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느헤미야

느헤미야 7장 : 인도자들을 세우고 백성을 계수함

박이레 2024. 11. 28. 16:39

< 느헤미야 7장 : 인도자들을 세우고 백성을 계수함 > 한봉래 형제님

이 시간에는 제가 쭉 해온 대로 느헤미야 7장 살펴보겠습니다.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내가 저희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 옛적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바로스 자손이 이천 일백 칠십 이명이요 스바댜 자손이 삼백 칠십 이명이요"(느 7:1-9).

쭉 해서 읽겠습니다.

"기브온 사람이 구십 오명이요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일백 팔십 팔명이요"(느 7:25-26).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 칠십 삼명이요"(느 7:39).

"레위 사람들은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 사명이요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일백 사십 팔명이요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팔명이었느니라 느디님 사람들은..."(느 7:43-46).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느 7:57).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육백 사십 이명이요 제사장 중에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명이요"(느 7:61-66).

"말이 칠백 삼십 륙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느니라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방백은 금 일천 다릭과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 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 칠 벌을 드렸느니라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이 다 그 본성에 거하였느니라"(느 7:68-73).

아멘, 이제 느헤미야 7장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성이 다 건축됐고요. 성벽이 다 완성이 된 거죠. 그리고 이제 마지막 작업입니다. 문짝을 달았다. 여기까지가 이제 성의 완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입장에서 보면 이건 아주 감격스러운 장면일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 보면 느헤미야가 자기 친동생 하나니가 예루살렘에 갔다 왔는데 소식을 물어보니까, 성벽은 무너져 있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탄 자국이 있고, 라고 했을 때 느헤미야가 울기 시작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웁니다. 왜 울죠? 그게 그렇게 슬픈 일인가요?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보겠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냥 성벽이고 문인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두겠다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자체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걸린 곳입니다. 그곳이 이렇게 황폐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무시당하고, 멸시받고, 이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지금도 이제 저희들이 이제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나도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게 이게 가치 기준이죠. 지금 이 시대로 옮겨오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 어딥니까?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 지역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역교회 무시하죠. 조그마하고 별별 일도 없는 것 같아 무시하는 거죠. 그 교회에 내가 들어가야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거기 가봐야 아무것도 아닌데, 아닙니다.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가 우리들 눈앞에 확연히 보일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별 볼 일 없어도 그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세웠던 일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하나님이 훗날 반드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왜 울었을까?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역 모임에 대해서, 혹은 이런 거죠. 성도라고 하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 이 이름이 우리들의 말과 언행으로, 행동으로 무시당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는 거죠. 그런 감각을 표현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다한 후에 이제 성벽을 다시 완공 다시 재건했습니다. 이제 뭐가 필요할까요? 이제 필요한 게 뭘까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왜 무너졌는가? 왜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군대가 와서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성전을 훼파하고, 사람들을 끌고 가고, 이런 비극이 왜 벌어졌는가? 이제 이런 일이 다시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게 이제 느헤미야 관심이죠.

그래서 느헤미야가 어떻게 하냐면, 이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다시는 공격받지 않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성벽을 막 무진장 두껍게 하고 무진장 높이 만들어 가지고 어떤 적도 공격할 수 없는 크기로 만드는 것이 이 성을 지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성이 견고한 것은 돌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 거죠? 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느헤미야는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 예루살렘 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 이 사람들이 첫 번째로 이걸 인식해야 한다. 왜 예루살렘 성이 존재해야 되는지, 이게 왜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다시 지역 모임으로 오겠습니다. 지역 모임이 중요합니다. 이 지역 모임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떤 공격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교회로 존재하려면, 이와같은 진리들을 지켜야 되죠. 교회 진리를 지켜야 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 이 지역 모임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영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떤 공격도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 사람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을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1장부터 6장까지는 성 자체를 세우는 일을 합니다. 성을 세우는 일, 그다음에 이제 7장부터 나머지 13장까지는 성 안에 사는 사람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첫 번째, 이 예루살렘 성이 왜 존재해야 되는지, 왜 세상에 있어야 되는지, 그리고 세상에 그리고 하나님에게 어떤 책임을 하고 있어야 되는가, 이게 이제 있어야 되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삶의 가치관, 삶의 수준, 이게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느헤미야는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은 세 가지 종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첫 번째, 문지기여야 합니다. 두 번째, 노래하는 자여야 합니다. 세 번째, 레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영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우선 쉬운 것부터 한번 해보죠. 성 안에 사는 사람은, 예루살렘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첫 번째, 노래하는 자는 기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성에 살 자격이 있는 거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그 성에 살겠죠. 노래하는 자여야 합니다. 이게 찬양, 예배, 감사,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같은 데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하죠. "너희는 기뻐하라 다신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 편지를 어디서 썼다고요? 로마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앞두고 그가 씁니다. 아니 자기는 감옥에 갇혔지만 빌립보 성도들은 지금 자유롭게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합니다. 영적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기쁨,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누리면서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환경 때문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면 기뻐해야죠. 맨날 웃어라, 이런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이제 문지기인데요. 문지기는 문에 대해서 성경이 상징하고 있는 걸 말하면요. 문, 그러면 예를 들면 성경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이제 에서를 피해서 도망가다가 벧엘이라고 하는 곳에서 돌을 베개 삼아서 잡니다. 이제 노숙한 거죠. 돌을 베개로 했으니까 돌이 얼마나 딱딱합니까? 돌을 베개로 자다가 꿈을 꿉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죠. 그리고 이제 꿈을 깨고 나서 그가 이제 돌을 딱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고 이제 벧엘, 하나님의 집이죠.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몰랐는데 여기가 하늘의 문이로다." 이렇게 합니다. 문, 그래서 이제 문은 구약 성경에서의 상징은 이 문이 뭐냐 하면, 재판관들이나 그 성의 장로들이 앉아 있는 곳입니다. 롯이 소돔으로 들어갔잖아요. 그래갖고 소돔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롯이 출세한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외부인이 그 소돔에 들어가서 그 소돔의 인도자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문은 재판장이나 장로들이 앉는 장소입니다. 하나 더 문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신약으로 오면, 주님께서 이제 베드로가 그리스도요, 하나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럴 때 이 '권세'가 '문'입니다. 음부의 권세, 이거 영어로 보면 게이트라고 돼 있습니다. 음부의 힘이, 음부의 통치가, 음부의 공격이,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문은 어떤 것이냐면 통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문지기는 뭐냐?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 하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이 다시 무너지지 않으려면 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고난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야 이 성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뭐죠? 레위 사람, 레위 사람은 이제 이렇게 돼 있죠. 구약 성경에 보면 성막이 지어져 있고 그 성막에서 이제 그 일을 하는 것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만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레위 후손 중에서 아론 아닌 쪽은 전부 이제 레위 후손들이죠. 이 사람들은 제사장은 좀 뭐랄까 위엄이 있죠. 그런데 레위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성막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섬기는 사람들, 레위 하면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사장은 우리 주님이시죠.
그래서 이 예루살렘 성에는 이 사람들이 삽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사람, 어려움이 왔을 때 주님을 신뢰하며 찬양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섬기는 사람, 주장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기꺼이 섬기려고 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살면 이 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이제 느헤미야의 소원입니다.

그다음에 2절로 가겠습니다. 1절은 이제 그렇게 나와 있고요. 느헤미야가 이제 1장에서 이제 예루살렘 성이 그렇게 회파됐다는 소식을 듣고 웁니다. 그때 느헤미야의 신분이 뭐냐 하면 왕의 잔 맡은 관원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제 이렇게 슬픔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4개월을 기도하죠. 기도하면서 이제 왕 앞에 갑니다. 그리고 왕에게 이제 말합니다. 왕에게 허락을 받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제가 예루살렘에 가서 다시 성벽을 다시 건설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래라 하고 허락해 줍니다. 그래서 지금 총독으로 와 있는 거죠. 그때 어떤 약속을 하냐면 그러면 그거 하고 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냐? 이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이 4개월 동안 기도하는 동안 계획을 다 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은혜로 왕이 나를 그리 보내주면 내가 여기에다가 다시 성벽을 건설하는 데 대충 얼마 걸리겠다, 재료는 뭐가 있겠다, 싹 준비합니다. 그리고 왕 앞에 갑니다. 그리고 왕이 그럼 얼마나 걸리겠냐고 그러면 얼마 동안 있다가 오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요. 이제 형제님들이 이거 다 계산해 냅니다. 몇 년 걸렸을 것이다, 계산합니다. 그런데 이제 완공됐을 때가 왕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기간이 된 것입니다. 자기 계획대로, 자기 시간표대로 딱 완공됐을 때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2절은 느헤미야가 돌아가고 그다음 인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모임에서 항상 그렇게 하죠. 앞선 형제님들이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1세대, 2세대, 3세대, 저희들이 사사기에서 보는 거죠. 3세대가 이게 위험합니다. 3세대가 하나님 모르는 세대가 막 나와서, 사사기가 됐잖아요. 그래서 여기 손자, 손녀들 조심해야 합니다. 하여간 그래서 그다음 세대에서 세워야 합니다.
인도자를 두 명을 세웁니다. 하나는 하나니, 또 하나는 이름이 비슷한데요. 하나냐, 발음으로 치면 둘 다 비슷한데 그러니까 하나니를 세운 이유는 뭐냐? 하나니는 예루살렘에 직접 가고 그 소식을 전하고 그래서 관심 있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사람, 그 사람을 세웁니다. 누가 교회의 인도자가 되냐? 교회를 사랑한 사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 사람, 교회를 걱정한 사람,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을 세웁니다. 당연하죠. 어느 조직이나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 회사에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을 세우겠죠.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하나니는 어떻게 돼 있냐면 두 가지 특징이 나와 있습니다. "충성과 경외심" 이 두 가지를 보는 겁니다. 첫 번째 저희들이 맨날 하는 거죠. 충성된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죠. "너는 내게 들은 것을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 그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되죠. 디모데는 충성되고 가르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이제 두 가지, 여기서는 이제 충성과 경외심입니다. 충성은 보통 이렇게 말하죠. 다시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냐가 어떻게 돼 있냐면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돼 있습니다. 그가 영문의 관원인데 그다음에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거 다시 보겠습니다. 영문이 뭐냐 하면 저희들이 이제 성을 보면, 예루살렘 성이 있으면 이 예루살렘 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 앞에 성체를 하나 둡니다. 혹은 탑을 하나 세웁니다. 그래서 미리 적군이 오면, 이제 미리 보고 그다음에 방비케 하는 이걸 영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거 본성에 비하면 이것은 부수적인 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 큰 일을 맡는다. 처음부터 큰 일을 맡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작은 일, 눈에 띄지 않는 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일, 제가 무협 소설을 보면요. 중국 무협 영화를 보면, 또 이제 불행한 사건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기가 원수를 갚아야 돼, 무술을 배워야 돼. 그래서 이제 유명한 고수에게 찾아갑니다. 그래서 이제 선생님 제가 저기 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선생님이 어떻게 하냐? 안 가르쳐줘요. 3년간 물 기르라고 합니다. 그때 성질 나서 어디로 가면 못 배웁니다. 자기가 하려는 것하고 상관없어 보이는, 이런 일들을 충성스럽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걸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여간 그거 하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경외심인데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경외심은 두려워하다인데, 그런데 이제 보통 두렵다고 하는 것이 이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잖아요. 하나님 안 믿어서 심판할까 하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아니고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믿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믿는데 왜 두려워하죠? 뭐 심판받을까 봐 두려워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될까, 나로 인해서, 나 때문에, 나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이 사람이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을 인도자로 세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임에서 많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다음에 그래서 2절은 이제 돌아가야 되니까, 약속한 시간이 됐기 때문에 이제 그다음 자기 대신 일을 맡을 다음 세대를 세운 거고요.

3절은 이 인도자들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그럼 이렇게 세워진 인도자는 뭐 한 거냐? 뭘 해라고 하냐? 3절,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성문을 열지 말라고 돼 있는데요. 신약 성경에 보면 이게 "성문을 열지 말고" 뭐 이때는 닫고, 막 이렇게 돼 있는데, 이게 영접하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영접'입니다. 누구를 들어오게 할 것인가 모임에 물론 구원받은 사람은 들어와야 되죠. 그렇지만 구원받고 나서도 구원받았다고 다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교회 진리를 이해하고 순종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들여와야 합니다. 그냥 뭐 믿는다고 하니까 싹 들어와서, 나중에 안에 들어와서 자꾸 불평을 말하는 거죠. 그거 왜 이래요? 이렇게 하면 안 되나요? 모임이 어지러워지는 거죠. 처음부터 모임의 장로들과 모임의 질서와 그리고 모임에서 실행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순종하겠는지, 하고 들어야 되는 거죠.
이제 신약 성경에서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보면 "거짓 형제가 가만히 들어왔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요. 갈라디아서 2장이고요.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도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다음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영을 다 믿지 말고" 그래서 베드로, 바울, 요한, 전부 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사도들이 전부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이제 장로들이 이거 해야 합니다. 누구를 들여오고, 누구를 거부해야 될 것인지, 이걸 하지 않으면 교회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자는 어떤 사람이냐? 충성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임무, 영접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구 잘못 들어온 것은 장로들 책임이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 보십시오.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성도들이 함께해야 합니다. 장로들을 돕고, 장로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성도들의 경우에 보면 이제 이런 표현이 돼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에 가 보면 어떤 사람이 잘 모르는 어떤 여인의 집에 들어가서 이렇게 이상한 가르침을 해서 집을 온통 거꾸러뜨리는도다, 이런 표현이 있죠. 그래서 이게 교회로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합니다. 그래서 잘 해야 합니다. 개인도 영접할 때 잘해야 합니다. 아무하고 아무 교제나 다 하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 이서에서는 사도요한이 부녀에게 "이 교훈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영접하지 마라"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매님들이 이제 뭐 일꾼이라 그러고, 성도라 그러고, 또 이제 한 번 여기 방문했다고 그러니까 막 환영하고 하죠. 그런데 조심해야 됩니다. 이 교훈, 이 사도 요한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훈, 교회에 관한 교훈, 이 교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들어오면 냉정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이게 이제 책임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이제 항상 장로들 이야기하면 이건 한꺼번에 같이 균형을 위해서 말하는데요. 장로들이 책임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13장입니다.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장로들도 책임이 크죠. 주님이 세우셨죠, 이들이 이제 일을 합니다. 성도들의 책임,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너희 장로들이 똑바로 안 하고 해서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할 게 아니고, 자기도 하나님 말씀을 따라 깨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4절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이어야 되는가를 말하고, 그다음에 자기가 떠나니까 인도자들을 세우고, 인도자들한테 책임을 부과하고, 그다음에 4절은 이제 예루살렘 성의 당시의 문제점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넓습니다. 그런데 살 사람의 숫자는 적습니다. 조금밖에 안 삽니다. 그러니까 인구가 적은 거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죠. 우리도 요즘에 지방 소멸, 그래서 인구가 다 서울로 떠나버리고 그러니까 막 이 문제가 돼서 빈집 많아지고, 막 이렇게 되죠. 그런데 이때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성은 크고, 살 수 있는 인구는 적고, 그다음에 집은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성벽을 짓느라고 이제 집도 옛날에 있는 집들, 자기가 포로되기 전에 살던 집들이 있는데, 이거 다시 리모델링 해야 되잖아요. 살려면, 그런데 그걸 아직 못 했어요. 다시 말하면 4절은 이런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살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 매력이 없습니다. 딴 데 가서 사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편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로 치면 이거죠. 모임에 들어오면 불편합니다. 주중에 안 나오면 자꾸 왜 안 나오냐고 하고, 예배 한 번 빠졌더니 왜 뭐 문제 있냐, 그러고 불편하죠. 딴 데서는 아무 말 안 해요. 딴 데는 오기만 해도 좋다 그러고 막 교회는 왔는데도 뭐라 그러고, 교회 다닐 생각 납니까? 안 나죠. 예루살렘 성이 그렇습니다. 불편합니다. 그런데도 와서 살아야 됩니다. 왜요? 그래서 4절은 예레미야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게 지금 넓기만 하고, 살 집도 제대로 안 돼 있고, 오려는 사람의 수는 적고, 성은 이제 지어놨는데, 지금 중요한 것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인데 사람 자체가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하고 기도했을 때 5절,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느 7:5).

"계수"하기 시작합니다. 계수, 성경에 나오면 이게 인구 조사입니다. 우리나라도 가끔 하잖아요. 센서스라고 하죠. 인구 조사입니다. 인구 조사를 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 출신이고, 자녀가 몇 명이고, 그런걸 조사합니다. 이걸 합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 잘못했다가 하나님께 벌 받죠. 셋 중에 하나 골라라, 막 이렇게 되죠. 그런데 이 경우는 합법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하라고 한 목적, 예루살렘 성에 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인구 조사의 목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불편하다, 다른 데 많은 편리한 데가 있다. 그래도 예루살렘에 살아야 된다. 불편할지라도, 고통이 있어도, 희생이 있어도, 가야 된다, 라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인구 조사를 한 것입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된 건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제 느헤미야 시절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6절에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혔던 자 중에 놓임을 받고" 돌아온 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보겠습니다. 이제 유다가 있었는데 느부갓네살이 와서 정복하고, 세 번 정복하죠. 그래서 이제 포로를 끌고 갑니다. 첫 번째 정복했을 때 끌고 간 게 이제 다니엘입니다. 그때는 왕과 귀족을 끌고 갑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을 때 끌고 간 것은 기술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기술자들, 관리인들, 이런 사람들, 이들이 없어지면 이제 국가는 운영 못 합니다. 이들을 끌고 갑니다. 이때 끌려간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 하시죠. 다니엘을 바벨론 왕국의 총리로 세웁니다. 에스겔은 백성들 가운데, 그발 강가에서 백성들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말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징계다, 순이 잘 받아라, 회복시킬 거다. 이제 이런 메시지를 준 것이죠.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는 모든 사람 끌고 가고 가난한 사람 몇 명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세 번인데요. 끌려가고, 그다음에 70년이 됐을 때 고레스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너희들 가운데 돌아가고 싶은 사람, 이스라엘 옛날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 돌아가라, 이렇게 합니다. 몇 명이나 돌아갈까요? 그래서 최초로 돌아온 사람이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통해서 이렇게 돌아온 게 한 4만, 5만 명 쯤 됩니다. 이스라엘 인구가 몇백만이죠? 조금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목록이 에스라 2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 느헤미야에서는 에스라하고 느헤미야는 보통 이제 시간이 한 70년 간격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처음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다시 등록을 시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돌아온 사람의 후손들이다." 그들이 왜 돌아왔죠? 바벨론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땅은, 여전히 황폐합니다. 그런데 그리 돌아가려면 돌아가라, 그랬더니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쌓아올린 세상에서의 많은 부귀 영화를 내려놓고, 황폐하지만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겠다고 한,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리고 성벽이니까 교회 진리를 실행하겠다고 한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등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누구냐?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 너희 할아버지가 누구냐? 바벨론에서 부귀영화를 희생하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온 사람이 아니냐?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너희 조상의 믿음을 본받으라. 너희 아버지, 너희 할아버지, 그 믿음을 이어가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보시면 어떻게 돼 있냐면, 그다음에 7절을 보시면 수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그다음에 아사랴, 나하마니, 모르드개, 있는데요. 이제 여기 있는 느헤미야, 모르드개는 우리들이 아는 모르드개, 느헤미야가 아닙니다. 동명이인입니다. 하여간 이름이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하는 거고요. 그런데 이 7절에 이 스룹바벨은 누구냐 하면 왕가 입니다.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7절에는 몇 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냐면 12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12명이고 이들이 인도자입니다. 스룹바벨과 같은 왕들과 귀족들, 그래서 그 모임의 인도자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8절부터는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인 것을, 돌아온 사람의 후손인 것을 입증할 때 조상과 관련돼서 입증된 사람들입니다. 바로스 자손, 스바댜 자손, 해서 이렇게 혈통을 따라, 족보를 따라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입증한 사람이 24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다음에 25절은 "기브온 사람" 표현이 다르죠. 24절까지는 무슨 무슨 자손,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25절부터는 기브온 사람, 26절 베들레헴 사람,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자기가 자기의 정체성을 첫 번째 혈통으로 입증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자기의 정체성을 장소로 입증합니다. 내가 어디에 살았던 사람이다, 내 고향이 어디다라고 하는 것으로 입증한 사람입니다. 이게 기브온 사람부터 쭉 이어져서 42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혈통으로, 그리고 고향으로, 이스라엘인인 것을 입증한 사람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43절은 레위 사람 나오고요. 레위 사람은 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그다음에 44절 노래하는 사람, 다윗이 세운 거죠. 45절 문지기, 다 의미 설명했고요.
그다음에 46절 하나만 보겠습니다. "느디님 사람" 느디님 사람은 설명했는데요.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이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할 때 기브온 사람들이 이렇게 하죠. 기브온 사람들이 우리 먼 나라에서 왔는데요. 평화조약 맺읍시다. 그래서 떡이 출발할 때 가져온 떡, 이렇게 다 곰팡이가 슬었네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이들은 여기 가나안 땅 안 사는구나. 우리가 정복할 땅에서 안 사네, 그래서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나안 사람입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어요, 거짓말 한 거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습니다. 대신 이 사람들이 물을 깃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합니다. 이게 느디님 사람들입니다. 가장 천한 일을 한 거죠. 그런데 이들이 놀랍게, 그래서 항상 낮은 일이라고 하는 건 없습니다. 그런 일을 했는데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느디님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사소한 일들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느디님 사람의 의미고요. 이렇게 46절까지 됐고요.
그다음에 57절 솔로몬 신하들, 솔로몬 신하까지 자기 족보를 이렇게 판명할 수 있었던 사람, 57절부터 솔로몬 신하들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이제 61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제 여기 난처한 사람들이 나왔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인지를 입증할 수 없는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 61절 보면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이게 정말 이스라엘이 맞는지 애매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숫자가 62절에 보면 642명입니다. 꽤 많죠 642명, 그다음에 63절 보면 제사장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고로" 이게 이제 족보에 없는 겁니다. 에스라가 만든 족보에 없는 거예요. 자기 이름이, 그랬을 때 이제 난처한 건데요.
저희도 이제 약간 적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모임 생활하다 보면 저희들이 이제 구원 간증이 분명하죠. 언제 구원받으셨습니까? 무슨 말씀으로, 그거 아주 다 영접된 거죠. 그런데 이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구원받았는데요. 언제 무슨 말씀을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제가 어릴 적부터 주일학교 때부터 들어와서 다 믿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거 믿음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요. 분명하게 전환점이 있을 것입니다. 못 찾겠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첫 번째, 그렇게 감정이 불분명한 사람은 첫 번째 가능성입니다. 구원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가능성입니다. 이제 이 사람이 그래도 자기가 구원을 주장하려면 뭘 해야 되냐면 자기의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자기 믿음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그가 예배드릴 때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감사, 그리고 성도로서의 삶의 여러 모습들을 기꺼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이제 이와 같이 삶으로 입증해야 되는 사람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제사장은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은 이렇게 이제 받아줄 수 있는데요. 제사장은 이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자리입니다. 제사장은 책임 있는 자리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건 안 된답니다. 이것은 분명해져야 됩니다. 그런 부분이, 왜냐하면 자기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의 경우는 제사장 직무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게 난처하게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나오고, 그걸 이제 느헤미야가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것들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68절을 보시면 특이한 부분이 나옵니다. 말, 그다음에 노새, 69절, 약대, 그러니까 낙타, 나귀를 셉니다. 아니 사람을 세는 건 좋은데, 짐승들까지 세는 거예요. 짐승들을 왜 세죠? 이것들이 구원받은 것도 아닌데, 그래서 이제 이 부분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훗날 이스라엘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정착했을 때, 이 사람들이 번성하고 성이 됐을 때, 이게 여러 가지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이게 이제 저 말들은 다 이게 이제 타고 다니는 것들이죠. 노새도 그렇고, 짐 싣고 다니고, 그래서 나중에 예루살렘이 번성했을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도 하나님께서 계산하고 계셨다. 훗날 이들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충분히 번성해 가도록, 그다음에 70절입니다.
그다음에 70절하고 72절은 이제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고린도후서 8장, 9장, 이런 데 보면 헌금의 원리가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헌금의 원리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지니라"고 돼 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의 헌금을 하나님이 받습니다. 원해서 드려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이 정도는 해야지, 이렇게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은 마음을 받으십니다. 얼마를 드렸느냐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이게 전부 주님이 주신 것이고, 그래서 이것을 드림으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려야 된다. 이게 이제 헌금의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절로 가겠습니다. 73절, "온 이스라엘이 다 그 본성에 거하였느니라" 그 본성 그랬으니까 자기 성입니다. 자기가 원래 살던 그 성으로 다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만, 나중에 보면 예루살렘 성으로 많이들 옵니다. 지금까지는 계보를 정하고 자기가 원래 있었던 성에 거합니다. 그런데 이제 확인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 바벨론의 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이름을 주신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 생애를 헌신했던 사람들이 아니냐? 이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더라고요. 이게 이제 기본적으로 누구냐 하면 이게 유대 사람들입니다. 남유다죠, 남유다가 70년 만에 포로 돌아온 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래서 훗날 주님 지상 재림했을 때, 온 이스라엘이 마침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사건이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드디어 느헤미야는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예루살렘 성을 완공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다시 훼손되지 않도록 그런 영적인 작업들을 해옵니다. 이제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적용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중요하고 또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를 교훈 받는 그런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사용하셔서 저희가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대전 중구 모임,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고 예배 때마다, 집회 때마다 임재에 계신 우리 주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내가 마땅히 어떠한 사람이 돼야 될 것인가? 어떤 기도를 해야 될 것인가? 어떤 헌신이 필요한가?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