런 이방인들도 그 위험을 알아차립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고 각각 자기의 신을 부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그래서 이제 배 속에 있는 것을, 배에 있는 것을 다 내다버립니다. 그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에 어떤 장난감들이 있었겠죠? 그것을 바닥에 내 던져버립니다. 여기 김치 한 박스가 있어도, "아 이제 안 먹어!" 하면서 버려버립니다. 그 인생에서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것들 다 내다 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다 버려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아는 다른 이방신들을 다 각각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배가 자기가 지금 깨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 사공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데 요나는 뭘 하고 있습니까 드르렁~ 뱃속에서 자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 대조점을 보게 됩니다. 제가 특별히 이것을 이제 연극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이 기록된 표현 자체가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하나님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동일한 표현이 사공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이것은 이제 던져넣는, 내리치는,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요나는 그런 가운데 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동일한 반응으로 이제 사공들도 물건을 바다에 내다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내다버립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을 내던지셨고, 사공도 물건들을 내던집니다. 요나는 뭘 합니까요? 자고 있습니다. 그 혼자 그 배 밑에 있는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가 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어느 구석에 가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고자 했고, 그 배에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 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배가 바다 가운데서 아주 요동을 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려고 하고 있는 가운데 요나는 자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그 불쌍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더욱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의 삶 가운데 이 폭풍을 보내셨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폭풍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도 분별해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다루시는 손길을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그냥 방황하고 있는 그 상태 가운데서 둔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장 신자의 삶에 있어서 비극적인 순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고 있는데도 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신다는 것을 모를 때조차 있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해 봐야 되는 것은 첫 번째로 그가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그러한 다루심에 반응을 할 줄 아는, 적게나마 그러한 감각이 남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이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난 20년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이제 여러 신자들이 세상으로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그 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더욱 그들에게 유혹적인 것을, 그들은 그 육체의 정욕을 따라 세상 가운데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 가운데서 그들은 이제 방황합니다. 그 도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신다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각 한 사람씩 다 물어본다면, 만약에 그 사람들을 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었다면 이 모임은 정말 너무 굉장히 많은 수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내려가고, 내려가고, 그냥 잠자고만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 하나님의 폭풍이 나에게 전혀 어떤 감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때가 있습니까?
이제 누가 이제 요나를 깨우게 됩니까? 여기 선장입니다. 선장이 그에게 나아가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여기서 자고 있는 너는 이제 무슨 일이냐? 일어나라.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초반부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말씀이 이 선장에게서 나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지만, 다음 이제 하나님께서 그 이방인의 입술을 사용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에도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나귀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발람을 통해서, 그 악한 자를 통해서 발락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좋은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성경께서 성령이 기록하기를 이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아이들은 아주 놀라운 것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말할 때 우리가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말할 때에 어떨 때는 성경적인 진리를 말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젖먹의 입으로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원리가 여기에 또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지 않는 이방인 선장의 입술을 사용해서 다시 한 번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이 문제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합니다. 그들은 이것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결론을 내기는 "이것은 분명히 어떤 우리 중에 어떤 사람 때문일 거야!" 그들은 제비를 던집니다. 그래서 7절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알아보자." 그래서 이 자고 있는 요나가 그 침대에서 나와서, 그리고 이제 모두 원을 그리고 서서, 이제 더 이상 그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제 제비를 뽑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만의 또 미신이 있겠죠. 그런데 여기서 배가 생각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런데 그 제비가 또 다리가 달려서, 여러분이 이제 주사위를 던질 때에,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계속 6 나오고, 또 나오고, 또 6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어? 너 이거 뭐 속임수 쓰는 거지?" 우리는 그런 주사기를 우리가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이제 주사위를 던졌는데, 어떤 사람이 이제 디지털 컨트롤을 가지고 그 주사위를 조작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게 이때에 있었다면 굉장히 놀라운 것이죠. 그 배가 인공지능으로 달리고, 그리고 주사위에는 원격 조정기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때는 그런 게 전혀 없는 때입니다. 만약에 그 주사 위에 다리가 달려서 그가 움직였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비를 던졌고, 제가 이것을 조금 더 연극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 요나가 여기 서 있고, 기드온이 여기 서 있습니다. 그리고 찬 형제님이 여기 있습니다. 한 형제님이 또 여기 있습니다. 여기 다른 사람들이 둘러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비를 던집니다. 요나가 여기 서 있는데요. 주사위가 여기서 막 움직이고 조금씩 이쪽으로 갑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그 요나 앞에 딱 멈추는 것입니다. 여기 요나가 문제다. 얼마나 주사위를 여러 번 던지든 간에, 그 주사기가 계속 요난테로 가서 달라붙는 것입니다. 저는 이때 제비를 여러 번 던졌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비를 할 때마다 항상 요나가 뽑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어디 도망갈 구석이 없습니다. 그는 배 밑바닥에서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방인 선장을 통해서 그를 일으키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제비를 사용하셔서 그가 정확하게 뽑히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눈이 이제 요나를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이 그냥 마구 던져집니다. 그들은 그 질문을 너무나 빠르게 많이 하기 때문에 요나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냥 마구 질문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아내들이 하는 행동 중에 하나입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남편에게 질문만 던져낼 때가 있습니다. 제 아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요나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마구 질문을 해야 됩니다. 그들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이것을 막 밝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왜 이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를 그들은 의아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그래서 무리가 질문을 합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유로 우리에게 임했는가 고하라. 너의 직업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고,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이 5개의 질문을 계속 연달아서 해버립니다. 이것은 그들이 공포에 질려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제 요나가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이중에 어떤 분들은 이제 목포에서 오신 분이 계시죠? 우리는 거기서 여호와의 절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처음 구절에 거기에 이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특별한 이제 강조 팬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부분이 중요하다라고 특별히 강조해서 알려주시기를 원할 때에, 그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색연필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유명한 팬들, 그런 것을 형광펜을 사용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시기를 원할 때는 특별히 '키아스틱'이라는 그런 구조를 사용해서 우리에게 강조해 주십니다. 이것은 이런 방식입니다. 어떤 단어를 이제 1, 2, 3, 4라고 배열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강조되는 구절이 그다음에 나오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에 1, 2, 3, 4로 배열했던 단어를 역순으로 4, 3, 2, 1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드린 구절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구절이 어떤 특정한 단어로 1, 2, 3, 4, 또는 4, 3, 2, 1, 이걸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구절이 바로 강조하시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것이 이 요나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 구절이 이 전체 장의 가운데 구절입니다. 우리가 1장 2절에 큰 성읍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17절에 큰 물고기를 봅니다. 그리고 1장 5절에 사공이 두려워하고 신들을 부르고, 16절에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고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그리고 5절에 그들이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15절에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집니다. 그래서 이 구조가 이 계층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고, 이제 마지막 구절부터는 또 역순으로 이렇게 계단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1, 2, 3, 4, 그래서 1, 2, 3, 4, 4, 3, 2, 1, 그리고 그 가운데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 1장의 가운데 구절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9절입니다.
이제 요나가 마침내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나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그분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다." 이것이 바로 이 요나가 말한 부분입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 이제 그가 누군지를 밝히는 부분입니다. 이건 요나가 자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통역하는 형제님이 제가 부탁하기를, 이중 부정문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돌려서 말씀을 다시 해 주셨습니다. 때때로 이제 영어에서는 이제 이중부정을 사용해서 씁니다. 이제 강조해서 말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요나는 그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다를 지으시고 그걸 조절하시는 분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 알고 있는 게 그를 도와주었나요? 여전히 그냥 도망가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요나가 말한 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절실하게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선원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배도 두려워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가 마침내 "나도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이것은 굉장히 실제적이고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진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의 진리를 우리가 또한 경험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여러분보다 이것을 더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듣는 분보다 말하는 자가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은 한 가지 문제고, 하지만 그 성경의 진리를 실행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정말 이 진리를 옳게 말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고,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문제고, 또 저 자신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요나는 자기가 말한 것을 잘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경외한다. 그분은 하늘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바다와 땅을 지으신 분이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그의 눈으로 절실하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하늘의 하나님, 바다와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그게 무슨 의미라는 것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분은 폭풍을 조절하시고,  그리고 그 배를 주관하시고, 그 선원들을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 제비를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바로 이 요나의 마음을 주관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그 향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 그 하나님의 호흡에 우리가 반응을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진리에 순종하기를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제 사람들은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것은 굉장히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왜 이렇게 했느냐?" 이제 그런 이야기가 다 전해지고 이제 사람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를 피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그들에게 이걸 해결책으로 말해줍니다. 이제 그 선원들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무엇을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런데 이제 11절에 "바다가 점점 흉흉한지라"라는 표현이 있죠. 이제 11절에 두 번째 중간 부분을 보면, "바다가 점점 흉흉한지라" 돼 있습니다. 그리고 13절 후반부에도 "점점 더 흉용하므로" 여기에 이 단어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절에서 보게 될 때에 "일어나 가라." 그 '가라'는 것이 이제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니느웨로 걸어가라." 이것은 물론 이제 다리로 걸어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가라'라는 것을 말한 것이고, 그리고 이제 11절에 "바다가 점점 흉흉한지라"가 이제 영어 표현에서는 이제 '일하다', '걷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가라'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뭘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바다에게 말씀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바다가 간 것입니다. 흉흉한 것입니다. 이 바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다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그리고 바다가 간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가 흉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반대로 갔죠. 그것이 바로 그 바다가 간, 바다가 흉흉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물어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겠냐?" 요나는 우리가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그러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왜냐하면 이 폭풍은 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내가 바로 이 문제의 그 원인이었다. 그런데 여기 선원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계속 노래를 한번 적어봅니다. 그 요나를 희생양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든지 간에 그 바다가 잔잔해지지 않습니다. 그 배는 이제 아주 위험에 처합니다. 14절에, 그리고 이제 다른 것을 하게 됩니다. 그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이 선원들이 폭풍이 왔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선원들은 각각 자기의 신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대상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욘 1:14).

여기서 그들은 뭘 말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선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폭풍 가운데 그들은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 우상 신에게 처음에 부르짖었지만, 그들이 이 바다와 폭풍 가운데 그들은 이제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16절에 그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아주 이상하게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그 요나가 도망친 것은 안 좋은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분명히 안 좋은 일이죠. 그런데 우리의 삶의 그 어둠의 시기에도, 우리가 행한 그 모든 실수 가운데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서 선한 것을 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 요나가 도망가는 바람에, 이 다시스로 가는 도중에 만난 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욘 1:15).

제가 앞에 이제 '던지다'라는 단어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나가 도망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대풍을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15절에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던지셨고,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그들의 물건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에 요나를 던져야 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로 바다가 뛰노는 것이 그치게 됩니다. 이제 요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 그 가운데 그가 한 경험이 이제 2장의 노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계속 잠겨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17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이미 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그리고 그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요나가 3일 3야를 물고기 배에 있습니다. 여기 다시 한 번 이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가 4장에서 다시 한 번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4장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7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그리고 8절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벌레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동풍을 준비하십니다. 참으로 여기에 요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요나가 말한 것처럼 이 하나님께서는 바람과 그 육지를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큰 물고기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이 벌레와 같이 아주 작은 것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그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끝나고 이렇게 질문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드온 형제님 이게 정말 고래인가요? 그 고래가 삼킨 건가요?" 고래라고 해도 문제없습니다. 여기에는 큰 물고기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요나를 삼킬 만한 그 거대한 동물은 분명히 고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요나는 그 냄새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냄새나는 물고기 속에서 요나는 아주 아름다운 성경에 나오는 한 가지 노래를 기록합니다. 이것을 이제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가, 이 왕고한 요나가 계속 그 뜻에 굴복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 요나처럼 완고한 자녀들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 그 아이들을 아주 그냥 세게 10번 때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은 그냥 이 사람을 그냥 심판하고 그냥 던져버려야 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요나에게 하듯이 우리에게 너무나 긍휼하게 대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요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정말 우리가 한 대로만 한다면 이제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을 그런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긍휼하게 대하십니다. 그리고 요나에게도 자비롭게 대하셨습니다.
제가 이 집회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열왕기하에서 이 사건 이후에 요나가 기록된 부분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 생각하게 될 때에, 그리고 바로 이 사건 이후로 요나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그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다음 시간에 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1시에 시작되는 집회를 잘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아주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주 크고 큰, 청중들입니다. 제가 이제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3시에 이제 여러분이 또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