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과 나귀 : 돈을 사랑한 악한 선지자
< 발람과 나귀 : 돈을 사랑한 악한 선지자 > 기드온 쿠 형제님
오늘 집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목요일 말씀 시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시 여기 돌아와서 이제 그 주제를 계속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동물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이 동물에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동물들과 연관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아니면 불순종하는지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는 죽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단순한 지시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는 그의 나귀도 먹지 않고 있는 사자였습니다. 나귀라는 것은 사자를 보면 달아나버리는 짐승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은 그 먹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이 사자는 그 나이를 먹는 것을 거절할 수 있었던, 그걸 컨트롤할 수 있었던 사자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느 곳에서도 머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지시 사항을 지키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귀에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귀가 그 하나님의 사자보다도 더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에 나오는 이 짐승들이 오히려 우리를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실패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면 계속되는 집회 가운데서 이러한 주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다시 한 사람과 한 나귀를 볼 것입니다. 제가 이 마포에 이 동물원을 가져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른 종류의 나귀입니다. 그리고 주일 이 시간에는 수족관을 여러분에게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요나와 큰 물고기를 말씀을 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제는 발람과 그의 나귀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주제입니다. 민수기 1장을 보겠습니다.
"이 계수함을 입은 자는 모세와 아론과 각기 이스라엘 종족을 대표한 족장 십 이인이 계수한 자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그 종족을 따라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다 계수함을 입었으니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더라"(민 1:44-46).
그리고 2장 1절과 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민 2:1-2).
그리고 26장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26장 22절부터 27절까지 읽겠습니다.
"이는 유다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칠만 육천 오백명이었더라 잇사갈 자손은 그 종족대로 이러하니 돌라에게서 난 돌라 가족과 부와에게서 난 부니 가족과 야숩에게서 난 야숩 가족과 시므론에게서 난 시므론 가족이라 이는 잇사갈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만 사천 삼백명이었더라 스불론 자손은 그 종족대로 이러하니 세렛에게서 난 세렛 가족과 엘론에게서 난 엘론 가족과 얄르엘에게서 난 얄르엘 가족이라 이는 스불론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만 오백명이었더라"(민 26:22-27).
22장을 보겠습니다. 1절부터 13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을 인함이라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의 연고로 번민하여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줄을 내가 앎이니라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로 그에게 고하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하니라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발람이 하나님께 고하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라 이르기를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 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민 22:1-13).
같은 장 22절부터 31절까지 읽겠습니다.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민 22:22-31).
36절부터 마지막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발락이 발람의 온다 함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특별히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케 하지 못하겠느냐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할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발람이 발락과 동행하여 기럇후솟에 이르러서는 발락이 우양을 잡아 발람과 그와 함께한 귀족을 대접하였더라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민 22:36-41).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 나귀와 이 사람에 대해서 이제 바로 여러분들에게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보다 이걸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상세한 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반적인 배경을 살펴본 후에 우리는 그 상세한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젊은 성도님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민수기 22장을 읽으려면 21장을 먼저 읽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23장을 읽어야 됩니다. 그런데 민수기 21장을 읽으려면 민수기 20장을 먼저 읽어야 됩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돼야 됩니다. 그래서 22장을 읽기 전에 사실상 여러분은 민수기 전체의 장을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민수기 1장의 부분을 읽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발람과 그의 나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전에, 그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유혹을 받기 전에, 우리가 먼저 보아야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시선에서 어떠한 존재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수기 22장, 23장, 24장에서 중요한 주제로 나오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민수기 22장부터 24장에 나오는 이 사람과 관련돼서 중요한 것은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때때로 이 사람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속할 때에 우리의 눈은 밝아집니다. 그것이 바로 이 몇 장에서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데 민수기는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느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우리가 보는 것을 실패하곤 합니까? 나의 시선이, 나의 시야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아주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입니다. 민수기 처음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우리는 살펴봐야 됩니다. 민수기 1장에서 먼저 이제 수를 세는 게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수가 계수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그들을 계수하라고 하셨습니까? 20세 이상으로 다 계수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 20세 이상이 되는 남자들이 군사로, 또한 일을 할 수 있는 남자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몇 개의 장에서 레위인들이, 또한 제사장들의 수가 계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싸우는 사람들의 수를 계수하시고, 그리고 경배하는 사람들의 수를 계수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영예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군사입니다. 우리가 총과 다른 무기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영적인 어둠의 세계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위한 군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것이 단지 싸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드리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계수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군사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우리는 1장 43절에서 이 수가 이렇게 계수된 것을 주목해서 보고자 합니다. 1장 46절에서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60만 3,550명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수가 싸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를 계수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민수기 중반부에 갔을 때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범죄하였고,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들어가길 원치 않는다면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라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 때는, 그중에 누구는 우리 들어가겠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아주 심각한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 이스라엘 민족들은 38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첫 세대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져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 자신도 그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어떤 분들은 이제 모두 합해서 200만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왔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중에서 얼마나 많은 수가 죽었을지 우리는 계산하기 어렵습니다. 이 첫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그중에서 100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60만 정도가 싸울 수 있는 군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 60만이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세대를 일으키십니다.
이제 2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6장 51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십만 일천 칠백 삼십명이었더라"(민 26:51).
이 26장의 이 수는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여기에 다시 한 번 그들의 수를 계수하였던 것입니다. 첫 번째 세대는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고, 이제 다시 한 번 그 수를 계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60만 3,550명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더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제가 이 놀라운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사의 수를 계수하십니다. 그리고 그 수가 몇 명이었는지 아십니까? 60만 1,730명입니다. 우리가 1장에서는 60만 3,550명이었습니다. 첫 세대에서는 60만 3천 명 정도가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두 번째 세대를 일으키실 때, 그 첫 번째 세대의 수와 거의 비슷한 수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60만 1,730명이었습니다. 이 38년의 간격을 두고 비교해 봤을 때 단지 2천 명 정도만 줄었을 뿐입니다. "기드온 형제님, 그게 이 주제에 뭐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대를 완전히 멸절시키신 후에도, 이제 다시 다른 세대를 그와 같은 숫자로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스라엘 민족이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것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된 백성이고,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많은 수는 다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한 나라로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많은 왕들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시선에서 새로운 왕들을 그분은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모든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우리가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하다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 그분의 평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그 땅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한 하나님의 보시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민수기를 또 처음부터 읽어보실 때에 제가 여러분에게 특별히 말씀을 드리고 주문해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파 별로 어떻게 성막 주위에 진을 칠 것인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서남북으로, 각 지파는 자기의 자리를 배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질서 잡힌 진을 치게 됩니다. 그들이 단지 동서남북으로 질서 있게 진을 쳤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임재, 그분이 계시는 그 기구들을 둘러싸고 진치고 있습니다. 그 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단지 정렬돼서 진을 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동할 때에 여기에 또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어떤 지파가 가장 먼저 움직여야 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에 가구들이 어떻게 포장이 되고, 어떻게 운반해야 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언약궤를 중심으로 그들이 질서 있게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질서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구름이 움직이기 전에 그들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움직일 때 또한 그들도 움직였습니다. 그 움직임은 어떤 단순한 질서가 아니라,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구름 기둥이 북쪽으로 이동하면 그들은 북쪽으로 갑니다. 불기둥이 남쪽으로 가면 그들도 남쪽으로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 광야를 40년 동안 이렇게 이동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실패의 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아름다운 그 질서 가운데서 움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초반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계시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질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그리고 이제 발람과 발락이 그 이스라엘의 진을 쳐다보는 것이 나옵니다. 이제 그들이 보기에는 이것은 저주를 받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민수기 6장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민수기 6장을 '제사장들의 축복'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가장 오래된 그 고고학적인 성경 사본 발견문에서 바로 이 제사장의 축복이 언급된 구절이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구글로 이것을 찾아보시면 민수기 6장에 나와 있는 제사장 축복이 특별히 고고학적 발견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6장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어떻게 아론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합니까? 그 아론은 여호와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축복받아야 되는 자들, 축복받은 자들로 보십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축복한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이삭이 야곱,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기 49장에서는 이스라엘, 야곱이 그의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의 언약이, 그것은 그들이 이제 강한 나라가 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수가 많을 것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왕들이 나올 것이며, 그리고 그 대적의 소유물을 취할 것이며, 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축복의 언약이 세대를 거듭해서 내려가서 결국에 그것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받은 민족입니다. 이 제사장의 축복이 그러한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중심에 있는 그들을 향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서두에 그 수가 계수되었고, 그리고 그 수는 40년 동안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지구상에서 멸절시킬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그 아름답게 정렬된 진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 제사장의 축복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전히 축복하신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람이 완전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것을 이제 볼 것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그 나라를, 그 대적의 저주를 받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그 대적이 얼마나 강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어떠한 방법을 쓴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결코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동에서 일어나는 많은 전쟁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이 하는 일이 지금 잘하고 있다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발생하든지 간에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멸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민수기 22장을 보겠습니다. 이제 그 민수기가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발람과 나귀에 관한 그 이상한 이야기가 왜 이 민수기 중간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바로 이 부분을 이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스라엘만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 반대의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래서 이제 민수기 22장에 오게 되었을 때에, 이제 여기에 이미 새로운 세대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약속의 땅으로 행진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 있는 다른 대적들은 모두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누구는 이미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압왕 발락은 그의 무릎을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미디안도 역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저 많은 민족의 수를 보라, 그들이 모두 우리를 다 정복하고 말 것이다라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이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부르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발람에게 사자를 보내서, 그를 고용해서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발람은 아주 유명한 선지자였을 것입니다. 그의 그 성공 보상금이 아주 높았던 것입니다. 그의 명성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발락이 보낸 사자들이 발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
그는 이와 같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을 주는데, 또는 저주하는 데 아주 성공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 관련해서, 또 다른 문제에 관련해서는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발람은 아주 어려운 그런 사건을 맡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발락이 무엇을 요청하는지 그가 원하는 바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발람은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우리는 이 발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제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 발람의실제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좋은 선지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를 악한 선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 여호와와 어떤 연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장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불경건한 사람입니다. 이 신약에서는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먼저 베드로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2장 15절입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을 보겠습니다.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그리고 계시록 2장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 버가모 교회에 보낸 말씀에서,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그래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는 불의의 삵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가 삯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그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방법과 관련돼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선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과 접촉하는 능력이 있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22장, 23장, 민수기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그런 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를 보면 뭔가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토론에도 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참 특별히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 가운데서는 그 작은 확신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통역하는 형제님과 지난 며칠 동안 긴 여행을 하면서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왜 여기 다니다 보면 한국에는 왜 이단 교회 건물들이 이렇게 많은 건가요?" 제가 대답을 잠깐 멈추고 좀 이따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사람들이 그냥 문맥과 상관없이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작은 구절들을 이제 아주 교조적으로 그것만 가지고 이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이제 한 종교로 만들어버립니다." 제가 이 성경을 여러분에게 어떻게 제시하는지 그 방법을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의 어느 한 구절, 그것만 이제 독립적으로 떼서 그것만 살펴보지 않길 바랍니다. 공부하는 자는 반드시 전체적인 성경을 살펴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러 성경의 기자를 사용하셨지만, 그래서 이 성경은 끊이지 않는, 흠 없이 이어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어서 우리에게 이 교리와 하나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그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한 작은 것을 잘못 교리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단들이 나오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나라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많은 악들이 이 그리스도교와 관련돼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국의 밖에 살고 있는 제가 느끼는 것보다 여러분은 더 많은 그 위험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 발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더 성경을 잘 알고, 그런 경우가 돼서는 안되지만,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이단들이 우리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그 발람과 발락이 하고자 하는대로 그것은 하나님에서 온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많은 종교들은 돈을 목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종교가 아주 돈에 열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현금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산업입니다. 참 이 현금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이 세상의 어느 카지노보다 교회가 더 큰 것입니다. 아주 큰 사업입니다. 그리고 발람이 이제 그의 대표적인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 불의의 삭을 쫓는 데 아주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주 탐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제 어떻게 이 장에서 행동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이 발락은 발람에게 사자를 보내서 "나는 당신을 고용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맡아야 되는 역할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발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면, 이러한 유혹은 아주 치명적인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어보러 밤을 새서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보세요." 그리고 이제 그 손님들을 접대하고,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하나님께 묻고 올게." 그리고 그날 밤에 그는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9절에서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실 때는,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지난번, 작년 집회에서 야곱이 브누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 족장들에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면서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그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울아, 사울아" 성경에 이와 같이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실 때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질문을 단지 하십니다.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나님은 당연히 이 대답을 알고 계시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 질문을 하십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는 그분이 그 대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는 이 질문을 통해서 그들이 지금 어느 상황 가운데 있는지, 그것을 깨달으라고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제가 어린 나이였을 때 이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창세기 2장, 3장을 다루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셨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친 후에 어떤 형제님이 저에게 오셔서 "기드온 형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야 된다." "엇, 제가 뭐 잘못 말했나요?" "하나님께서는 그때 아담을 이름을 부르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으셨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만 단지 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이제 아담으로 하여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어느한 상황 가운데 있는지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한 질문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로 하여금 이 상황을 제대로 깨닫도록 하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발락이 내게 보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발락이 뭘 원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답변하신 것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민 22:12).
이것은 민수기 6장에 나온 그 제사장의 축복에 나오는 그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때때로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제가 어떤 것을 이제 부탁을 할 때에 "제가 한번 기도해 볼게요."라고 합니다. 어떤 질문에든, 이제 어떤 대답하기가 조금 애매한 거 다 이제 그렇게 답변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수년간 젊은 성도님들이 저에게 와서 이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기드온 형제님, 제가 이 직장을 지금 얻게 됐어요." "잘 됐는데, 어떤 직장인데?" 제가 이것을 좀 과장해서, 실제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인도네시아의 어떤 깊은 정글 속에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 "저는 거기에 2~3년간 거기서 일을 해야 됩니다. 거기에 그래도 좋은 도시와 좋은 사람들이 있어요." "월급도 잘 받겠는데?" "지금 받는 것보다 3배나 더 줍니다." "잘 됐네." 그런데 제가 "내가 더 중요한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저를 쳐다보면서 뭘 물어보려고 하는 걸까 합니다. "거기에 모임이 있는 것인가?" "없는것 같아요."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없는 것 같아요, 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주 이상한 답변을 하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기도해 볼게요." 그 질문하러 온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 한번 기도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뭘 기도하는 건데? 그런 직장을 취하고자 한다는 말인가?" "다음 달까지 이 직장을 구해야 돼요." "그럼 너는 지금 그들이 너에게 직장을 주지 않기로 기도하고 있니? 아니면 그 한 달 동안 그 모임이 없는 곳에 모임이 생기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냐? 도대체 뭘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인도해 주시기로 길을 바라고 있어요." "아니, 너는 이제 천사가 너 앞에 나타나서 '기드온, 거기 가면 안 돼.' 이렇게 말해주는 것을 바라고 있는 거냐?" 사실 발람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한번 내 운을 시험해 보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내가 어느 정도까지 운이 있는지 한번 끝까지 한번 해보자. 그 답변이 아주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뜻이 뭔지 모르겠어. 특별히 어떤 인도하심이 있어야 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은 "기도해 볼게요."라는 것을 이제 변명으로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해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응답을 기다리고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많은 것이, 우리가 사실 기도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 번을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대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이 똑같은 하나의 대답만 있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앞에서 그냥 흑과 백처럼 아주 명확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나 기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단지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해 볼게요."라는 것을, 이제 그 순종을 미루는 그 변명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우리에게 우리가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그 놀라운 특권을, 그 지시 사항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사람들에게 "좀 기다려봐, 내가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 볼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기도입니다.
이제 발람은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유, 이제 돌아가십시오. 내가 당신들하고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런데 발람은 그들에게 전체의 그 대답을 전달한 게 아닙니다. 정직하게 그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발락이 보낸 사자들에게 "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을 수 없는, 그들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단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지 않는다라고만 말합니다. 다시 한 번 그 3배나 더 급여가 많은 직장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야 기드원, 이 직장 너 이 자리에 가면 너가 이 회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 3배나 많은 급여를 주고 그냥 최고의 자리에 승진하는 기회야." 그리고 이제 장로, 강 형제님께 찾아와서 "이런 제안이 있는데요. 제가 이걸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강 형제님은 아니 왜 그런 것을 기도하고 있는 문제가 되냐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그 형제님을 만나고 실망해서 머리를 숙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또 그 상사를 만납니다. "기드온, 이제 결정했니? 너가 지금 그 자리가 안 간다면 난 다른 사람에게 줄 거야." 내 상사가 며칠 더 여유를 주는구나. "내가 이 가족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무슨 가족 문제를 말합니까? 그냥 저기 가족 문제예요. 제가 그 자리에 간다면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말해야 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저는 직장을 위해서 모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이 직장에서 이 상사가 여러분에게 압력을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이 믿지 않는 불신의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하기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불신의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하기 어려운 그 말이 "안 돼요." "싫어요."라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발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회심했는지, 거듭난 사람인지, 저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의 어떤 한 모양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몇 가지 그 기회들이, 그 유혹들이 이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시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 돈이라는 것이 우리가 거절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그런 것입니다. 그 위치라는 것이 거절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제안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거절할 때마다, 아니오라고 할 때마다, 여러분은 그 승리자의, 이기는 자의 그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그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충성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높여드린다면, 그분은 우리를 높여주시고 우리를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들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빚지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 발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하고 함께 가기를 허락치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발락은 더 높은 중요한 인물들을 그 발람에게 보냅니다. 이제 발람에게 요청하려고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요청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은 아주 훌륭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와서 이 사람들을 저주해 주십시오." 발람은 아주 그 성경의 인물처럼 대답합니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민 22:18).
이제 여기에 멈추게 됩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발람이 뭔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발람이 "내가 기도해 볼게요, 기도해 볼게요." 하는 이제 그런 사람처럼 다시 이 행동하게 됩니다. 여기 다시 한 번 하룻밤만 더 기다려 봐라.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가서 내가 기도해 보겠다. 또 기도를 드린다면 그 대답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기드온, 너 지금 잘못하고 있어. 네가 하나님께 계속, 계속해서 요청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대답을 바꿔주실 수도 있어." 하나님께서 그 대답을 바꿔주십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민 22:20).
그 대답을 바꾸셨지만 이제 이 말을 덧붙이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대답을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일 이 시간에 주님의 뜻이면 이것을 살펴보겠지만, 발람은 결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가라고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주 절실하게 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잘못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육체 정욕이 그것을 모두 다 이기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길을 가도록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아주 궁극적인 멸망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때 이제 우리의 눈이 번쩍 띄어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것을 하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23장과 24장에서 왜 하나님이 반람에게 가라고 하셨는지를 이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그 이스라엘게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를 선언하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우리는 이 장들를 통해서 발람이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를 그들에게 선언한 것뿐만 아니라, 이제 메시아 예언에 관한 아주 중요한 예언을 그가 또 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발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달랐지만 말입니다. 이제 발람은 가도록 허락됩니다. 알람은 다를 때보다 더욱 빠르게 자기 짐을 챙겨서 떠납니다.
제가 한국에 올 때 저는 셔츠를 달리는데 시간을 많이 들였는데, 발람은 그럴 새도 없이 그냥 바로 출발해 버립니다. 그는 수트 케이스에 그냥 옷을 다 던져놓고 그냥 들고 간 것입니다. 그냥 샌들을 걸쳐 씻고 막 달려 뛰어나갑니다. 그는 이제 신난다!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22절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는 결코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탐욕스러운 발람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는 이제 나귀를 타고 달려갑니다. 내가 발락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아주 생각하면서 갑니다. 내가 1시간당 500달러씩 받을 거야. 내 이것은 아주 큰 프로젝트니까 그 정도 돼겠지. 그가 나귀를 타고 가면서 그런 어떤 어떤 밭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그 길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23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그 손에 칼이 있었습니다. 바로 짐승이 그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그를 보지 못합니다. 이 짐승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래서 그는 이제 밭으로 도망갑니다. 발람은 이 나귀를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를 때리고 다시 길로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갑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이제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습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가 여전히 그 길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길은 양쪽에 담이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여호와의 사자를 피하기 위해서 나귀는 한쪽으로 돌이켜야 되고 그래서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발람의 다리가 벽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발람은 그 나귀를 때립니다. 그래서 그 나귀가 다시 길 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제 또 그 길을 가게 될 때에, 그 길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좁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여호와의 사자는 그 길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그런데 이번에는 길이 너무나 좁아서 그 나귀가 옆으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 길 가운데 주저앉고 맙니다. 이제 발람은 아주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더욱 그 나귀를 심하게 때리게 됩니다. 그는 지팡이로 나귀를 제 생각에는 아주 여러 번 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말을 하게 됩니다. 그 나귀가 무슨 말을 합니까?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그리고 발람은 그 나귀에게 그것도 대답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집에서 키우는 개가 여러분에게 말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나겠죠. 그냥 '세상에 이런 일이' 하면서 나올 것입니다. 어떤 나귀가 미국에 와서 "나에게 좀 음식 좀 주세요." 여러분이 "그래, 내가 줄게."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엄마한테 막 말할 것입니다. "아니, 이 나귀가 말을 해요!" 그런데 발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발람이 나귀에게 대답해 줍니다.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그런데 나귀가 또 말을 합니다. "나는 네가 오늘까지 내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었더냐?" 내가 너의 오랫동안 아기로 일하지 않았냐? 그중에 너를 안 따른 적이 있었냐? 내가 너에게 이와 같이 잘못한 적이 있었냐? 왜 이렇게 때리는데?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어? 그 발람은 나귀를 보면서 없었다라고 대답해줍니다. 참 이상한 사건입니다. 발람은 나귀가 지금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데도 놀라지 않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지금 머릿속에는 내가 발락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는지 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얻어낼 그 불의의 삯이 그를 완전히 집어삼켜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잘만 진행됐다면 그는 수백만의, 수억의 그런 부자가 됐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디모데서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봅니다. 물론 돈 자체가 그 일만 악의 근원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돼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존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다면 우리는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충성된 가운데, 여러분은 그분께 그분의 신실함을 갚아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충분한 양을 주실 때 그분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상에 제공하는 모든 공급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을 그 돈을 쫓아가는 데 다 낭비해버리고 맙니다. 그 시간들, 그 에너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소중하게 사용되었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민 22:31).
제가 이 장과 이 다음 장에 가장 중요 단어가 '보다'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민 22:2).
발락은 그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그 힘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하지만 그의 평가는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았고,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23절을 보게 될 때, 나귀가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에 선 것을, 그리고 25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또한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봅니다. 발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귀가 발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람이 보고 있는 것은 오직 돈입니다. 하지만 그의 충성된 나귀는 그에게 닥친 위험을 봅니다. 어떻게 이 짐승이 사람보다 더 잘 봅니까? 어떻게 나귀가 사람보다 더 상식이 있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그 영적인 상식과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그런 흐려진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도 볼 수 있는 것을,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나귀는 심지어 그를 입을 열어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귀와 대화가 끝났을 때, 31절에 "그때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그제야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이제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말합니다. "나귀가 너의 생명을 구했다. 만약에 나귀가 너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면 내 손에 칼이 너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 나귀에게 발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발람이 나귀에게 말한 말입니다.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내가 너를 죽였을 텐데." 하지만 그가 그 직후에 알게 된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칼로 자기가 죽었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나귀가 그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이제 발람은 자기의 길을 갑니다. 이제 내일 이 시간에 우리는 더 큰 일을 볼 것입니다. 이 위험을 보지 못하는 눈이, 하나님의 그 주권적인 손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이 구약에서 메시아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예언을 그가 보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에 나와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람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의 짐승은 그의 식욕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었던 그 식욕을 그 나귀가 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우리의 식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발람을 보게 될 때 여기에 비슷한 교훈을 받습니다. 그는 나귀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많은 젊은 성도님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상기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 많은, 아주 놀라운 직장 제안을 여러분이 받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 앞에 차려진 아주 거절하기 힘든 사업 제안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 관계를 만드는 그런 기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두 부동 멍에를 메게 하는 그런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제안에 대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 분명한 대답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주 끝까지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용하려고 합니다. 참으로 이 상황에서 분명하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왜 발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계속 하게 하셨는지 그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강 형제님께 제안을 드립니다. 또한 여기 성경을 읽은 형제님에게도 부탁을 드립니다. 이 책들의 장들을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형제님에게 다시 그 모든 장을 다 읽도록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다 이 장을 미리 읽고 왔다는 전제하에서 시작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절약하고 또 형제님들의 수고를 덜어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해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