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언 : 나는 세상의 빛이다
< 덕언 : 나는 세상의 빛이다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뭐뭐다'라고 7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지난번에 이제 첫 번째 말씀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이게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고요.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 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8장 9장에 걸쳐서 나와 있습니다. 잠깐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리고 이제 8장 앞부분에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 쭉 나오고 그다음에 이제 이 말씀을 하셨고요. 그다음에 9장으로 가시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이렇게 말씀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세상은 빛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8장, 9장에 걸쳐서 두 번 말씀하시고 배경이 되는 것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사건이 이제 설명으로 붙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빛에 대해서 성경이 빛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살펴보기 위해서 창세기로 가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장,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실 때 그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창 1:3-4).
이제 그 빛의 특징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다음입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그래서 빛의 첫 번째 특징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것입니다. 빛은 분리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다음에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창 1:15).
빛의 두 번째 기능입니다.
비춰주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는 물체를 비춰줍니다. 빛이 비춰주는 게, 이제 두 번째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창 1:16).
그래서 빛의 세 번째 기능은 주관하는 것입니다. 빛이 낮을 통제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는 전부 낮입니다. 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게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기능은 14절로 가시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 1:14).
이 빛이 있기 때문에 사계절이 생깁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생깁니다. 그래서 빛이 만들어내는 것은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들어냅니다. 이게 이제 빛이 창세기에서 4가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전부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을 빛이라고 하셨을 때, 주님께서 네 가지 기능을 하십니다. 우선 보겠습니다. 첫 번째 나눕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있고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요.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여기 둘로 나뉩니다. 물론 처음부터 나뉘었었는데요. 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빛대신 주님에게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와 같은 발언을 듣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구원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빛되신 주님에게서 늙은이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가버리더라, 라고 빛을 비추기를 거부하고 가버린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빛이면 이 빛은 이렇게 나누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빛 가운데 오는 사람, 빛을 거부한 사람, 나누고요.
요한복음 9장 이제 소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경의 경우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주님 은혜로 눈을 뜨게 됩니다. 빛을 보게 된 거죠. 그리고 또 한 사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내가 소경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 이게 주님의 빛이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본다고 하는 사람을 소경 되게 하기 위해서 왔다."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소경인가?" 여기 눈뜬 소경이 나옵니다. 육체적으로는 눈을 떠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주님을 믿는 자를 출회시키려고 하는 그래서 자기들이 본다고 생각하고 사실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 주님께서 세상은 빛이다라고 할 때 항상 둘로 사람들을 분명하게 가릅입니다. 저희들이 늘 이야기한 대로, 가운데가 없습니다. 구원받았든지, 아니든지, 이렇게 둘로 나뉘어져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이제 빛이 하는 것이 비춰주는 것입니다. 빛은 나눌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을 비춰줍니다. 이 부분은 이제 고린도후서 4장 6절, 잘 아는 구절,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그래서 이 빛이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춰주십니다. 예를 들어보면요, 이제 요한복음 8장에서는 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 물어봅니다. 여자가 대답하죠. "아무도 없나이다." 이 여자를 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죄 없으신 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는데, 죄 없으신 돌로 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이렇게 하신 거죠. 그래서 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율법에 의하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빚 되신 예수님께서 "너를 실제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서 정죄받는 게 아니다. 너의 그 죄는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어떻게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 여자의 죄를 대신 지고 심판받으시기 때문에, 그것을 전제로 깔고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렇게 빛을 비춰주신 거죠.
그다음에 요한복음 9장에 있는 소경에게는 이런 빛을 비춰주십니다. 실제로 이제 물리적인 빛을 주시죠. 실로암 연못에 진흙 이기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고 와라 그래서 눈을 뜨게 되죠. 그런데 이 물리적인 눈을 뜬 것뿐만 아니라 그가 영적인 눈을 뜹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점점 알아갑니다. 첫 번째는 "누가 눈을 뜨게 했느냐?"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말합니다. 그다음에 그럼 너는 "그를 누구라 하느냐?" 점점 "그는 선지자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이상이죠. 그다음에 또 자꾸 이제 논쟁을 하면서 어떻게 돼가냐면, 그분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았으면 창세로부터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나님께로 오신 분입니다. 또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점점 알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쫓겨납니다. 쫓겨나자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굽니까?" 그는 이제 준비된 거죠. "그분이 누구십니까?" "네가 말하는 내가 그니라." 그가 이렇게 말하죠. "주여!" 그리고 경배하였더라. 그래서 그가 소경된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를 점점 알아가고 마침내 예수님께 주님이라고 부르고 예배하는 자리까지 갑니다.
여기에 이제 빛을 비추신, 주님의 빛의 기능 중에 하나가 가르고, 그다음에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을 비춰주고, 이 두 가지 기능을 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빛을 주관합니다. 주관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 속에는 이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해놓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주님이 용서해 주시고, 그 용서함을 받은 생명 속에, 어둠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 주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소경은 이렇게 되죠. 소경에게는 그가 출회된 것을 보고, 그가 쫓겨난 것을 보고 가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소경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으니까 이 사람 죄인이다. 죄인이라고 해라. 그리고 병 고칠 때, 너 눈 고칠 때 뭔가 이상한 방법 쓴 거 혹시 있으면 찾아서 보고해라, 할 때 소경이 계속 거부합니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 하고 계속 주님을 선하신 분으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으로, 계속 주장하다가 쫓겨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게 빛은 빛을 받은 사람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으로 계절인데요.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해도 만들고 이제 나중에는 해 달이 그 빛을 주관하게 하고, 해가 있으니까 이제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고, 그다음에 달이 한 바퀴 돌고 그러면서 이제 사계절이, 그리고 이제 23.5도 이렇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제 이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오는 거죠. 하나님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래서 이제 씨를 뿌리고 그다음에 씨가 자라나고 그다음에 가을에 수확하고 이런 거죠. 이렇게 한 이유가 뭐냐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보면 7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왜 좋아하실까요? 창조하시고 하시고 이거 참 좋다.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참 좋다라고 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모든 피조물이, 이 모든 자연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있으므로 사람들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을 주겠구나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7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그랬는데, 이렇게 창조를 쭉 하시고 다 좋다 그러죠. 그런데 이제 이튿날, 두 번째 날은 창조하시고 좋다는 소리 안 하십니다. 물을 만드시고 위에 궁창과 아래 궁창으로 이렇게 물을 이렇게 구분하시고 좋다는 소리 안 하십니다. 왜요? 이 물이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다 죽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시죠? 그래서 좋다고 안 하십니다. 둘째 날만 없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이 계절을 만드신 것은,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것은 전부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유익을 주도록, 하나님을 아는데, 혹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양식, 필요한 것들이 다 자라고 이렇게 하도록 다 만드신 거죠. 그래서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빛이 계절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은 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들을 볼 때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천국과 지옥을 가릅입니다. 그다음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면 소경에게 나타난 대로 영적인 빛을 비추셔서 영적인 생명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적인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죄를 이겨냅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주님은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입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주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즐거움, 사람의 기쁨을 위한 건데요.
오늘 성경을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이제 그 즐거움에 대해서는 전도서 1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전도서 11장에 보면 이런 힌트가 돼 있습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전 11:7).
저희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이렇게 느낄지 못 느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빛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은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전체로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복된 시간은 지금 여기 와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하셨는지를 찬양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성경을 두 군데만 찾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성도 중에서는 다윗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27편, 다윗은 이제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이게 다윗의 한 가지 소원입니다. 다윗은 하나의 소원만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그의 소원은 전쟁의 승리가 아닙니다. 그가 전쟁에 승리했지만 그가 싸울 때마다,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그의 소원은 이거 하나입니다. 승리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를 보고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계속해서 평생 동안 변치 않고 전쟁터에서도 일어나기를, 이것을 다윗은 구했던 것입니다. 그가 많은 기도 제목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기도를 했겠지만 그가 가장 하나님께 구했던 기도 제목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는 성막에 와서, 하나님의 집에 와서, 왜냐하면 성막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 말해주고 있는 상징물들이잖아요. 거기 와서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내 마음이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 이게 그의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저희들 마음에도 이 같은 소원이 있는 줄 압니다. 주님께서 이 같은 소원을 계속 저희들 속에서 충족시키시고 저희를 기쁘게 하시는 주님인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신약으로 오셔서요. 빌립보서 3장 이번에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도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사도바울은 뒤에 것을 잊어먹습니다. 과거에 잘했던 것, 그게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지 말고, 과거에 실패했던 것, 그것이 자기를 침체되게 만들지 않도록,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잘했건, 못했건, 이미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부름의 상"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습니다. 사도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교사로 부르시고, 전도자로 부르시고,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저희들도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부르신 것을 잘 쫓아가면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상을 주겠다. 이 상을, 하나님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 생애 동안 하나님의 부름을 순종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날 나에게 주실 상급, 면류관, 그것이 자기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있기를, 이게 사도바울의 생애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 부르심을 순종할 때, 이루어낼 때, 하나님이 나에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유일한 한 가지입니다. 이게 그를 살게 한 것입니다. 그로 고난받게 하고, 그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수하도록, 감당하도록, 그가 수많은 고난을 겪었을지라도 그가 실망치 아니하고 변함없이 그 길을 가게 했던 것,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 우리를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 부름 당연히 해야 되는 마땅한 일인데, 마땅한 일을 했다고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인격, 놀라운 은혜, 그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예배 드렸을 때 참 주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시간을 저희들이 계속 기대하고 이 시간을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시간으로 만들고,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 이게 저희들 생애의 절정이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