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2024. 5. 11. 00:45
성경읽기 : 로마서 14장 9-12절(요약)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14:9-12, 개역한글)
 
 
- 김태우 형제님 사회 : 오늘 말씀에는 형제를 판단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한국 모임 가운데 많은 그러한 어려움이 있어 왔습니다. 또한 음식 관련해서도 꾸준히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제사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또한 의자에 앉는것이 맞느냐 방석에 앉는것이 맞느냐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9절에 "이를 위하여"로 시작됩니다. 8절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9-10절에 대해서 먼저 교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김윤철 형제님 : 10절 말씀을 교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지 않는것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18:15-17, 개역한글)
 
오늘 공부할 말씀과 마태복음 18장 말씀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누구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 실수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이 완벽하지만 형제의 권고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마음으로 그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형제를 피고석에 세우고 판단하고 심판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형제는 11절에서 이사야 45장 2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사45:23, 개역한글)
 
모든 무릎과 모든 혀가 하나님께 경의를 표할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모든 심판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심판받을 자였지만 하나님의 자비화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정죄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서로 섬겨야 함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 최재홍 형제님 : 9절부터 살펴보면 다른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먹는자와 먹지 못하는자, 날을 어떻게 여기는가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통치하실뿐 아니라 모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성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나 강한 자 모두 다 주님께 속한 종입니다.
 
10절에서 보면 또한 믿음이 약한자나 강한 자 모두가 주님 앞에서 형제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것 모두다 사도는 책망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가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행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직고할 것이고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것과 날에 대해서 소비하는 모든 시간들이 주님 앞에서 의미없이 지나가는 시간임을 보게 됩니다.
 
- 김보영 형제님 : 9절에서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죽은자와 산자의 주가 되셨습니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라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주 되심을 말씀하는 이유는, 종된 자들이 자기 주권대로 살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5, 개역한글)
 
성도가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주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까? 모든 측면에서 나에게 전혀 권한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와같은 측면에서 서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0절에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판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에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권한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10절에 나온 "하나님의 심판대"는 벌을 내리는 심판대가 아닙니다. 원어적으로 경기를 하는 심판대인 것입니다. 운동하는 자가 법대로 정정당당하게 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지 않는자는 실격시키고, 법대로 우승하는 자에게 상급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에 따른 시상대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비방한다고 하는것은 감히 주님의 권한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를 우상화하는 자리까지 나가는 것이기에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 김태우 형제님 : 9절에 "이를 위하여"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입니다. 모든것의 주권은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산자나 죽은자로, 주님의 광범위한 소유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교제하는 내용은 죄나, 교리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 적용하면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11절에 "내가 살았노니"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임재해 계심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살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11-12절까지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대현 형제님 : 양쪽의 공통점은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시작했지만 서로 비판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7-8절은 우리가 주의 것임을 말씀합니다. 9절 역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산것도 죽은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치 않고 이러한 다툼이 있을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으면 자기가 마치 심판자인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서로가 똑같은 하인인데 하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강한자도, 연약한 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 직고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12:36-37, 개역한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15:1, 개역한글)
 
강한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안고 가는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포옹하라는 말씀의 교훈으로 받고자 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주님께서 살아있다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시는 분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쭉 계속 살아계실수 있는 분인데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강한자나 약한자 모두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의 죽음과 연결되고, 죽은 이유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저희들의 죄를 위해서 도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지만, 포괄적으로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0절의 판단과 업신여김이 주님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판단하고 심판하실수 있는 분입니다. 때떄로 우리는 주님의 자리에서 여러가지를 판단하고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저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들간에 교제와 합당한 태도가 어떠해야 했는가를 말씀해 줍니다.
 
심판대에서 우리의 혀가 자백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45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일이 각자의 책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죄에대한 고백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에 대항 고백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절은 주되심에 대한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12절은 우리의 일들을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은 저희들이 한 일을 주님께서 판단하신다는 것을 염두해두고 하는 고백입니다.
 
- 장승훈 형제님 : 14장 초반에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반드시 이렇게 해야된다, 저렇게 해야된다, 믿음에 따라서 달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분명하게 어기고 있는 성도를 비판하지 말라고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연약한 사람이건 강한 사람이건 하나님이 모두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먹는것과 날을 지키는 것으로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긴다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두 각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시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 땅에서 서로 해버린다면 하나님의 하실 것을 가로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받아야 되는것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 김보영 형제님 : 11절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원어적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말씀하신 바를 성취하실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자백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에 세세히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잘한것도, 잘못한 것도 세세히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입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도전을 받게 됩니다. 현재는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그때에 부끄러운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와같은 것이 교리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이런 문제로 인해서 어느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이것은 주님 앞에서 큰 잘못이 아닐수 없습니다. 주님은 교회가 온전히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루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 김태우 형제님 사회 : 이 말씀을 보면서 탕자의 비유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맡겨진 믿음의 분량이 달랐습니다.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이 돌아와 기뻐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12절까지 교제한 것으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