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성도 말씀

아삽의 시 : 서론 (요약글) / 기드온 쿠 bro

박이레 2024. 4. 19. 12:32

< 아삽의 시 서론 > 24년 2월 21일 수요일(요약) / 기드온 쿠 형제님

이번 집회 기간동안 살펴볼 시는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의 시는 많지는 않지만 시편의 중요한 한 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삽에 대해서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아삽의 시에 대해서 그 시편이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시편 73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요일에는 80편, 혹은 83편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기전에 말쓰드리는 것은 12시가 아삽의 시라는 것입니다. 첫번째가 시편 50편입니다. 그리고 아삽의 시편으로 크게 묶여 있는 부분이 73-83편까지 있습니다.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대상6:33, 개역한글)

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저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베레갸는 시므아의 아들이요 (대상6:39, 개역한글)

저희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 좌편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 에단은 기시의 아들이요 기시는 압디의 아들이요 압디는 말룩의 아들이요 (대상6:44, 개역한글)

여러분께서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기록을 살피게 될때 시편과 관련된 세사람을 발견합니다. 헤만, 아삽, 에단입니다. 그리고 이 세사람의 시편이 시편 제 3권에 있습니다. 이 시편이 5권으로 나눠진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시편 3권은 73편으로 시작하고 89편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90편이 모세의 시편으로 시편 4권이 시작됩니다. 여러분께서 73-90편까지 나중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삽의 시가 73-83편까지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89편은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그리고 그 시편은 에단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름들이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익숙한 이름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대상25:1, 개역한글)

여기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여두둔이라는 이름입니다. 시편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때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사36:22, 개역한글)

이사야서에 기록된 역사의 기록을 읽어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셈나가 문지방에 선 것을 보게 됩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기 위해서 그 앞까지 찾아온 시대입니다. 히스기야가 그때의 왕이었습니다. 앗수르왕은 랍사게를 먼저 사신으로 보냅니다.(4절)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고나서 이 22절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스3:10-11, 개역한글)

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13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80:12-13, 개역한글)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5:18-20, 개역한글)

우리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합니다.

제가 어렸을때는 이 시편 읽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단조롭고 지루한 시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언을 좋아했고, 성경의 여러가지 흥미로운 역사서를 좋아했고, 신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비록 음악을 배우고 훈련받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잘 편집된 시편을 가지고 있다면 시편이 성경의 중앙부분에 잘 인쇄되어 있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이가 들게 되었을때 저는 점점 시편이 좋아졌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인생의 높이와 절망할때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시편의 언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이 시편의 언어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편은 노래입니다.
하지만 단지 노래는 아닙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사람의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는 이 시편을 통해서 놀이를 배우고, 인생들의 경험을 느낄수 있습니다. 또 이 시편을 통해서 역사를 배웁니다. 심지어 시편을 통해서 예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것 위에 메시아 시편이 있는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감정들을 배울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결국 높이 들리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는 시편을 알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구약이 제일 많이 언급된 성경이 시편입니다. 시편은 단지 노래로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시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부분에서 우리는 특별히 아삽의 시를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50편이 아삽의 첫번째 시입니다. 이 50편은 시편의 제 2권에 담겨 있습니다. 다른 아삽의 시처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다음의 아삽의 시의 모음집은 시편 73편부터 시작됩니다. 73-83편까지 총 11편의 시편이 아삽의 시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삽의 시편이 동일한 아삽에 의해서 작성된 것은 아닙니다. 일부분은 다윗이 언급한 그 아삽이 기록한 시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헤만와 아삽과 여두둔(?)에서 그 아삽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오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당시에 아삽은 함께 노래를 드리는 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고 그때에 노래하는 자들이 함께 할 때에 아삽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삽의 시편이 작성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다윗의 시대에, 솔로몬의 시대에 아삽이 존재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를 살펴 볼 때에(느헤미야에서도) 거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후손 중에 아삽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을때도 다시 돌아올때도 아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삽의 시편 중에 일부분은 그 아삽의 자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것이 50편의 아삽의 시가 따로 떨어져 있고, 73-83편까지 쭉 연결된 이유입니다. 73-83편까지 시간을 두고 읽어보신다면 여기서 이스라엘이 공격받는 것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가 포위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바벨론이 침공했을때 성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삽은 단지 한명이 아니라 예전에 아삽이 있었고 아삽의 자손이 이어서 기록한 시입니다.

다윗의 시대부터 바벨론의 시대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또 포로귀환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삽의 자손은 여전히 이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이 찬송을 참으로 오랫동안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충성된자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기서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수백년간 오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kk모임이 여전히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사람들이 남아있겠습니까? 이 위대한 유산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여기 많은 가정들, 자녀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계속 번영하는것은 그 자라나는 아이들로 인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이 모임의 간증을 죽이는 가장 큰 대적은 다음세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젊은 형제 자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냥 나는 어린 사람인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젊음이라는 것은 큰 자산입니다. 그 젊음을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즐거움을 좇으며 사용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순종하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백년을 지체하신다 해도, 그렇게까지 지체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만, 주님은 수십년 충분히 늦게 오실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께 찬송을 드리는 남자와 여자가 있겠습니까?
아삽의 자손들은 노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드이 처음 등장하는 때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막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그들의 일은 높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젊은 분들이 내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부르는 노래를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그 아삽이, 헤만이, 여두둔이 성도들과 함께 부른 그 노래를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중에 어떤 분들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정말로 따분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가수의 멜로디를 도입해서 들으면 매우 신날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많이 멜로디 자체에 대해서 강조하게 됩니다. 물론 이 멜로디도 중요합니다. 멜로디가 우리가 노래를 바로 부를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멜로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가사 자체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 분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모임에서의 찬송을 언급하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은 노래가 불려지게끔 목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답하며" 말한다고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말한 것입니다. 왜 노래가 아니고 말하다고 했을까요? 말하는 것에는 멜로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 형제님은 "화답하며"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 형제님은 그 노래에 대해서 강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그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서로 말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시와 찬미와 노래입니다. 시는 이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의 시편의 묶음집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찬미는 성경적일 뿐만 구조적인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께서 빌리버스 힌북을 보신다면 상단을 보면 7878숫자가 적혀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터, 박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찬송가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짜여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힌북에 대해서 지루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 박자가 항상 반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도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시편은 구조적으로 반복된 시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드리는 노래가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찬송가에 나오는 반복되는, 예측 가능한 구조가 지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찬송가는 시편의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저의  감정이 주님께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생각나게 하고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지역모임에서 찬송가를 부를때마다 시편을 부르는 사람처럼 성경적이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하며 시편처럼 구조적이고 신령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것을 볼 때에 지역모임에서 어떤 찬송이 드려져야 되는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음악가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요. 역대상 25장에 보면 한 선지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대상25:1, 개역한글)

헤만, 아삽, 여두둔이 특별히 예언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한국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삽의 시편을 보면 이것이 다른 어떤 부분보다 예언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들을 돌아보지 않고 대적들을 처벌하지 않습니까?' 아삽의 시는 이와같은 부르짖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때때로 하나님께 아주 어려운 질문들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수 없는 가운데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의 시를 볼때에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내용에 그칠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국제적인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번성하게 하는지 아삽의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왜 의인들이 그들이 마땅히 받을 상급을 받지 못하는지 질문합니다. 우리는 그 악이 심판받지 않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오히려 잘되고 번영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더욱 통제되지 않는 상황가운데 빠져듭니다. 주님께서 지금당장 오셔야 한다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의 악이 증가하는 것이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까워 졌다는 것을 증거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곧 오실 것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을때, 원자폭탄이 떨어졌을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곧 오실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의 문제를 해결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잠잠하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삽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 일시적으로 아주 평화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금방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때가 올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국제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롭건, 혼란스럽건,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오실수 있습니다. 아삽이 그때 당시 기록할 떄도 세상은 충분히 악했습니다.

또 아삽의 시편을 볼 때에 여러가지 종말론, 예언에 대해서 많이 기록된 것을 볼수 있습니다. 예루살람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83편이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을 열개의 나라가 둘러싸게 됩니다. 마포에서 계시록을 공부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열뿔에 대한 묘사가 나올때에 여러분이 어려워 할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열뿔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것이 아닙니다. 시편 83편을 볼 때에 거기 나와있는 열개의 나라, 열뿔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인접국가입니다. 이와같이 시편 83편에는 종말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열개의 나라를 세어 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36장에 아삽이 다시 나옵니다. 대적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때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사36:22, 개역한글)

아삽의 아들 요나는 사관, 기록자였습니다. 사관이라는 말을 볼때 단지 기록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관의 의미가 단지그것이 아닙니다. 사관이라는 단어는 '마스길'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단어 '사칼'에서 온 것입니다. 사칼이라는 단어의 뜻은 기억하다입니다. 마스길이라는 단어는 기억하게 하다, 어떤 특별한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관은 즉시 바로 기록하는 일만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마스길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삽의 시 73편을 보겠습니다. 아삽의 시에서 기억하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시74:2, 개역한글)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시74:18, 개역한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시74:22, 개역한글)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소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잊어버리는 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잊어먹지만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는 분입니다. 또 다시 싱기시킬 필요가 있는분이 아닙니다. 그럼 왜 시편기자는 기억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께 생각해 달라고 요청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청을 들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스길이라는 직분을 가진 자가 하는 일입니다. 아삽의 시편에서 많은 부분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기억하라고 요청합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짓는 마스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도 기도집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스길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앞에 나와서 설교할 때에 그는 무슨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마스길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150편의 시편 중에서 가장 많이 기억하라는 단어가 나오는 시편이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단지 기록하는 기록자가 아니라 마스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0장에서 은나팔을 만들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전쟁의 특정한 날에 하나님께서 그 나팔을 불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나팔을 불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신바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백성들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팔이 불리게 될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싸우시기를 요청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한번 다시 악기들이 사용됩니다. 그것은 성전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드리는데만 사용되지 않았고, 예언되는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노래는, 그 찬송은 하나님을 기억하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아삽의 시편에서 우리는 심판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시50:6, 개역한글)

이러한 개념이 아삽의 시편에 계속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열방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심판자아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게 된 모든 일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섬겼는지를 심판을 받고 어떤 동기를 가지고 섬겼는지를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숨길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없는 것을 위해서 이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삽의 시는 하나님께서 심판장이심을 우리에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아삽의 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73-77까지 78편이 가운데 있습니다. 79-83이 나와 있습니다. 다섯 시편이 이쪽에 있고 다섯시편이 다른쪽에 있습니다. 78편이 중간에 있습니다. 그리고 78편이 가장 긴 아삽의 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8편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기 떄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아삽의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한 질문들은 왜 악인들이 형통하는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80편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일을 하시는지 작은 힌트를 보게 됩니다.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80:13, 개역한글)

시편 80편에서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입니다.(8절)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80:8, 개역한글)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포도나무가 짐승에게 짖밟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하나님께서 이 들짐승이 하나님의 포도나무를 짖밟고 망가뜨리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비춰지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수풀'이라는 것이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숲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숲의 돼지가 나와서 상해하는 것입니다. 이 수풀이라는 단어는 150 시편의 가운데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언어의 순서상 그 언어의 가운데 있는 단어입니다. 150의 시편의 히브리 언어로 처음부터 끝까지 카운팅할때 가장 가운데 놓여지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수풀이라는 단어는 네개의 철자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세번째 히브리어 단어는 모든 철자의 가운데 놓여지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시편의 가장 가운데 있는 단어의 철자가 '아인'이라는 철자입니다. 그 아인이라는 철자는 눈을 상징하는 철자입니다. 그럼 그것이 누구의 눈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삽은 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를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시편의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에게 눈을 감고 있는것이 아니며, 백성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있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폄의 3권이 어떻게 마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찬송하리라고 마치게 됩니다.

마치기 전에 중요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젊은 분께서 아삽의 시대에는 많은 악기들이 사용되지 않았는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성전이 봉헌될때에 각종 악기들이 사용되면서 그 식을 찬송드렸습니다. 구약에는 그렇게 많은 악기들이 있었는데 지역모임에는 왜 어떤 악기도 없습니까?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5장을 볼 때에 신약 성경에서 단지 3-4구절이 찬송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고전14장에서 인애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드리고, 야고보서는 시편으로 찬송하며, 에베소서 5장에서는 너희 마음으로 노래를 하며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서를 볼 때에, 모임에 보내진 모든 서신서를 볼 때에 악기가 하나라도 나와 있습니까? 나팔이 한번이라도 사용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유대인이라면 어릴적부터 유대인의 교육에서 악기를 잘다루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그 어떤 악기도 나오지 않는것을 보게 됩니다. 구원받은 유대인들이라면 왜 악기가 언급되지 않는가요? 사용되지 않는가요? 많이 물었을 것입니다. 저는 베토벤을 좋아합니다. 그는 작곡가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웅장하게 시작하고 잔잔하게 연결됩니다. 그 악보에 강하게, 잔잔하게, 조용하게, 등등 표시를 둡니다.
여러분이 모임집회에서 악기라는 것을 다루게 될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베토벤의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악기를 강하게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에 올때에 성령께서는 아주 조용하게 사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특별히 집중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악기는 다른 세대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약 시대의 찬송은 우리 마음으로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나서 언제 다시 악기가 등장합니까? 계시록, 환난시대, 천년왕국입니다. 그때에 많은 악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악기와 관련해서 성령께서 베토벤처럼 급격한 변화를 하신 것입니다. 악기에 대해서 갑자기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오늘날은 그와같은 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 것입니다.
모임의 방문자들이 악기가 없는 것에 대해서 질문할 때에 우리는 대답하기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