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_니고데모 >
2017년 7월 26일 수요일 <플러싱 수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복음말씀_니고데모 >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1-8, 개역한글)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1-19, 개역한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것을 증거하기 위해 쓰여져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 달려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고 과연 복음서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신것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그렇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은 사람들의 간증이 나와 있습니다. 한사람만 예를 들겠습니다. 침례요한입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은 아담으로부터 마지막으로 태어날 인간까지의 모든 세상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여러가지로 쓰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하나님이 없는 체계를 세상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라는 것읏은 세상은 세상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침례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맨처음 지음받은 아담으로부터 맨 마지막 사람의 죄를 한몸에 지고 가신, 이것이 속죄일의 어린양입니다. 그가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제시하고 3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것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잠시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2장을 보시겠습니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요2:23-25, 개역한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두번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아십니다. 내가 아무말을 안했어도, 예수님을 나로써는 처음만났어도 예수님은 나를 아십니다. 1장에도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 간사한 것이 없도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때에 내가 너를 보앗노라"
나다나엘은 혹시 자기에 대해서 예수님께 누군가가 소개해주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소개도 받지 않고 나다나엘을 아십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때 내가 너를 보았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아십니다. 나에 대해서 소개받지 않고 나를 아시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두번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고 그속에 있는것을 아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제 나오는 니고데모 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율법사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께 나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기적을 부인할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이 기적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그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는 읽을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께 찾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께부터 오신 선생님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에는 항상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신분은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위대한 사대 성인 이상의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 기적을 당신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3:2-3, 개역한글)
제가 처음 구원받고 성경을 읽었을 때 이 구절이 항상 걸렸습니다. 2절은 서술문입니다. 의문문이 아닙니다.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대답이 나오려면 보통 질문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서술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서술문으로 말했을찌라도 니고데모는 마음속으로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노골적으로 하지 못하고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예수님께로 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부터 오신 선생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을 듣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을 읽으시고 대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으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생각을 알수 없습니다. 내가 속으로는 이런생각을 하던지, 어떤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내가 겉으로 웃고 좋은말을 해주면 그사람은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좋아하는데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아닌척 합니다. 사람은 말로 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런데 말을 했어도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생각을 읽으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제시합니다. 그분의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사람에게서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증거, 두번째는 요한복음 3장에 들어와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수 있는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구원은 죄인이 그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것이 구원입니다. 천국에서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거할수 있는것입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을 깔겠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신 분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를 차마 보실수 없는 분입니다. 죄를 용납하실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 면전에 죄가 들어올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죄가 있으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려는 사람은 먼저 그 죄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살자가 없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보았다면 말이 안맞는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그가 본 하나님이 정말로 성경의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는 죽어야 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나타나십시오 내가 믿겠습니다." 그는 자기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안맞는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죄인이 가까이 갈수없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까이 갈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유대인도 죄인이고 이방인도 죄인입니다. 유대인이 죄인인것은 율법을 주었지만 지킬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죄인인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양심을 주었지만 양심이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작동하지 않지요? 죄에 대해서 양심이 둔감해졌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주셔서,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죄인인것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갈고 합니다. 이 사람을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우리는 육체적으로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해부해도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산사람에게 칼을 대면 아픕니다. 죽은자는 감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전해져도 감각이 없습니다. 이해도 되지 않고 골수는 커녕 머리속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죽은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면 이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 가운데서 지옥으로 가는것을 볼수 없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실때,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죄인라는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그럼 이사람을 어떻게 구원으로 인도 할수 있을까요?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을 통해서 주어진 놀라운 진리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낸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저희들이 한국에 살지만, 미국을 방문한 성도님들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미국에서 살고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간곳이 영국입니다. 두번째로 갔던곳이 케나다 입니다. 영국에 갔을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케나다를 방문했을때는 '여기서 살고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여기가 좋아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그것이 유대인들의 소망입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공평과 의로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갈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로 치면 구원받는것이고 천국에 가는것이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바리세인이며 율법사이며 말씀대로 산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압니다. 그는 율법을 잘압니다. 그 앞에 영어 성경으로는 the가 붙어 있습니다. 유일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대해서 의문이 나면 니고데모에게 가서 물어봤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들어가야한다. 그가 아니면 누가 들어가겠는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내적인 확신이 없었습니다.
겉으로야 행동을 잘하고 가끔은 이렇게 했는데 내가 못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기가 고요한 밤 홀로 있을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생각해 볼때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 자신이 없을까요? 그가 외적으로 행동에서 온전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선생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 확신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지 물으러 온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읽고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더해야 하는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자기가 '혹시 빠트린것이 있지 않을까?' 한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가 할것이 없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 전할때 예화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죄에 대해서 놓여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될수 있을가요?" 전도자는 대답합니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뭘하기에는 다 끝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것이 부족하다.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으로 난것은 육이니> 무엇을 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네가 추구했던 방향과 다르며, 너의 생각하는 방법으로 구원받는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를 보시겠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여러가지가 있지만 두가지를 말하면 기본적으로 씻거나 깨끗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두번째는 마시는 기능입니다.
성경에서 물이 나오면 이것이 어느 기능을 말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여기서는 깨끗하게 씻는것입니다. 죄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것입니다. "네가 너의 죄를 깨끗하게 할수 없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물은, 그의 겉을 깨끗하게 하는것이 아니고 그의 속을 깨끗하게 하는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실행할수 있기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속에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은 육이다. 네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 네 행동을 깨끗하게 하시는것이 아니고 너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람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바람은 쉽게 측정이 안됩니다. 니고데모가 구약성경을 알고 지식인입니다. 상징과 비유들을 잘 해석해 낼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는 것이다>
바람이 마음대로 붑니다. 내뜻과 관계없이 붑니다.
구원받는것은 네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해야 하고 구원하셔야 한다.
사람이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같이하셔야 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압니다. 구원은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떤분이 그런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마에 표시가 나서 구원받은자와 안받은자가 표시가 나면 좋겠지만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사람과 안받은 사람이 표시가 안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영적인 교회에서 영적인 장로들이 구원받았음을 분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외적이 아닌 영적으로 분별되는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설명하신 구원의 근거를 십자가에서 이루실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시며 그 구원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말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 아니고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이 나오면 그는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타깝게도 요한복음 3장에서 그러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요한복음 19장에서 그가 그와같은 대답을 행동으로 보이고 있음을 알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와같은 설명을 듣고도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을 읽어내는 하나님,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구원을 알려주시고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듣고도 그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때, 11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3:11, 개역한글)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1절은 진단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증거를 제시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3절, 주님께서는 이 불신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3:13, 개역한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땅 가운데 가지고 온 사람이다. 사람이며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 하는 구원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베푸실지를 창세전부터 알고 예수님께서 온 분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3:14, 개역한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모세가 기도합니다. 그랬을때 하나님께서 제시합니다. 뱀과 똑같은 모양을 놋으로 만들고 장대에 매달으셨습니다. 그리고 보는자마다 살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면 알약을 하나 주시면서 '해독제이다 먹어라'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이 아프지만 물린데를 잘라내라 해도 순종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요구를 하십니다.
장대를 세워 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본다고 어떻게 낫습니까?" 하고 안보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나요?
자기가 죽을 상황에 처해있다는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죄인인줄 알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죽는다는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치유됩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치유 방법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게 왜 치유가 되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한다." 내가 이해되지 않고 그것이 그럴것 같지 않지만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에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칙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개역한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문맥을따라 해석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지금까지 살게 하신 나의 아버지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죄로말미암아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것을 아시고 독생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해서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믿어야 하는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누구시며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믿는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고 17절,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라> 구원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나옵니다.
더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해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나옵니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8-19, 개역한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이유입니다. 믿지 않는사람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단하십니다. 그들이 어둠을 사랑해서 빛으로 오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더 사랑하여 빛을 꺼버리고 싶은것입니다. 빛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죄를 용납하실수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갈수 없습니다. 이와같은 진리의 빛을 따라 행동하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빛가운데로 나간다. 나는 이 어둠이 싫다." 복된 영혼들이며 하나님이 부르신 영혼들입니다.
하나만 더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지금가지는 믿음에 대해서 설명 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회개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7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3:3-14, 개역한글)
동전의 양면입니다만, 믿음과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없이 믿음이 주어지지않고 믿음없이 회개할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했습니다.
회개를 대표적으로 전한 사람이 침례요한입니다. 그가 죄사함을 얻는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있습니다.
서양에 와서 보니, 어떤 도로가운데 '킹스웨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마음에 감사가 됬습니다. 왕이 오는 길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영접다한다'라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말한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시려면 예수님은 왕이 아니고서는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인정될때만 들어가십니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려면 골짜기가 메워져야 하고 험한산은 낮아지고 굽은것은 곧아지고 험한길은 평탄해져야 합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보겠습니다. 골짜기는 숨은죄입니다. 숨은죄가 있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다른사람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죄가 있습니다. 그 죄가 자백되어야 합니다.
두번째, 높은산입니다. 교만한것입니다. 이기적으로 살은 것입니다. 자기생각 자기 고집, 이런 높아진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근대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웠습니다. 이 과학으로 인해서 달나라를 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베드로가 어떻게 물위를 걷는가? 성경을 못 믿겠다 하고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물위를 못걷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가능합니다. 물을 창조하신 분이 물위를 어찌 못걷겠습니까? 물을 창조하시고 베드로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베드로를 물위에 띄운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골짜기가 높아지고 산이 낮아져야 합니다.
세번째 굽은길이 펴져야 합니다. 내가 왜곡시킨것이 있습니다. 내가 핑계를 댑니다. "나중에 믿을게요. 조금 더 감동이 되면 믿을게요. 이해하고 믿어야지요" 라고 합니다.
네번째 험한길입니다. 이제는 변명뿐만이 아니고 세상을 살면서 좋아하는것을, 예수님을 믿으면 못할까봐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하나님 앞에 자백되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꼐서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길이 평탄해지고 주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7절에 보시면 <장차 올 진로를 피하라 하더냐>
첫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무서워할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지옥을 마련하신 분입니다.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 자리를 벗어난 천사들을 위해서 만든곳이 지목입니다.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않습니다. 그곳은 불속이지만 캄캄한 곳입니다. 그 영원한 운명에서 빠져나올길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 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기에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것 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3:8, 개역한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혈통을 의지하면 안됩니다.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제 아내가 잘 믿는데요. 저는 아내 치마자락 붙들고 천국가렵니다." 이 말을 들으면 변명을 하는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우리 할아버지가 교회를 네개나 세웠다"라고 합니다만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혈통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 다음, 침례의식에 대해서 책망합니다. 침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침례요한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침례라는 의식이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는 말라있는 죄인을 젖은 죄인으로 만들뿐입니다. 종교의식은 구원받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종교와 참 믿음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만찬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가 참 교회인데 내가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는가, 왜 그동안 많은 교회는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분은 구원받고 나서 다니던 목사에게 분노하고 "그럴수 있는가?"라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종교 의식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종교의식과 살아있는 참 행동과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변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침례요한은 보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옷 두벌있는자는 나누어 주는것입니다. 세리들도 과거에는 돈을 벌기위해서 많은것을 착취했을찌라도 이제는 정해진것만 받는것입니다. 그 당시 군인들은 권력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화된 삶을 사는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듯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것입니다. 그리고 혈통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종교의식도 부인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내안에 주어진 생명을 따라 변화된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참된 확신과 기쁨과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같은 은혜의 역사를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