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전서 5장>
2018년 8월 1일 수요일
강사 : 히긴스 형제님
< 베드로전서 5장>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벧전5:1-1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공적으로 읽은것에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은 이 서신서에서 가장 짧은 장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주제들이 아주 많은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서신서를 볼때에 거기에 다니엘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 장에서 베드로는 이 서신을 바벨론에서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니엘 6장에서 우는 사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 자신의 삶이 베드로전서 5장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공적으로 사역으로 회복시키시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주님꼐서는 <내 어린양을 치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다시 여러분들에게 양들을 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5장 5절에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을 보시겠습니다. 13장에서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이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고 제자들을 섬기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베드로가 그 배에 있었던 장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가복음 5장에 나와있는 기록입니다.
그 호수에 폭풍우가 일어났을때 주님께서는 그 배의 뒷편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폭풍우가 일어나자 주님께로 가서 주님을 깨웁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5장 7절에서는 주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염려하시고 돌보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맏기고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염려를 권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분명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너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와같이 깨어 기도하기 보다는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울부짖었을때 그는 실족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와같은 사도 베드로 자신의 경험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10절에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에 그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주님의 친절하고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세가지 모든 장면이 10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은혜에서 자신을 구원하셨을뿐 아니라 그를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을 잠시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일곱명의 다른 사람들과 연관시켜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셈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 여수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번에 거쳐서 하나님께서는 다른사람과 같이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예를들어 베드로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결합해서 말씀하시는 것 대신에 아버지와 관련해서 일곱가지를 제시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고 모든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입곱번째로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여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바로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내주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바로 여러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각각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목자들에게 그들이 양을 돌보는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5-6절에서는 성도들의 겸손함을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7절에서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8-9절에서는 사단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봅니다. 10절에서는 고난받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에서 참으로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성도님들께서는 은혜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필요하다고 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는 모든 단계의 걸음마다 은혜가 특징된다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이 장에 나와있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찬송을 보겠습니다.
11절에 그는 이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에 거쳐서 세가지 송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가지는 4장에 있는 것이고 지난시간에 본 것입니다.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번째가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번째가 베드로후서 3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개의 송영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4장에 나와있는 송영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섬김을 위한 은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우리의 앞에 놓인 영광과 은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우리의 섬김과 그 은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것을 가지고 이 서신서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그가 말하고 있는 송영에 대해서 그의 서신서를 찾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이 장을 살피기전에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서신서 전체를 보게될때 우리 주님에 대한 전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1장에서는 희생 당하신 어린양으로 제시 됩니다. 2장에서 그분은 돌로 제시 됩니다. 그리고 3장에서 그분은 고난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5장에서 그분은 목자로 제시 됩니다.
그래서 이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5장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겠습니다. 여기 양들이 있고 그들을 위한 돌봄이 있습니다.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대적이 있고 그들이 우리를 속이고자 하는 간교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마지막으로 그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목자들에게 또한 양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모임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1절에서 그들은 장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없는데, 감독하는 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2절 에서는 그들이 모임을 인도하는 목자들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이름이 지역모임을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13장에 대해서 나와있는 명칭을 더 부르겠습니다. 13장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도행전 20장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그들을 감독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시한번 사도행전 20장에서 여기 나온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디도서 1장에서 이 세가지 명칭이 같은 그룹의 인도자들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까요?
그들은 지역모임을 인도하는 동일한 그룹인데 왜 성령께서는 세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계실까요?
여러분이 장로라는 단어를 생각할때, 그것은 특별히 영적인 성숙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지 나이가 많은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해 있어야 합니다.
때때로 나이많으신 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것을 보게 됩니다.
장로는 그일을 담당하는 사람의 성숙함을 말합니다. 이제 감독은 그의 권위를 말해줍니다. 목자는 그의 동정하는 것과 그의 활동을 말해 줍니다.
인도자는 그 양떼를 앞서서 인도하는 일의 고귀함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이 네가지의 다른 표현은 모두 지역모임을 인도하는 각 사람들의 지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말씀드렸고 이제 그들의 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신약성경에서 그들을 가리키는 단어들을 볼때, 항상 복수형으로 나와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오직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서만 그 장로에 대해서 단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장에서는 장로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모임을 인도하는 행함에 있어서 지칭될때는 그들은 항상 복수형으로 지칭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한사람이 그분의 지역모임을 인도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한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했던가에 그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 한사람이 얼마나 말씀을 잘 가르친다 할찌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약성경에 나와있는 교회가 보이는 본도 항상 복수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 교회에서는 한 감독이 여러 교회들을 감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은 한 교회에 대해서 많은 감독들이 감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도력에 있어서 왜 복수의 인도력을 말씀하셨는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동일한 관계를 모든 신자들과 가지고 있을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과는 조금 가깝게 관계를 맺고 있을수 있지만 어떤 사람과는 그렇지 않을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가 다른 성도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들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감독들은 서로간에 같이하며 균형을 맞춰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인도력은 잘못된 가르침을 방지하는데 유용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이후로 계속 나오는 교회의 모습을 볼때, 항상 복수형으로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권하는 것을 보게 될때 몇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장로의 일을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고 격려해주고 있습니다. 억지로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와같은 장로의 일을 하는데 꺼리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베드로가 이 서신서를 보낼 당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많은 핍박이 있었을 시기 입니다. 그 핍박에서 인도자가 첫번째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 위험한 일을 무릅쓰는데 최 선방이 되는것을 꺼려하는 것입니다.
인도하는 자리라는것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면 그 자리에 가는것을 꺼려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맏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선한 목자와 삯꾼의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삯꾼과 도적질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삯꾼은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도적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히려 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것과 상관없이 양들을 돌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 중에 있는> 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들은 양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목자와 양이 얼마나 가깝게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인도자가 해야하는 가장 주된 임무가 단지 천거서에 싸인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인도자들의 가장 주된 이유가 사람들을 꾸짖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임무가 어떤 규칙이나 규정들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도자들의 가장 주된 본연의 임무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제가 요한 21장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은 <내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이 사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한 첫번째 말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그리고 동일하게 베드로전서 5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에게 주는 첫번째 교훈은 양무리를 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5장을 볼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첫번째로 꾸짖는것은 너희들이 양무리를 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관련해서 첫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시겠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살전5:14, 개역한글)
여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는, 붇들어 주는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약한 자들을 자들을 안위하고 힘없는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일이 하나님의 양을 치는 이 일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일을 다른 순서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양들을 치라. 그리고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 그리고 마음이 약한자들을 안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오는 대적에 대해서 주의하고 그들로부터 보호하라.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준비하라. 여러분의 인도자들이 항상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넘어진 자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일에 대해서 몇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범죄에 빠진 신자를 다시 회복시키는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대해서 두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범죄한 자가 회복되는것에 대해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자에 대해서 양을 찾기까지 찾아다닌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도 양을 찾는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어떤 한 형제가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는다면, 이라고 조건절로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그 양을 찾기까지 목자가 양을 찾아다니고, 형제가 실족한 일에 대해서는 '그 양을 찾는다면', 이라고 가정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임을 떠난 형제와 자매를 회복시키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양을 다루는데 있어서 두가지 말씀하신것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안식일에 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즉시로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소가 있어 안식일에 우물에 빠졌다면 웅덩이에서 소를 끄집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겠습니다.
다시한번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비난을 받습니다.
"너희에게 양이 있어 그것이 우물에 빠졌다면 그것을 끄집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두가지 비유에서 말씀하신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그 소를 여러분이 끄집어 낼수 있습니다. 그 양에 있어서는 그 양을 붇잡아 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많은 가르침 중에서 실족한 형제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맞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리를 두고 어떤 소를 끄집어 낼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을 들어올리려면 반드시 가깝게 다가가야 합니다.
목자의 어려움을 여기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목자는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역교회가 얼마나 가치있는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이 피로사신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포지역에서 세워진 이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댓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모임은 하나님께 굉장히 귀한 것입니다.
지역모임을 인도하는 장로들은 이 지역모임이 얼마나 하나님께 고귀한 것인지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는 그가 하는 목자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목자장이 있다는것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이 지역교회를 인도하는 목자들은 목자장 안에 있는 소목자라는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목자장에게 이 일을 보고해야 할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 세가지 다른 표현으로 목자라고 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우리 주님께 대하여 선한목자, 참된 목자라고 합니다. 거짓 목자와 대조되는것을 말씀합니다. 그분은 선한목자이기에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에서는 그분은 큰 목자로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제시 됩니다.
그리고 여기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분은 목자장으로서 모든 목자들앞에 오시는 분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가진 모든것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세가지 직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죄를 범할때에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로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목자장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유용하게 사용될수 있도록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것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공급하실수 없는 다른 영적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단락은 우리로 하여금 목자의 일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 많은 일이 포함되어 있고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감독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감독자들의 아내들은 감독을 위해서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다른성도를 방문할때, 감독의 일을 하게 될때 아내는 집에 혼자 남아있게 됩니다.
그리고 젊은 성도들을 집으로 초청하게 될때에 접대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말을 하고 교제를 나누게 될때 그의 아내는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잠자리에 들어가게 될때 아내는 여전히 남아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참으로 제가 감사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저보다 그런일을 한 저의 아내가 더 큰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방문해 주신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제가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저보다 제 아내가 그와같은 희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편과 아내는 그 일을 같이 동역해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스시를 접대받는동안 제 아내는 미국에서 피자를 먹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감독들의 아내가 지역모임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유용하게 사용될수 있도록 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여러분과 교제하는 동안 제 마음속에 한가지 유감인것은 제 지역모임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메일로,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수 있지만, 지금 지역모임의 성도들과 함께 있는것은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제 일정에 맞춰 그분들에게 다른 비상사태가 일어나고 안일어나지 않습니다. 양들을 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도자들이 필요할때, 만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이러한 희생에 대해서 감독들에게 어떠한 보상이 있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흥미로운것은 이 상급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휴거할때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영광 중에 오실때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다는것은 시간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 서신서에서 영광을 언급할때마다 항상 고난이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동일하게 목자들의 일은 많은 희생이 필요하고 그 고난 가운데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다는것을 말해줍니다.
5-7절에서는 지역모임의 양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역모임의 하나됨을 해칠수 있는것이 무엇인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이든, 모임을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상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여러 에너지와 활동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세상의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그러한 것을 생각합니다.
제가 25세 일때는 저희 지역모임안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제가 해결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온 미국에 있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70이 넘은 이때에 저는 해답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한번 그 인도력에 대해서 존경하고 그들의 인도를 따를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지역모임 안에서 내 위치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은사에 대해서 여러가지 감사를 표하십니다. 제가 이런일을 하고 있을때에 아무도 이런 감사를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이 일을 계속 하는데 있어서 많은 낙심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염려와 낙심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을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지역모임을 손상시킬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며 지역모임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특징의 첫번째가 5절의 겸손한 것입니다.
이것은 순복하는 것입니다. 단지 장로들에게 순복하는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복하는 마음일 뿐 아니라 서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요한복음 13장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식사하시는 중에 일어나셔서 허리를 동이시고 일하셨습니다.
타올로 허리를 동이고 노예가 하는일을 주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허리를 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11명의 제자들은 영원토록 그 일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발을 씻길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일들을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교만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볼때에 주님의 발을 씻긴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는 없었지만 한 여자가 주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우리는 그 여인의 이름을 모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와있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위대한 제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그일을 하지 못했지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여인은 그 일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며 이 말씀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서로 섬기십시오' 라고 하는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겸손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는 겸손한 마음의 위치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겸손한 마음이 어떻게 높아지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간에 이 겸손한 마음이 어떠한 상급을 받을지를 우리에게 말해줘야 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우리를 항상 낮추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겸손함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높아지게 하시는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세가지가 우리 자신을 겸손케 하는 동기가 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두번째로 제시 됩니다.
세번째로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제시됩니다. 7절은 참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맏겨버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이 이상을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를 권고하시니라>라는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경우 마르다와같이 말합니다. 그는 주님께 "주님 저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복음에 대해서 거절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돌아보시고 권고하신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이와같이 우리를 돌보지 못할것입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일을 다룰때에 우리는 진이 빠지고 권고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각자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 우리의 대적, 교활한 간계로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자를 제시 합니다.
대적의 이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대적이며 마귀이며 우는 사자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을 보게 될때, 그의 악함이 점점 증폭되어 묘사됩니다. 그는 대적으로서 우리를 대적합니다. 그는 마귀로서 거짓 송사합니다. 그리고 우는사자는 여러분을 삼켜버립니다.
여기 베드로가 묘사하는 사단의 기술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두루다닙니다.
믿는자들을 쓰러뜨릴 때까지 두루 찾으며 다니는 것입니다. 그의 공격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얼마나 간교합니까?
그는 분리를 일으키고 낙심케 합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를 대적할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믿음을 굳게하여 대적하는것은 지역모임의 연합된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맥상 사단은 지역모임을 파괴하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그는 첫번째로 인도자들을 공격합니다. 그들이 양들을 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돈을 위해서 그 일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자세로 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인도력에 구멍을 만들어 낸후에 그 구멍을 통해서 지역모임의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 양들 가운데 인도자들의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성도들을 분리해 냅니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지역모임의 성도들을 분리해 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이 사단이 지역모임 안으로 드렁오는 출입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맨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하지만 사단이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그렇게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단은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그들이 지역모임을 위해 드린 돈 가운데서 사단이 침입할 구멍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은사를 소유했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은사의 사용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린도교회를 말합니다.
알려진 은사들 중에서 교린도 교회가 소유하지 못한 은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 각자에게 많은 은사가 있었던 모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길로 가고자 하는 고집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송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구상에 가장 은사가 많았던 지역교회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강한자들이 약한자에 대해서 무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풍부한 복을 받았던 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두명의 자매가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초반에 사도바울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안에 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두 자매가 서로간에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두 자매의 분쟁이 지역모임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는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도 진리를 가지고 극단적인 이해를 하는것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들이 가진 위대한 진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우리가 일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사람들에게 얹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책망해야 했습니다.
사단은 그 진리를 극단적으로 끌고가고 그것을 이용해서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는 잘못된 거짓 교훈으로 공격합니다. 또한 서로간의 성격차이를 이용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심을 이용합니다.
지역교회를 공격하는 방법을 찾기까지 그는 멈추지 않을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것은 지역모임의 대적에게 그가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게 공격의 기회를 허용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있다면 욥기 1장을 보겠습니다. 욥기 1장에서 사단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행동한대로 상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와같은 축복을 받았기에 그와같은 섬긴다고 합니다. 그것을 다 빼앗으면 그는 더이상 하나님께 충성되지 않을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실패하자 사단은 다른방법을 시도합니다. 사단은 욥의 몸 자체를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지닐보다 각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유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단의 모든 생각은 그의 죄악된 본성에 더럽혀진 생각입니다.
사단은 사람이 모든것을 잃어버린다 할찌라도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할수 있다는것을 생각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오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같은 사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놀라게 될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게 되실때에 사단은 천년동안 결박되어 갖혀있게 됩니다.
그리고 천년후에 그가 잠시 풀려났을때 하나님을 잠시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마음에 믿을수 없는 일입니다. 천년동안 결박을 당하고 풀려나서도 그는 계속 그가 하는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해드릴수 있는 한가지는 이것입니다.
사단은 자기자신을 속이는데 있어서는 항상 그랬듯이 매우 유능합니다. 그는 진리를 제대로 볼수 없습니다. 참으로 사단이 하나님의 지역모임을 공격하는 대적으로 보여 집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상고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위안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한국어 성경에서 이것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여러분을 온전케 하고 강하게 하고 굳게 하고 터를 경고케 하신다는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실것을 약속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삶에 있어서 계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룬다는 보증을 여기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온전케 하신다>는것은 죄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온전한 것은 그물을 깁는, 모든것을 완성시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완성하실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통해서 금을 가지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잠깐 받는 고난'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잠깐과 영원한것, 그리고 고난과 영광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금을 얻으신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실것을 보장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는 것입니다.
터를 견고케 하신다는것은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게 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반을 견고케 하셨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라고 증거합니다.
이 은혜 가운데서 요동하지 않을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린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일에 있어서 내 스스로 해가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께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어떤 은혜가 필요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것을 공급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입니다.
이 서신서를 통해서 사도는 그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모든것을 이끌고 주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이 지역모임을 인도하게 합니다.
그 은혜가 서로를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때에 우리 염려를 모두 주께 맏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이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참된 은혜다라고 말하며 이 은혜위에 굳게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은혜가 마지막인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 대해서 세번에 거쳐서 기록되었습니다.
5절에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10절에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12절에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이고 우리가 이 은혜위에 굳게 설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11절에 그의 소영으로 이 서신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벧전5:11, 개역한글)
그는 은혜가운데서 이러한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각각의 송영에는 네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송영을 받는분이 계십니다. <그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그분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 영광과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과 관련된 시간이 여기 묘사 되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자로, 매일매일 이 은혜를 받는 자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 송영을 돌려드릴수 있습니다.
우리도 또한 동일하게 "영광과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여수룬 : "의로운 자", "올바른 자"란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명예롭게 일컫는 시적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