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히긴스 형제님

< 베드로전서 3장>

박이레 2021. 7. 21. 11:22

2018년 4월 28일 토요일

강사 : 히긴스 형제님

< 베드로전서 3장>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벧전3:1-2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읽은 이 말씀들을 통해서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난시간 저희들은 베드로전서 2장 말씀을 상고 하였습니다.
1장은 우리가 소유한 구원에 대해서 말씀 했습니다. 2장에서는 믿는자들의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3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순종과 우선순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서신서를 읽을때 그 배경에 대해서 마음속에 항상 두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이 서신서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직장과 학교, 이웃에서 모욕과 핍박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서신이 보내지고 있는 이유 입니다.
이제 3장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사람과 여러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가족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모임안의 교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대적들, 우리를 반대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2장에서 베드로는 순종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3장에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3장 초반부부터 그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것을 말씀 합니다.
그리고 남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것을 말씀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장이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것으로 끝납니다.
두번이상 이 장에서는 기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이러한 기도를 방해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우리의 기도를 돕는 것에 대해서 언급 합니다.
18절에서는 복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리 다섯가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침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참으로 3장에서 하나님께 무엇이 기쁨을 가져다 드리는지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선한> 입니다.

10절에 <선한 날을>, 11절에서는 <선을 행하고>, 13절에서는 <선을 행하면>, 16절과 21절에서 <선한 양심>, 16절에 <선행>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선이라는것이 이 장에서 언급 됩니다.

이런것을 볼때, 우리가 3장을 읽게 될때 우리가 어떤 것들을 주의해서 볼지를 말해 줍니다.
저는 이 장의 주요 단어가 15절에 나오는 것으로 여러분들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개역한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우리 주님을 거룩하게 하는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삼아 거룩하게 하는것은 모임에서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일입니다. 또한 이 일은 3장 마지막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3장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여지는것을 가정에서 다룹니다.
사도는 먼저 아내를 언급하고 그다음 남편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배경은 믿는 자매가 믿지않는 남편과 결혼한 것입니다.

7절은 믿는 남편이 믿지않는 아내와 결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결혼할 당시에는 둘다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 그들 중 한명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분명히 어떤 믿는자가 믿지 않는자와 결혼하는것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함께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와있는 그 아내는 결혼한 후에 나중에 구원받게 된 경우 입니다. 그의 남편은 불신론자 입니다. 그 가운데 아내가 어떻게 행해야 했겠습니까?

그 남편은 단지 구원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거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구원 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이제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믿는 아내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베드로는 상담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순복해야 할것을 말씀 했습니다.
순복이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특별히 서양 문화에서 순복이라는 것은 아주 나쁜인상을 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순복한다는 것은 내가 낮고 더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순복한다면 자신이 지적으로 더욱 열등한 존재라는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더 가치가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순복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구절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단어의 의미를 알고자 할때 그 단어가 성경 어디서 처음 사용되었는지를 보는것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최초언급의 법칙이라고 불립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 '순복'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을까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발견 할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와서야 이 단어를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이것을 말씀합니다.

52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라고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사렛에 내려 가셔서 그분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신 존재이신 주님께서 피조물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지혜를 소유하신 분께서 무지한 인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전능하신 그분께서 연약한 사람에게 순종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께서 가난한 두사람에게 순종하셨습니다.

2장 51절에 순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된 것을 볼때에 순종이라는 것이 열등하거나 더 떨어지기에 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적인 것과 능력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질서에 따른다는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아내에게 순복을 할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순복을 통해서 그는 남편에게 이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아내를 통해서 그 남편은 그의 두려워하고 정결한 행위를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매님들에게 남편을 돕는다는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문화에서 어떤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열등한 존재가 부차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 도움이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여러분이 살펴보신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 할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나의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와에게 도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던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에게도 도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도움이셨습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어떠한 도움이 되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모든 여정 가운데서 동행하셨습니다. 그들의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은 위로가 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필요 가운데서 그들의 모든것을 상담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낙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앞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주시고 남편이 인도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3절에서는 아내가 어떤것으로 그의 특징이 두드러져서는 안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외모를 바꿔서 남편을 바꾸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영적인 성품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마음의 숨은 사람> 그들의 내적인 성품을 그들이 합당하게 개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절에 아주 특징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나님 앞에 <극히> 값진 것이니라'

우리나라 성경에는 바로 '값진 것이니라' 라고 나오지만 영어 성경에는 '극히'라는 단어가 앞에 들어 갑니다.

우리는 1장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동일하게 사용된 '값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에 대해서 '택하신 보배로운 산돌'이라는 단어가 '값진'이라는 단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로운 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또 그 아들이 보배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성품을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여인에 대해서 값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여자들이 외모에 대해서 무신경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우리의 내적인 것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온유와 안정이 그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안정한 심령에 있는지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온유할수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유하다는 것은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든 입을 다물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하다고 하는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것이 무엇인지를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 마음속에 그것을 받아 들이는 평안한 마음입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가 하며 불평하지 않는 마음 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하신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원하여 받아 들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한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실례한 여러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일하게 남편에게 순복하였습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했습니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이것을 놀랍게 표현하십니다.
제가 왜 이것을 놀랍게 말씀드리냐면, 여러분이 사라의 생을 살펴보았을때 이것을 발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한것을 단 두번만 발견할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세명의 방문자가 왔습니다. 그 중에 한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자녀를 갖게 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90세가 되어서 어떻게 아들을 낳을 것인가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내 주인도 늙었거늘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오" 라고 말합니다.

그는 믿지 않는 가운데 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어찌 사라가 웃는가 라고 말씀합니다. 사라는 거짓말 하기를 "제가 웃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무슨일이 일어났나요?

사라는 불신앙으로 특징된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 가운데 성령님께서는 사라가 잘못한 일을 언급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령님께서는 그녀를 칭찬할만한 한가지 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칭하고 순복한 것을 성령님께서는 칭찬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이것은 실패한 기간이다.' 라고 생각할찌라도 성령님께서는 칭찬할만한 일을 발견하시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말씀의 원리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성도들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오직 구약성도들의 잘한 일만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실수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실수 가운데서 자꾸 그것을 반복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한가지 예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요나가 우리 주님에 대한 예로 사용된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도망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배로부터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큰 물고기에게 먹힌것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에 대해 말한다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실수를 할수 있는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자신께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의 예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앞에 찬송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칭한것을 성령께서 칭찬하시는것을 다시한번 보게 됩니다.

이제 남편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7절의 이 남편은 믿지 않는 아내를 둔 남편이라고 미리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다시한번 동일한 상황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결혼할때는 둘다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 후에 남편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 남편은 하나님께서 아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남편은 동거하여 아내를 귀히 여깁니다.
참으로 그 아내가 믿지 않는다 할찌라도 믿는 남편으로서 해야 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그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그 사랑은 그 아내에게 사랑과 안정과 보호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의 아내를 귀히 여기라>

이것은 아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우를 그 아내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더 연약한 그룻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하거나 지식적으로 연약한 것을 이야기 하는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말하는것도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도 아내가 육체적으로 강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순복하는 위치에 있을때에 그 행동으로 인해 아내는 남편에게 많은 상처를 받을수 있는 위치에 놓여지게 됩니다.
순복의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도하도록 자신을 양도합니다. 남편은 그 권리를 남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그러한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아담이 너를 다스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인도하는 특권 가운데서 그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아내에 대해서 함부로 대한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게 될 것입니다.

여기 기도가 막히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아내는 믿는 믿음에 대해서 더욱 거부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남편을 징계하시는 일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남편은 항상 믿는 믿음의 도에 대해서 간증을 잘 나타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이러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3장이고 마태복음 6장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러한 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일한 삶을 사는것이 기도응답의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또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렇다고 내가 경건한 삶을 사는것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라고 강요 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것은 이러한 기도응답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여러 장애물들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또한 모임 안에서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8-9절은 믿는 성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 관계에 있어서 다섯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다섯가지가 중요한 이유는 다섯가지 중의 네가지가 다른성경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교제는 마음을 같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휼하는, 동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고 다른사람의 필요에 대해서 민감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빠르게 살피겠습니다.

여기 마음을 같이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이 어떤일에 항상 동의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한가지 것에 대해서는 항상 동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주되심 앞에 마음을 항상 꿇는데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예언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구절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모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마음을 같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될때,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서로 협력하라>

예배와 관련해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모임에 있어서 이와같은 일을 할때 우리는 한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체휼하는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딱딱한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항상 비판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딱딱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서로 체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어려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기 보다는 그것을 격려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거짓없이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형제사랑이 너희에게 분명히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불쌍히 여기며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모임안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다른 성도들을 위한 세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다른 성도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울 책임이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다른성도의 필요를 보고도 막으면 여찌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안에 있을쏘냐 라고 반문 합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의 물질적인 필요를 볼때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그것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 영적인 책임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나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더 강건해져야 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만나고 난 후에 그 성도님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더 약해 졌습니까? 아니면 더 강건해 졌습니까?

우리는 9절에서 악을 말하지 말고 복을 빌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지역모임이 여러분이 있음으로 인해서 더 좋아지고 복을 받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있는 기준은 굉장히 높은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저에 대한 기준은 이것입니다. 저와 접촉하는, 저와 관계된 모든 성도님들이 저로 말미암아 좋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모두는 다른 성도들의 영적인 복지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뻐하는 자들과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 했습니다.

세번째로 다른 성도들의 감정적인 것에 대해서도 저는 민감하게 반응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슬픔 가운데 있을때 민감하게 그들을 위로해 줄수있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그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7일동안은 아주 잘 행동 했습니다. 그런데 그 7일 후에는 문제가 발생 했습니다. 문제의 발생 이유는 그들이 입을 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욥과 함께 앉아 있을때 욥을 참으로 위로해 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모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옆에 있어주는 것만이 여러분이 줄수 있는 가장 좋은 위로가 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다른 성도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그들의 감정적인 필요에 민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덕의 마지막으로서 겸손할 것을 말씀 합니다.
여러분이 겸손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빌립보서 2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겸손하게 되는데 있어서 외적인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실수로 말미암아 겸손하게 됩니다. 때때로는 우리가 말한것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때 그런것으로 인해서 겸손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떠한 약점도 없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조금의 죄와 실수가 없었습니다. 부적절한것이 전혀 없으셨던 분인 것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외적인 모든 것들이 주님께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원해서 겸손하게 되셨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겸손하게 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단지 내가 저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는 것은 나의 복지보다 다른사람의 복지를 우선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12:10, 개역한글)

다른사람을 나보다 먼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어떤 한 지역모임에서 서로가 자신의 이익보다 성도에게 먼저 준다면 그것은 놀라운 모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에 시편 34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실패 했을때의 시 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골리앗이 나왔던 블레셋 땅으로 도망쳐간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미친 사람인척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가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34편에서 이제 선한 날을 보기 원하는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사람은 그 혀를 악에서 금할 것을 말씀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입술이 궤휼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궤휼이라는 것은 선한것인 것처럼 조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말고 선을 좇으라고 합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고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말합니다.

이 장에서 기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의로운 삶과 지역모임의 조화로운 삶이 기도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나오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지역모임에 힘이 되겠습니까?

시간상 17절부터 마지막 구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7절에서는 여러분이 이와같은 삶을 살때에 어떤것도 해내지 못한다는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참으로 복있는 자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가정을 떠나 고향을 떠나 그의 대적들과 함께 있는 상황입니다.
그 가운데서 너희들이 이웃과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복주신다. 그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라>

<너희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베드로는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자신이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것에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세번이나 질문 받았을 때, 적절하게 대답하는것을 예비하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한 실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여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라> 그리고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15절에 나온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주제 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와서는 주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목회서신이라고 하는 디모데전서 디도서를 보시겠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경건하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을때 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가 뭔가 잘못했을때 하나님께서 벌주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제가 무언가를 잘못했을때 하나님께서 벌주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 안좋은 일을 하실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실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했는가를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때 그것이 영원토록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걱정스럽게 하는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경배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해야 하는 필요성, 그리고 우리 마음에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숨은사람을 먼저 단장하는것이 중요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순위에 둬야 할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것의 우선순위를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 비방합니다.
다른 사람이 비방하는 것이 실제로는 거짓이기에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선행을 할때,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되며 그리고 거짓 비방하는 자들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진대> 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우리가 고난받는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항상 부당하게 고난을 받게 됩니다. 다른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상사와 술을 마시기에 더욱 좋은 승진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 승진에서 여러분은 계속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자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다른 장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18절에서는 이와같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은 한분을 말씀 합니다. 이분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불의한 자들을 의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8절에서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가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고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인을 위하여 죽으사> 이것은 한번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것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더할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은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화목제물의 놀라운 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실수 있는 완벽한 근거를 마련하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죽음의 최종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화목제사의 온전함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속죄물의 교리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대속물로서 주님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목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심이라>
이것은 단지 우리가 세상을 떠날때에 하늘나라로 데려가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각 믿는 자들은 믿는 순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화목케 되는것, 화평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친구로서 교제하기를 바란다는 말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적이 아니라 교제할 수 있는 친구가 되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제물로서 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번의 영원한 제사를 보았습니다. 그 화목제사의 충분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대속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화목케하신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부활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 그분은 실제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참으로 이것은 위대한 복음의 진리 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성도들에게 다시한번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불의한 자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받고 있는 고난 이상의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제 다른 구절을 보기전에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22절에서 그분은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사도가 연결해서 말하고 있는 생각들의 연속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겸손하게 낮아지신 그분 앞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이 그분 앞에 순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진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2장 중반부 부터 시작해서 베드로는 순종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다시한번 우리에게 이것을 상기 시킵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종하신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것으로 인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와같은 순종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획하고 주실 모든것을 다 주시고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 계획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장애를 받지 않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삶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열명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간수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술관원이 요셉을 잊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신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진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순종하도록 두신 상황 속에서 여러분이 순종할때 그것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남은 시간동안 19-21절까지 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구절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이것을 해석, 주석하는 책을 볼때에 이것에 대해서 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 믿고있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또한 다르게 이해하고 계신다 해도 이 어려운 구절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제기되고 있는 여러 의문점에 대해서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여기 영이라고 하는것은 성령님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또한 언제 그분이 가서 전파 하셨을까요?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전파하셨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나의 영이 항상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리라> 말씀하시는것을 보게 됩니다.

홍수가 일어나기 120년 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있는 영이 성령님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시대때에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옥에 있는 영들이 옥에 있을때에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살아있을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노아의 날 방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침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방주가 심판의 장소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는것이 침례의 그림으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물은 지구를 심판하고 멸망시키지만 방주를 또한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고 있는 것입니다.
방주는 썩어질 땅을 떠나 안전한 곳에 안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례는 이와 매우 유사합니다.

여러분이 침례를 할때에 세상의 옛 일에 대해서 그것이 죄였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새로운 것으로 행하게 됩니다. 이제 이 침례에서 성도들이 고백한 대로 살게끔 만드는 것이 침례의 의미가 됩니다.

'침례는 육체의 더러운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침례는 순종의 표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만일 이 가운데 믿었지만 침례를 아직 받지 않은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할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서 "저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명하셨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우리에게 그 침례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장에서 이 침례가 주님의 명령임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은 이 침례가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것임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 침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침례시에 고백했던 고백대로 살아야 할것을 이 침례가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종류의 삶을 살것이다."
"이제 나는 아내로서(or 남편으로서) 새로운 종류의 삶을 살것이다."
"이제 나는 지역모임에서 새로운 신자로서의 삶을 살것이다."
"나는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것이다." 라는 것을 침례를 통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장은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주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하늘에서 주님이신 바로 그분께서는 우리 가정에서도 주님이셔야 합니다. 또한 그분은 이 집합, 모임 장소에서도 주님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서도 주인이셔야 합니다.

참으로 이 장이 가르치고 있는 실제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행하게 되기를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