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장승훈 형제님(요약)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박이레 2024. 6. 23. 12:37

<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 24년 6월 23일 일요일(요약2) / 장승훈 형제님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막4:35-41, 개역한글)

마가복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주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1:1, 개역한글)

"하나님의 종"이라고 적혀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적혀 있습니다. 제가 종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제하지만,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장부터 예수님께서는 병든자들을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들을 하십니다. 4장 1절부터 보면 씨부리는 비유에 대해서 나오는데요. 이는 전에 전한 내용이기 때문에 건너 뛴 것이고요.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막4:1, 개역한글)

주님께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위에 올라서 씨 뿌리는 비유를 전하신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35절로 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마가복음을 말씀을 제가 드렸는데요. 주님이 미쳤다해서 주님의 육신의 가족이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누가 진짜 가족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날 저물때에 주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계속 말씀하지 않으시고 왜 건너가자고 하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지식만으로 머리가 채워지기보다 저희가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희가 성도집회때 들은 말씀을 다 소화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막4:36, 개역한글)

주님은 계속 배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일정을 마치시고 배 위에서 이동해 갑니다. 그리고 다른 배들도 함께 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막4:37, 개역한글)

주님이 함께하고 있는 배인데 광풍이 불어서 물이 들어와서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주님을 섬기고 있으니까 저희들은 만사형통이고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것으로 성도들의 삶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자연에 대해서 어떠한 능력을 가지신 분인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막4:39, 개역한글)

누가 바다에 대해서, 바람에 대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다와 바람을 지으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자연이 즉각적으로 주님께 순종합니다.
5장에는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이 부분도 제가 전에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주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또한 5장 25절 이하에 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이는 육체적인 세계에 대한 주님의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의 힘에 대한 주님의 능력이 나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네가지 연속적인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종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주님께서 배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나서 바다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입니다. 그들은 바다에 배태랑입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죽을까 두려워 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막4:38, 개역한글)

이 부분이 신약에서 주님께서 유일하게 주무시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주님을 깨웠습니까? 풍랑이 주님을 깨웠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없는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을 위해서 일어나셨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자 주님께서 즉각적으로 바람과 바다보고 잠잠하라 하시고 자연은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십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신 것이라는 것을 이 부분을 알게 됩니다.

저희들이 삶에서 어려움을 겪을때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직 내 문제에만 골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왜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가, 하고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주님을 깨운것과 다름없는 행동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지를 보이십니다. 자연을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40절에 또 여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합니다.

41절에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40절에 "이렇게 무서워하느냐"와는 다른 것입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41절에 나와있는 두려움을 가져가야 합니다.
저희들에게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첫번째로 생각해 볼수 있는것은 육체적으로 병이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에 대해서 저희들은 마음이 약해졌을때 주님꼐서 왜 나를 돕지 않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그 배 안에 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아뢸때에 주님께서 어떠하신 분인가를 나타내보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저희가 어려움을 토로하는 자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떠하신 분인지를 알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주님께서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심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저희들은 구원받을 때에 저희들의 죄가 다 용서된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만큼은 저희들이 극복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삶 가운데서 믿음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개역한글)

이와같은 마음을 갖는것이 저희들의 믿음입니다. 저희들이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 빠지는데, 그때 그 사람의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돕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내 생각대로 산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주님께서는 폭풍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육체적인 질병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믿음을 한단계, 한단계씩 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저희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성장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