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의 생애 05_사울을 살려줌,아비가일 >
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05_사울을 살려줌,아비가일 >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쌔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삼상24:1-7, 개역한글)
읽은 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은 그일라에서 다윗이 그들을 도왔지만 그일라 사람들은 그를 배반하고 사울에게 넘기려 했던것을 보았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 사람들은 사울에게 찾아가서 다윗의 행방을 알리고 사울을 돕고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그일라 사람과 십사람은 모두 다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다윗의 형제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와같은 상항 속에서 얼마나 절망속에 빠졌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다윗을 훈련하시지만 동시에 다윗에게 필요를 채우심을 봅니다.
요나단이 황무지 수풀까지 찾아와서 다윗을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 했습니다.
또한 십사람들의 보고로 사울이 쫓아오게 될 때, 거의 체포될 상황에서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떠나가게 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은 사울이 블레셋을 대적해서 나가 싸우다가 다시 다윗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 근처에 있었습니다. 엔게디는 사해 해안가에 있는 지역입니다. 사해는 해발 -400m로 깊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석회석의 많은 동굴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천 군대는 정예 군대 입니다. 원래 그보다 더 많은 군대가 있었지만 암몬과 싸운 이후에 그 수를 줄여 사울과 요나단이 지휘하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 군대를 이끌고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은 대낮에 매우 뜨거운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굴 깊은곳에 다윗과 그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공교롭게'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입니다.
사울을 바라볼때,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24:4, 개역한글)
다윗의 사람들은 바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것을,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용사들만 다윗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고 처자들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육백명의 이 사람들은 매일같이 야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냥 야영을 하는것이 아니라 사울로부터 도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처자들을 데리고 생활하기에는 매우 힘든 환경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속히 다윗이 보좌에 오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다. 오늘 사울을 제거하고 당신이 보좌에 오르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는 사무엘상 23장에서 하나님께서 그일라 사람들을 공격한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의 손에 붙이겠다고 말씀하신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붙이겠다는 말씀을 물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울을 그의 손에 붙이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인용하고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정확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슷한 말씀을 적당하게 인용하거나 적용하는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커다란 실수를 가져오게 합니다. 이것은 범죄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소원이 있기 때문에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이런 질못된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가만히 가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잘랐습니다. 그 자른것은 왕복입니다.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고 난후 다윗의 반응을 보십시오. 성경은 다윗의 마음이 찔렸다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너는 청결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을 가지라>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이 세가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깨끗한, 순결한,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봅니다.
또한 깨끗한 양심, 더러운 양심, 화인맞은 양심, 무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계속해서 통제되고 안내되는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많이알고 위대한 일을 한다고 해도 마음의 양심이 더럽다면 우리는 주님 일을 할수가 없습니다.
또한 거짓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대단히 여렸습니다. 그의 양심은 대단히 부드러운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사울을 건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인격을 다치게 한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사울의 옷을 베었다고 하는것은 사울의 공적인 위치를 침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속에 찔렸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삼상24:6, 개역한글)
사울은 언제나 백성들이 이야기 하는것을 들으면서 백성들을 두려워 했습니다.
잠언의 말씀에 <사람을 두려워 하면 올무 걸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사람도 두려워 할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사람도 경홀히 여길수 없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게 될 때, 그들의 견해나 여론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습니다.
원천권위와 대행권위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사람들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행권위라고 말합니다.
가정에 권위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시고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정부를 만드셨습니다. 또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 입니다. 거기에 반드시 권위가 있고 순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 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파멸은 이것이 무너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거스렸기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인류는 죄로인해 허덕이고 죄에서 해방받고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속에 빠질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셨고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권위와 순복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반드시 이해하고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권위와 순복이 무너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삶에서나 가정의 삶에서나 모임 안에서의 모든 하나님의 일들은 이러한 원칙하에 움직이고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주님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행권위를 두실때에, 가정에는 가장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장로가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위정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정부라 해도 무정부 보다는 정부가 있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대행권세를 허락해 주실때에 하나님께서도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위험입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고 제정하신 대행권세가, 즉 '대행권세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대표할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대표할수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대행권세는 권리가 있지만 책임도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대행권세를 사용하게 될때 많은 특권이 있습니다. 그 권세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것에 대해서 대행권세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답변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아무렇게나 이 권세를 써서는 안됩니다. 가장이기에 이 권리를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은 답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해서 답변해야 합니다. 가정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대행권세를 가진사람들은 하나님을 대표 합니다.
대행권세를 행하게 될때, 사람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행권세를 허락하시게 될때, 또 한가지 위험은 하나님이 주신 이 대행권세에 사람들이 순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염려하십니다.
대행권세를 가진 사람이 대행권세를 남용할때 문제가 됩니다. 또한 대행권세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을때 문제가 됩니다.
대행권세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인이 포도원의 소출을 원해서 종들을 보냈습니다. 소작농부들은 그 소출은 종들에게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0장 말씀에서 주님의 비유는 소작농들은 종들을 구박했고 아들을 보냈을때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 모든것은 권세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천권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런데 대행권위에 순종한다고 하는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대행권위에 순종하기 위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대행권위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부서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대할때에 인간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으로서는 부모가 답변해야 하고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합니다.
그것은 대행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대행권세에 순종하는 사람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불순종하고 싶을 때 흠을 잡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니고 저래서 아니다" 이렇게 할때 엄청난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유대교에 철저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얼만큼 철저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모든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핍박하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스도는 머리시고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몸을 핍박했을때, 주님께서 고통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래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빛과 처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권위를 보았을 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제 한 대행권세를 그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를 다메섹 안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는 다메섹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나니야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야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거기서 침례를 받고 눈을 뜨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은 권세에 대해서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권세에 대해서 깨달았을 때 대행권세앞에 그가 순종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옆의 사람들이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라고 이야기 할때, 다윗도 인간적으로 그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지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이 인도자 입니다.
인도자는 우리 생각대로, 여론에 의해서 따라가거나 끌려가거나 아니면 부유해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다윗이 이와같이 했기 때문에 다윗의 왕국은 견고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아홉개의 왕조가 있습니다. 그 말은 여러차례 구테타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왕이 있었지만 그 밑에 있는 장군이 일어나 왕을 쳐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어떤때는 며칠만에 그가 죽고 다른사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것이 북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남 유다는 어떻습니까? 아달랴 외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왕이되고 범죄 했을때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가장 슬픈것중에 하나는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과만은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에 가서 접전을 해야 할때가 왔을때, 세 장군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군대를 나누고 전쟁에 돌입 합니다. 그때 다윗은 "나도 이 전쟁에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 백성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찌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찌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삼하18:3, 개역한글)
다윗이 징계를 받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의 믿음에서나 상태에서나 가장 절정에 이른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왕을 사랑했습니다. 백성은 왕에게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왕은 우리 만명보다 중하시오니>
백성들은 다윗의 권위에 순복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권위에 순복했기 때문입니다.
대행권세를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대행권세에 순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권세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청년들이 결혼할 때, 마음에 준비하는것은 가장이 되는 것입니다. 대행권세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세운다는 말은 대행권세를 행사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우리는 많은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나에게 대행권세를 주셨을 때, 대행권세를 정말로 잘 사용할수 있습니다.
내가 대행권세를 주님 앞에서 잘 사용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주님 안에서 생각해 보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견고하고 모임이 견고하고 국가가 견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정자들을 내 마음에 맞지 않아도, 그들의 결단과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위정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대행권세를 거스르는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대행권세를 가진자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대행권세를 가진자는 모든일에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부끄러운 자입니다.
그리고 대행권세자 앞에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이유로 순종할수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음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사울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울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당했고 그로부터 이탈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기름부은 사람에게 칼을 댈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씀하고 있는 진리 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는 실행에 옮기고 실천하고 살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물론 대행권세를 가지고 있는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앞에서 처신해야 하는가는 또 다른 숙제입니다.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며 그는 많은 준비를 했어야 할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실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다스리는 사람들에 영적으로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사울은 굴에서 나왔습니다.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24:8-9, 개역한글)
간신들은 계속해서 다윗이 매복해서 사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말을 사울에게 했습니다.
그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11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삼상24:10-13, 개역한글)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24:12, 개역한글)
누가 보복합니까? 이 모든문제, 심판하는 문제는 다윗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다윗은 여호와께서 보복한다는 말을 서슴치않고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불의하고 다윗을 연고없이 죽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신원하실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일에 대해서 다윗은 자기가 직접 개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것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삼상24:13-14, 개역한글)
이때 사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삼상24:16-19, 개역한글)
이 사울의 말 자체는 얼마나 옳습니까?
이 말은 너무나 옳고 독실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는 돌아서면 또 다시 다윗을 추격합니다. 그의 마음은 계속 요요와 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악신이 역사하는 이 사람, 시기로 가득한 사람, 그 마음에 정함이 없는 이 사람 사울은 때로는 울기도 하고 다윗이 선하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고 나는 학대했지만 너는 선대했으니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이와 같다면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지요. 하나님을 얼마나 배도하는지요. 그의 마음속에 진실함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는 장인, 사위간의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이간의 어떠한 특징조차도 없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삼상24:21, 개역한글)
요나단은 전에 다윗과 맹약을 맺을때에 '나와 너 사이, 너의 후손과 나의 후손사이에 언약을 맺고 서로 선대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적이 있습니다.
여기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울은 왜 계속해서 다윗을 쫓아 갑니까?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윗을 쫓습니다. 그의 말에는 진실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람을 통해서 다윗을 훈련하십니다.
때때로 대단히 어려운 사람을, 저사람만 없다면 천국과 같을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상을 여러분이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두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만 없으면 세상이 정말 천국과 같이 변할것이라고 생각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여러분이 그 사람을 없앨수 없고 거기를 만약 떠난다 해도 다른곳에는 그보다 더한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말로 힘든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때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저사람만 없으면 나는 행복할텐데" 라고 수천번 수만번을 생각한다 해도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주님앞에서 양심에 걸리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다윗이 지금 훈련받는것은 어떤 사람과 부비적거리는 것입니까?
사울과 함께 부비적 거리고 있습니다. A라고 말하지만 B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이 가득하고 시기가 충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거둘려고 하시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제련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속에 있는 여러가지 불순물들을 제련하고 그가 제련받아 조금 후 보좌에 오르게될 것입니다. 그가 보좌에 오르게 될때, 대행권세를 받은 사람으로서 정말로 합당한 목자로서 그의 백성들을 포용하고 인도할수 있는 대행권세자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대행권세자로 합당치 않은 사람을 다윗의 곁에 두시며 다윗을 제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려운사람이 돌이켜 보면 나에게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그사람이 나에게 반대하고 내 약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내 약점을 지적해 주어야 내가 그것을 개선하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런저런 환경속에서 우리는 "주님 나를 개선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발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나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엎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이와같은 훈련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어가고 계심을 우리는 봅니다.
사무엘상 25장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삼상25:1, 개역한글)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집니다. 거기서 사무엘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며 최초의 선지자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위에서부터 저 밑에 이르기까지 필요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책망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사무엘은 이 당시의 느슨한 12지파의 연합을 왕의 체제로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만일 사무엘이 없었다면, 12지파의 느슨한 연합으로는 그들 주변에 있었던 대단히 강한 강적들을 무찌르지 못했을것입니다. 오히려 그같이 강력한 강적들로 인해서 12지파가 해체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12지파를 묶어서 이끌어가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대단히 탁월한 본을 사람들에게 남겼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대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가 이세상을 떠나게 될대, 그와같이 그의 백성들을 이끌어 갈 사람이 아직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와같은 때에 다윗을 계속해서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순간에 사무엘에게로 찾아가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괴로운것들을 다 토하고 어려운 상황속에서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에게 조언해 주고 자기에게 기름을 부었던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본이되고 여러가지 것으로 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던 사무엘이 떠났습니다.
다윗 이외에도 이스라엘의 여러 경건한 인물들에게 사무엘이 떠났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커다란 슬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 이후에 이와같이 대단한 역량을가진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떠난다고 하는것은 그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손실이라면 사무엘이 살았을때, 아직 기회가 있을때에 왜 사람들은 더 많은 말씀을 받고 더욱 더 많이 변화하지 않았을까요? 그로부터 떨어지는 수많은 영향력을 왜 그들은 감지하지 못했을까요?
이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이 같은 사람이 있을때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죽고 나서야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때, 우리 주변에 있는 이와같은 신령한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 사람들이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고 그와같은 영향력을 내것으로 하고 다음세대를 위해서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신 대행권위에 순복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시는 중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그는 행했습니다. 25장에 와서 사무엘이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다윗은 어디로가서 위로를 얻을까 하는 슬픈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25장에 가서보면 나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4장과 25장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24장에서는 다윗 스스로가 자제했습니다. 그러나 25장에 와서는 자기가 사백인의 모든사람을 이끌고 칼을 빼고가서 나발을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자제가 없습니다. 보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누가 다윗을 구원합니까? 누가 다윗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까?
전혀 상상할수 없는 인물이 나타나서 다윗을 살립니다. 다윗이 분한 마음을 가지고 나발을 죽이고 그를 완전히 피투성이로 만들었다면 그의 분한마음은 그 순간 해소되었겠지만 그 이후의 그의 왕이 될 사람으로서의 경력에 있어서 그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게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위기의 순간에 위로자이며 모사이며 바른것을 볼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사람은 다른사람이 아니고 한 여성이었습니다.
아비가일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대단히 중요한 사람은 아비가일입니다.
다윗은 순간적으로 미래에 있을 보좌에 대한 영광에대해서 눈이 멀었습니다. 만일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자제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칼을 들고 나갔을때 길에서 아비가일을 만납니다.
우리는 25장에서 아비가일이 가지고 있던 위대한 비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삼상25:2-3, 개역한글)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왜 그에게 이와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식에게 어떤 이름을 주어주나요?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겠지요. 말론과 기욘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나발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고, 아비가일은 '아비의 기쁨'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이는 비열하고 비루하고 야비하는 뜻입니다. 구두쇠와 같은 모든것이 섞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결혼했을까요?
두 사람이 만나 결혼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고, 아마도 정략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는가 짐작합니다.
나발은 부자이고 갈멜에 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근처에 와서 나발의 수많은 양떼들을 항상 보호해 주었습니다. 때때로 유목민들이 와서 양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는데 거기서도 보호해주고 블레셋의 침공에서도 보호해 주었습니다.
뉴욕은 유대인들의 인구가 많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대부분 인도할수 있는 그런 직책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유대인들이 쉬는 날에는 보통 다들 쉬게 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의 휴일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그래야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들의 달력으로 1월 1일을 '로샤샤나'라고 하는데 우리의 달력으로 9월달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날밤인데 그때는 양털을 깎습니다. 그때에는 축제가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먹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때를 기해서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25:10, 개역한글)
<이새의 아들>은 멸시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가리켜 '이새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쩌면 이새가 세상적으로 대단한 권력이 있거나 탁월하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울이 이새라는 사람을 멸시해서 부르고 그리고 그의 아들은 더 멸시해서 부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여기 나발도 마찬가지로 다윗을 멸시합니다.
다윗은 사무엘상에서 거절당하고 있는 왕으로 나타납니다. 사실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두 왕이 있다면 하나는 다윗이고 하나는 솔로몬입니다.
다윗은 거절 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솔로몬은 영광 가운데 왕으로 임하실 주님을 묘사합니다.
주님이 거절당하신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따를 때에, 우리주님은 거절 당하신 주님입니다.
세상은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만일 세상이 영광 가운데 오신 주님과 그 옆에 앉아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본다면 그렇게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절 당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기 다윗은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25:10, 개역한글)
이것은 사실상 사울의 정권에서 몰락해져 가는 사회와 사울로부터 이탈해가는 것을 나발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25:11, 개역한글)
그가 한 이야기를 전부 보면 그는 전부 '내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나의" "나의"
그는 다른사람과 나눌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실상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만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을 멸시하며 조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세상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서 나발은 다윗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아비가일은 다윗이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커다란 차이입니다. 다윗을 모르기 때문에 다윗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귀하신 분이신지, 어떻게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신지, 그분의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를 만약 안다면 우리 주님을 그렇게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나발은 그래서 여기 악행을 했습니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25:11, 개역한글)
나발이 주지 않겠다고 한것 중 에 물이 있습니다.
물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옷니엘과 결혼하는 딸에게 그 아버지 갈렙이 선물을 줍니다. 딸이 "아버지 나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십시오." 라고 구합니다. 이 지방은 물이 귀합니다.
나발은 다윗에게 떡도 안주고 물도 안주고 고기도 줄수 없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보답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은 성령에 충만한 마음입니다.
성령에 충만하고 피차 복종하는 이런 마음이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은 감사하는 마음이 모여있는 식구들인가요. 우리 모임은 모든 지체들이 어려움속에서도 항상 감사하나요. 이렇게 하면 모임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립니다. 항상 감사하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소년들이 다시 돌아와 보고합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삼상25:13, 개역한글)
육백명중에 사백명이 나가고 이백명이 남아있다는 것은 다윗이 얼마나 격노했는가 하는것을 말해줍니다.
전부 칼을차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충동적인 행동, 분노하고 성을 내는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속에서 성을 낸다던지 격노하는 문제에 있어서 잘 검토하고 자제해야 합니다. 주님안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하는 삶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다윗은 왕 앞에서 절제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똑같은 상황이라 치고 나발은 어느 지역에 있는 부자입니다. 다윗은 나발을 생각할때, 울컥하여 바로 나가서 죽일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 사람중에 나발의 종이 급히 달려나갑니다.
이 소식을 빨리 전하지 않으면 나발의 집은 피투성이가 될것입니다. 그리고 달려나가 아비가일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것을 알아 생각하실찌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삼상25:17, 개역한글)
<불량한 사람> 이를 벨리알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인과 더불어 말할수 없다고 합니다. 나발의 특징 중 하나는 대화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격관계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같이 부부로서 산다면, 두사람간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것을 서로 토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대화하는 능력을 주셨고 그렇게 하고싶은 소원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대화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서로간의 배려입니다. 서로간의 존경입니다. 그것이 만일 깨진다면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것을 그냥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시험가운데 빠트리고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오고서는 가리게 되었습니다. 숨고 벌거벗은것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벌거벗었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속이고 숨겨야 합니다. 이와같이 성분이 대화속에서도 역사하게 됩니다.
하는말이 있고 하지 않는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이 있고 사실을 외곡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것들은 불행한 것입니다. 대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대화하게 될때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중에 하나는 듣는것입니다.
실망속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 둘을 주님께서는 관심을 갖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얘기하면서 걸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자 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거하면서도 근일에 되어진 일을 모릅니까?" 하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일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의 장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화할때에 주님께서는 모든것을 다 아셨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주님께서는 성경을 가지고 죽 말씀하십니다. 그 이후에 주님과 두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엠마오로 거의 다 와서 해가 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출발할때는 절망과 실망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와 말하기도 귀찮아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주님과 이야기하다보니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강권해서 초청합니다.
이런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때, 가졌던 마음과는 전혀 다른것입니다. 이들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대화를 통해 우리는 놀라운 즐거움과 가슴아픈 상처도 받을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익하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세워주는 대화를 할수 있을까요? 특별히 부부간에 그렇게 간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화중에 가장 커다란 문제 중에 하나는 성내는 것입니다. 성내는 것은 위협하는 것입니다. 대화가 안되니 제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나를 방어하는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가리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나발과 대화가 안 통한다고 하는것은 그가 대단히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존중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잠언 31장 10절 말씀 이하로는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나옵니다. 여기서는 현숙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네 구절은 부부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잠31:11, 개역한글)
첫번째, 믿습니다. 신뢰합니다.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잠31:12, 개역한글)
두번째, 선행을 행합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깨어지는것은 엄청난 문제입니다. 신뢰가 깨어지면 대화도 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정도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부부생활을 하고 간다면 그것은 얼마 후에 폭발하게 됩니다.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 (잠31:23, 개역한글)
고대시대에 성문에 앉는다는것은 행정요원이고 장로들이고 재판관이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 돕는배필로서 어런저런것을 할수 있도록 지원하고 밀고 응원하는 삶을 산것입니다.
28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잠31:28-29, 개역한글)
남편은 아내를 칭찬합니다. 다른 여자보다 더 낫다고 칭찬합니다. 칭한하는것은 알아주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대화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발은 대화할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비가일과 거의 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사람들과도 거의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배려하지 않고 야비하고 비루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비가일은 급히 음식을 챙겨 갑니다. 다윗과 아비가일은 산 유벽한곳에서 만납니다.
유벽한곳은 으슥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거시서 만났습니다.
다윗은 칼을 들고 모두를 죽이겠다고 하고서 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쳐 죽인 용사입니다. 그의 사백인도 모두 용사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군부에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이 거기에 많이 있었습니다.
이 강력한 열차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정지시킬까요? 무엇으로 정지시켰습니까?
그들을 정지시킨 힘은 겸손입니다.
나발의 악행으로 인해서 야기된 문제를 아비가일이 뒷수습을 하는 것입니다.
20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으로 좇아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삼상25:20-21, 개역한글)
이때 다윗이 얻지 못한것은 얼마만의 음식입니다. 그리고 나발의 악행으로 인한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저 앞에 있는 보좌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앞에 가서 엎드렸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삼상25:23, 개역한글)
이것이 급히 달려오던 용사들의 행진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발앞에 엎드려 '이 죄를 내게 돌리십시오.'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주여 나의 말을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나발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도 대화가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가 비록 격노하고 자칫 범죄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지만 아비가일이 그 앞에 엎드렸을때 다윗의 마음은 감동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이처럼 부드럽습니까, 아니면 강팍합니까.
우리는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이 부드러우신 분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그래서 우리가 고통 당하는것을 차마 볼수 없으셔서 이땅에 오셔서 대신 고통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윗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라는 아비가일의 요청에 다윗은 듣기 시작합니다.
듣는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듣는것은 대화의 기초입니다. 다윗은 여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삼상25:25, 개역한글)
아비가일은 여러가지 음식을 가져왔습니다만, 그 전에 다윗에게 전할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 나발이 행한 악행을 용서해달라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이 위급한 순간에 다윗에게 나아와서 꼭 전해줄 말이 있었습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상25:26, 개역한글)
<보수하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이야기 합니다. <보수하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이 일이 끝났다고 못박았습니다.
아비가일의 마음속에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다윗에 대한 지식을 분명한 이야기를, 확신 가운데 이야기 합니다.
다윗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그냥 가서 나발을 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보수하는 것에 대해서 그의 양심이 100% 동의할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에 대해서 이 여인은 명확하게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더 이상 갈수 없도록 막았습니다.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삼상25:27, 개역한글)
그리고 아비가일은 음식을 다윗과 함께한 사백인에게 줍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삼상25:28, 개역한글)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다윗은 <사망과 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라는 고백을 한적이 있습니다. 죽음은 다윗의 지척에 있었고 다윗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육백명의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고 지원해 주었지만 누구도 이러한 얘기를 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비가일의 말로 다윗의 눈이 띄어졌습니다.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다윗은 자기가 칠수없는, 도망갈수밖에 없는 싸움을 사울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싸움을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싸움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내 주의 일생에서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울의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악한일을 했다고 모함 했습니까? 심지어 십사람들을 사울에게 직접 찾아가서 다윗이 있는곳을 사울에게 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다윗이 악한일을 한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들었을때 다윗이 눈물이 나올것 같은 상황에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이러한 말을 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에게 찾아와서 그의 가장 연약한 부분,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그 부분에 아비가일은 연고를 발라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사무엘은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혀 기대할수 없는 이 여인을 통해서 다윗의 눈을 띄워주고 다윗이 먼곳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찌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삼상25:29, 개역한글)
다윗왕은 생명싸개 속에 싸여 보존이 되지만 다윗의 원수의 생명은 물매를 던지듯이 던져질 것입니다.
원수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격파하실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괴로워하던 문제를 이 여인은 얘기합니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삼상25:30-31, 개역한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 합니다.
<원수갚을것을 내게 맏기라> 이것은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갚을것을 하나님께 맏겨야 합니다. 내가 만일 원수를 갚는다면 그것은 주제넘는것입니다. 내 범위를 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범위를 넘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비가일이 보호해 주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이 위대한 격력을 손상받지 않도록 막아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여성이 용사에게 남긴 말씀 입니다.
그 말씀은 깊은 감동으로 전율하게 합니다.
성경에 위대한 연설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성, 유다의 연설입니다. 자기의 동생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갈수 없다는 연설을 감히 총독앞에서 합니다.
그리고 여기 여성, 아비가일의 연설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백인이 같이 칼을빼고 달려오는데 그것을 중단시키고 멀어져 가는 다윗의 눈을 확 띄우고 마음이 녹아내리도록 연설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말입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감탄합니다.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찌며 또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삼상25:32-33, 개역한글)
그의 격노한 마음은 모두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그는 저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위대한 영광과 보좌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음식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계시를 접하게 될때, 세상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깐 있으면 지나갈것이고 없어도 견디면 지나갈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너무나 놀라운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으로 인해 우리는 계속해서 인내하고 주님을 기다리며 갈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위로를 받고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에게 돌아갑니다. 그는 왕과 같은 잔치를 열고 대취하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가일은 그날에 그에게 한마디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아미가일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이 모든 되어진 일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때 나발의 마음은 돌과같이 두려워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흘후에 그를쳐서 그는 죽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게 될때,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에 대해서 보복한다던지, 자기에게 악행을 하는 사람에게 내 손으로 앙갚음을 해준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나의 월권이고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재난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두고두고 후회 할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스스로 보수하는것을 안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보수하고 원수갚는것을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나발에 대한 원수를 직접 다윗이 갚았다면 그는 일생동안 괴로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발이 죽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 라고 합니다. "내가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셨다"
사울은 누가 죽였습니까? 사울은 블레셋에 의해서 죽을뻔한 순간에 자살해 버렸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조금이라도 칼로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이 기름부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보고 계십니다.
다윗이 과연 이 어려운 순간에 모든것을 끝내고 보좌에 오르는데 사울을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는가, 아니면 그 일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도저히 할수 없습니다."라고 말한것인가를 하나님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이 합격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25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불합격이라고 말씀하시려 할때, 아비가일이 나타나서 다윗을 멈춥니다.
대행권세를 행사하면서 순종하게 될때,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게 될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는 잘하는 것입니다.
이일 후에 다윗이 아비가일과 결혼하려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과 아비가일은 결혼합니다.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취하였더니 그들 두 사람이 자기 아내가 되니라 (삼상25:43, 개역한글)
그런데 이 말은 도대체 무슨말일까요? 아비가일과 결혼했는데 또 아히노암과 결혼합니다. 일부다처의 실행입니다. 다윗은 이미 미갈과 결혼했었고, 이제 아비가일과 결혼하고 또 아히노암과도 결혼합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위대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영역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감탄합니다. 어떤 사람도 해낼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 영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생활입니다.
여기보면 그는 일부다처를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키지 않아 하셨지만 용납하셨을지 몰라도 그것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이 그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삼상25:44, 개역한글)
다윗의 가정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미갈과 어떻게 결혼하였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다윗은 아직 청년입니다. 그가 아직 20대입니다. 그가 미갈을 얻기위해 블레셋인의 양피 100개를 얻으러 갔을때도, 나발을 향해 달려갈때도 청년으로서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에게 양피 100개를 가져온다면 결혼을 허락한다고 했을때 그의 마음에는 불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결정하게 될때, 그의 결정은 바른 결정이 될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래전 하나님께서 기록해 놓은 이 말씀에서 이 교훈을 받아야 겠습니다.
우리가 청년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가까이 하고 더욱 더 신중하고 주님 앞에서 좀더 진중하고 세밀히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상황속에서 만사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24장에서 성공했지만 25장에서는 거의 실패할뻔 합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비가일에게 있는 영적인 안목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안목이 있다면 가장 위태위태한 사람을 가장 커다란 재난속에서 구원해낼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한 대화와 그 위대한 연설을 통해서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사람의 어두운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고 앞을 내다볼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위대한 사역이 우리 마음속에도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