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소견'과 '하나님의 보시기에'
< '자기의 소견'과 '하나님의 보시기에' > 강성찬 형제님
사사기 마지막 장 21장 마지막 25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 구절은 사사기 시대를 특징적으로 요약해 주고 있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그래서 사람이 이제 각각 자기 소견에, 자기 생각에 이게 옳아, 그런 데로 이제 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이 시간에 이제 이러한 것이 이제 특징적으로 나타나 있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이제 보고자 합니다.
여기 사사기 후반부에 17장부터 기록되어 있는 이 세 가지 사건인데요. 이제 모두 이제 그러한 사건들과 관련돼서 이 같은 비슷한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왕이 없었다. 사람들이 각각 자기 생각이 옳은 대로 행하였다. 제가 이제 왜 이런 사건을 살펴보고자 하냐면, 이제 사실 이 세 가지 사건들 모두 읽어보면 '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는 일들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탈락한, 잘못하고 있는 그러한 일들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제 그러한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자기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주 당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제 생각해 보길 원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도 그러고 있지는 않은가? 왜냐하면, 이게 정말 무서운 게 뭐냐면, 잘못한 일을 할 수 있죠. 실수하고, 그런데 이제 문제는 잘못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았을 때, 정말 최악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왜 그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가? 이제 이걸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제 첫 번째 이제 17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7장은 1절부터 6절까지를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17:1-6).
여기도 이제 "그때 이스라엘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우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 우상을 어떻게 만들게 되냐면, 이제 에브라임 산지에 어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제 그 사람이 어머니의 돈을 훔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자신의 돈이 도난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제 화를 내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이 돈 훔쳐간 놈 어디서 그냥 확 죽어버려라!" 자기 아들인지 모르고 말한 거죠. 그런데 아들이 그 어머니의 저주하는 말을 듣고 무서워서 "그거 사실 저예요."라고 말한 겁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그것을 다시 어머니께 돌려드립니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그 아들이 저주 말고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한다. 자기 아들이 저주를 받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니야. 내 아들은 복을 받길 원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돌려받은 돈으로 우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을 하면서 이제 하나님이 만들지 말라고 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한 레위인을 불러서 돈을 줄 테니 여기서 제사장 노릇을 해라. 그리고 제사장을 삼아서 자기 집 전용 제사장과 그 신당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로 이제 종교적인 영역에서 이제 이러한 문제가 생깁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이제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와 있는 사람들, 그 돈을 훔친 아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모두 이것이 잘못된 일인지 모릅니다. 우상을 만들면서도 잘못된 일인지 모르고 오히려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한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용된 레위인도 자기가 이제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서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일을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장 1절에도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 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삿 18:1).
두 번째는 이제 '기업'과 관련된 것, 이제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영역입니다. 이제 그런 영역에서도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도 이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서 여기가 너희들 땅이다라고 정해준 구역이 있었습니다. 단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이만큼이 너희가 하나님께 받은, 너희가 계속 여기서 이 땅을 지키고 살아야 된다라고 하신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땅에 딱 와보니까, 그 땅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 가나안 족속들이 거기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내보내고, 그들과 싸워가지고 이겨서 그들을 내보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너희가 받을 땅이다.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이고 너희가 차지해야 되는 땅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워서 이 땅을 소유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인데, 여기 와보니까 그 땅에 이미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세 보이는 거예요. 자기보다 싸움을 잘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싸우지 못하겠고, "아, 여긴 좀 어려운데..." 하면서 다른 땅을 얻으려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자기 온 가족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삿 18:2).
그리고 이제 쭉 지나가서 7절에 보면,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 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와서 그 형제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 보기에 어떠하더뇨 가로되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삿 18:7-10).
이제 이들은 돌아다니다 보니까, 좀 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땅을 차지하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땅이다." 거짓말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아주 당당하게 그 땅을 차지하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도 전혀 엉뚱한 것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과는 아주 반대 것을 하고 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것을 이제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이제 19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달의 날을 보내매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삿 19:1-3).
여기서도 이제 19장 1절에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왕이 없을 그때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한 레위사람이 자신의 첩을 취하고, 그런데 그 첩이 다른 남자와 행음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첩을 다시 데려오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개인적인 영역', 자신의 이제 육신적인 정욕, 그리고 이제 가정의 영역, 이제 그것 가운데 어떠한 문제가 생겼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자신의 이제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자신의 개인 생활에 있어서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여기 19장에 실제 일어난 일들을 쭉 읽어보면, 얼마나 엉망이 되어버렸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걸 다 읽지는 않고 이제 한 부분만 읽자면, 이제 그 레위인이 도망간 자신의 첩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삿 19:22).
그 레위인과 그 첩이 돌아오는 길에 묵었던 집에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레위인을 끌어내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강간하려고 그를 끌어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하나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삿 19:23-30).
이제 동네 사람들이 이제 와 그를 강간하려고 하자 그는 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첩을 밖에다가 던져줍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그 첩을 강간하고 그 첩은 죽게 됩니다. 그 남편은 이제 분노하면서 그 첩의 시체를 12덩이로 찍어서 잘라서 이스라엘의 각 사방에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읽을 때에 참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런 일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면서도, 이러한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그 심각함을,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타락했음을,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제 이 표현대로 이제 "그 소견에 옳은 대로" 그러니까, 자기 눈에 옳은 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옳은 대로니까는 자기가 생각할 때는 자기가 지금 잘 행동하고 있는 것이죠.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소견에 옳은 대로" 이런 표현들이 몇 군데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몇 군데 나와 있는 표현을 함께 이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출애굽기 15장입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여기 26절 앞부분에 보면은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이게 이제 앞에 우리가 읽었던 표현하고 비슷한 건데, 사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앞에는 "각자 소견에" 각자 보기에 의를 행하고였고요. 여기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를 행하고"입니다. "나 보기에 의를 행하며" 입니다. 여기에 이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를 행하라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시자마자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 출애굽기 15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그 홍해를 건너자마자, 그 바로 다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소견에 의를 행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습성이 있는 걸 아시고 미리 이렇게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되냐?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이게 먼저 있습니다. 그러니까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된다. 우리가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잘못을 하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아주 당당하게 잘못을 행하고 있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된다. 그래서 여기서 그게 이제 반복해서 나와 있습니다.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다." "잘 듣고 있는데요." 사실 여기 이제 사사기에 나와 있는 잘못한 사건들의 주인공들도 다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있어요." 사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들을 자주 언급합니다.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하노라." "이건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분노하면서 이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이제 그런 것으로 그들은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다라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 이 26절의 배경이 되는 것을 한번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언제 하셨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나와가지고 이제 광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이 이제 첫 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출 15:22-26).
이제 홍해를 건넌 다음에, 이들은 이제 광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수르 광야에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 사흘길이라는 이 말씀을 보게 될 때에 이제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다. 이게 이제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것이고, 이제 구원하신 그런 목적입니다. 잠깐 3장 18절 가서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출 3:18).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이 구원받고 나서, 이제 사흘길 가서, 이제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그것을 이제 따라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했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이제 출애굽기 15장으로 가서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에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22절에 보면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물은 없고, 그리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물은 썼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행하고자 했을 때에, 어려움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쓴 것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때 어떻게 하냐, 입니다. 그때 조금 그 말씀을 바꿔가지고 다른 것을 취할 것이냐, 아니면 계속해서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행할 것이냐, 이제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단 지파가 겪은 문제가 그것입니다. 단 지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말씀대로 하려고 했을 때에 어려움이 있자 그들은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야, 여기는 어려운 사람들 있잖아. 우리가 싸우기 힘든 사람들이 있잖아. 좀 더 쉬운 상대를 찾아보자." 그래서 조금 다른 곳으로 가서 이제 거기서 기업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청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제 그 순간에, 그 물이 없는 그 순간에 어떻게 하냐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출 15:25).
그때 이제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넣었더니 물이 달아진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상징적으로 이렇게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나무라고 돼 있는 것은, 성경에서 나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십자가가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특히 이 나무는 우리 주님께서 낮아지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할 때, 사흘 하다 보면, '이거 좀 어려운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거 못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좀 쓴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냐면, 우리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셨는가? 그분의 낮아지심, 겸손하심,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심, 죽기까지 순종하심,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기억할 때에 그 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물이였지만, 똑같은 말씀이었지만, 그 말씀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저절로 단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은 정말 쓴 게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것을 하려고 했을 때 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 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우리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그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행하기를 기뻐하고,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그 말씀이 달아지고 그리고 그것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제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게 듣는 것입니다.
그냥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래 하나님 말씀은 그런 거구나. 이게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려고 하고, 그때 어려움을 느껴보고, 그리고 그때 하나님을 의지해서 썼던 말씀이 달아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 사람이 정말로 말씀을 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소견대로 옳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 지파처럼 조금 어려우면 바로 다른 길로 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제 다른 곳에, 이제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또는 이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표현을 표현이 나온 부분을 두 번째 부분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12장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찌니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찌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찌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8-12).
여기서 신명기에서도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기서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는 "너희가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그냥 너희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하였지만, 너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그 땅에 들어가서는 거기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땅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앞부분을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12장 5절, 여기서 이제 비슷한 말씀이 있는데요.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왜냐하면 거기서는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라는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 "그 거하실 곳" 그분의 거하실 곳, 여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거기서는 너희가 너희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한 곳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이 처음에는 실로가 됩니다. 실로라는 지명 이름입니다. 실로라는 곳이 되고 나중에는 이제 예루살렘이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딱 한 곳만 정해놓으시고 이제 거기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앞에 1절부터 잠깐 보면, 이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1-5).
이방 사람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그들은 이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적당한 장소에 우상을 놔두고 신당을 만들고 거기서 우상을 예배를 드립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우상을 다 멸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제 너희들은 그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아무 데서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딱 한 군데를 정해놓으시고 이제 거기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자기 소견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사기에서 읽었던 그 세 가지 사건들이 일어난 곳을 보면, 실로하고 가까운 곳에서 다 일어납니다. 에브라임 산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 거기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 실로와 가까운 곳입니다. 걸어서도 금방 갈 수 있는 이제 그러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딴 곳에 하나님을 예배드린다는 곳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제 17장에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만든 곳이 실로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기 집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단 지파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찾으러 갈 때에 그 미가의 집을 거쳐서 가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실로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가면 실로인데 거기 이제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데, 거기에 가지 않고 굳이 그 미가의 집에 가서 그 우상이 있는 곳에 가서 우리가 지금 새로운 땅을 찾으러 가는데 이게 잘 될까요?
물어보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자기의 첩을 찾으러 간 그 사람이 살던 데도 실로에서 멀지 않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도 이제 하나님의 집을, 그 실로를 말로만 언급하긴 합니다. 자기가 그 하나님의 집에 관련된 사람이라고, 자기를 좋게 보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그때만 잠깐 언급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 가서 묻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딱 한 곳을 정하시고, 그리고 그 곳에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가 항상 행하도록, 그리고 바로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롭게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제 두 번째로 이렇게 교훈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가깝게, 정말 생생하게 실제적으로 의식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 미가처럼, 그 레위인처럼, 단 지파처럼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조심해서, 그분이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그분 소견에 옳은 대로 우리는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도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곳에서는, 우리가 조심해서 행해야 될 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한다면 우리는 조심해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분의 하나님의 임재를 정말 생생하게 인식하고 또한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딱 한 곳을 정해놓으시고 이제 거기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의 가장뿐만 아니라 이제 가족들도 이제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아직 어린 나이셨을 때에 그 주님의 부모와 그 주님, 그 가족이 모두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나아온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에 아니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번거롭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어린 자녀들까지 다 데리고 그 먼 길을 하나님이 정하신 그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전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명절에 고향에 이렇게 방문을 하잖아요. 저도 저희 할머니께서 이제 살아계셨을 때는, 저희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전라남도 광주에 계셔서 서울에서 추석이나 설날 때마다 버스를 타고 광주까지 간 적이 있는데요. 저는 명절이 다가오면 보통 10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차를 타고 가고 올라오고 할 생각에 굉장히 부담이 됐습니다. 굉장히 힘든 그런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차도 없고 더한 며칠을 가는 것이죠. 가족들이,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왜 그곳에 와서 이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여기 보면은 그 이유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신 12:12).
그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한 곳에 가서, 그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가지고 가서, 우리 가족이 우리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뭘 가르쳐주고 계시냐면, 정말로 즐거운 것은, 정말로 복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다. 이게 정말 복이다. 이것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가지고 그 온 가족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였을 때, 그들은 세상에서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했던 그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가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거기에 특별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너희들이 다른 것이 잘 돼서, 장사가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또 건강하고, 그래서 복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한번 이것을 한번 경험해 봐라. 너희들이 내 앞에 너희 가족이 모두 모여서 지금 여기서 함께 예물을 들고 나와서 있는 것을 한번 경험해 봐라. 나의 임재 앞에서 한번 경험해 봐라. 그러면 정말 이게 복된 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17장에서 읽었던 그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원한다. 이런 말을 자주 씁니다. 엉뚱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복 주길 바란다. 하나님이 복 주길 바란다. 이걸 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뭐가 하나님의 복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물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그 아들이 저주받지 않는 것, 그래서 건강한 것, 이것을 이제 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고는 상관없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 실로하고는 상관없는 엉뚱한 곳에 신당을 만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놓쳐버린다면, 우리도 이와 같이 엉뚱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엉뚱한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임재를 누리는 복보다 못한 복을 우리는 이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도서 말씀입니다. 전도서 11장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여기서도 이제 9절 중반부에 "네 눈이 보는 대로 쫓아 행하라" 이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라, 이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 이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누가 심판자인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자이시다. 이것을 정말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이 말씀을 읽어보면 약간 겁을 주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청년들아, 뭐 젊었을 때 너희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실 줄을 알라. 사실 이런 내용이죠. 그런데 약간 느낌이 이런 데 겁을 주는 내용인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나이 든 지혜자의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의 때라는 것이 굉장히 귀한 때입니다. 정말 청년이 그 인생에서 정말 그 생명력이 왕성하고, 그 아름다운 때에, 그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때에, 그들이 올바르게 그 시기를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해서 이 경고의 말을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인생의 최고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 청년들에게, 정말로 그 시간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정말로 그 최고의 순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너희들은 꼭 이것을 기억해야 된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자이시다. 이것을 빼먹지 말라. 너희가 어떤 일을 행하든지 꼭 이것을 기억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자이시다.
우리가 읽었던 사사기에 나와 있는 여러 주인공들을 보면 다 젊은 사람들입니다. 미가도 그렇고, 그 레위 제사장도 그렇고, 그 단 지파에서 특별히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그 600명도 그랬을 거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첩을 데리고 가는 그 레위인도 이제 그랬을 것입니다. 그 레위인은 이제 그 자신의 그 젊은 혈기 가운데서 자신이 당한 그 악한 일을 이제 이렇게 처리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불행하게 죽은 자신의 첩을, 그 시체를 12덩이 내가지고 그것을 이스라엘 각처에 보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자기가 심판해야 된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잘못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정욕대로 첩을 취한 것, 그 첩이 음행했을 때 그것을 올바르게 말씀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자신 대신 그 첩을 내던져서 그가 죽게 만든 것, 이런 잘못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심판자가 돼서 그 일을 처리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런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의 심판자라는 것을 이제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할 때만 그 청년의 때가, 그 아름다운 시기가, 그 중요한 시기가 더욱 의미 있게 또 참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짧지만 그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치 있게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참으로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고, 정말 그분의 말씀을 행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그분을 의지하고 오히려 더욱 그분의 말씀을 쫓아 행하는, 이제 그러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참으로 우리의 심판자이시며, 그분께서 모든 것을 의롭게 이루실 것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이제 우리의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이제 이러한 것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