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성도 말씀

성도 : 아말렉과의 싸움 / 이명인bro

박이레 2024. 4. 24. 18:58

< 성도 : 아말렉과의 싸움 > 이명인 형제님

예,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성도를 위한 말씀 시간인데요. 주제는 '아말렉과의 싸움'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7장 8절에서 16절입니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8-16).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민족적인 구원을 받아서 이제 홍해에서 애굽 군대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첩경을 바다에 여셔서, 첩경은 지름길이죠. 그래서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심판하셨죠. 이스라엘은 이제 홍해를 건너 그들이 비록 환경은 광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라'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인데 물을 만나서 먹으려고 보니까 물이 썼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지시하셔서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다. 그 나무는 우리 주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죠.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 얼마 안 가서 '엘림'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거기에는 물샘 열둘과 종녀 70주가 있습니다. 물이 풍부하게 있는 곳이에요. 사람들은 이렇게 물이 있고 열매가 있는 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합니다만 나그네는 거기도 떠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죠. 특히 성도들에게는 나그네의 길을,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어떨 때는 쓰디쓴 것을 만날 때가 있고요. 어떨 때는 달콤함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 한 군데 머무르면 안 되는 것이죠. 야곱과 같이 싯딤에 머무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간을 짓고 거기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끝내 어디로 가야 되냐면 벧엘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올라가야 되는 곳,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 하나님이 주시는 땅 가난으로 가야 되는 것이죠. 그 가운데에는 쓴 것도 있고 달콤한 것도 있다. 그렇게 이제 지나다 보니까 이제 먹을 것이 떨어졌어요. 하나님은 만나를 주십니다. 물이 없어요. 반석을 치라. 그래서 물을 내십니다. 반석은 그리스도, 그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성령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사도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행했던 많은 업적들이 있습니다만, 잘한 것도 잊어버리고 주님 앞에 좀 부족하거나 더 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되거나 그런 것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앞에만 바라보고 목표를 향해서 간다라고 쫓아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시상대이겠죠. 그리고 그 앞길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리고 끝내 그리스도의 심판 대, 시상대에서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남은 길을 쫓아간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뒤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들, 또 아말렉과 싸워 이긴 것,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계속 전진해 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들어가야 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이 들어가 가나안을 취하라고 할 때에 들어갔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그런데 그들이 불신이 역사하죠. 그래서 광야에서 38년을 더 세월을 보내고 그리고 2세대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서 이제 신광야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데도 심판하거나 재앙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은혜를 베풀고 계시고 아직 율법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죠.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17장, 이제 8절부터 그들이 이제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이 그들을 뒤에 처진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게 아니었어요. 아말렉은 준비하고 달려듭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형성되었고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민족이 출애굽하여 싸운 첫 번째 전쟁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고, 침례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때에 반드시 원수는 공격한다. 그 첫 번째 원수가 육신을 상징하는 아말렉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가 낳은 아들이죠. 야곱, 그의 이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다라고 지어주셨죠. 그 민족이 이 민족 아니겠습니까? 그 조상이 야곱이에요. 그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그리고 끝내 야곱을 죽이려고 400 용사를 데리고 달려왔던, 그런 하나님이 막으셨던 원수죠. 그 원수처럼 대했던, "내가 내 동생을 죽이리라." 했던 에서의 자손입니다. 그 자손 역시 에서와 같이 자기 형제 민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육신의 생각은 성령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육신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우리가 주님 나라 갈 때까지, 계속 이 전쟁은 계속된다. 아말렉은 계속 약한 틈을 타서 공격하고요. 적군과 연합해서 공격하고요. 얼마나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끝내 마지막 아말렉의 기록은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 아각 사람 하만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할 계획을 세우죠. 그래서 그들의 목표는 우리들의 믿음을 완전히 거꾸러뜨리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어쨌든 계속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3대 대적이 있죠. 사단, 세상, 육신, 이 3대 대적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한번 한 절, 한 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과 물로 평안한 가운데 지내고 있을 때에 그것을 시기하는 민족이 있었죠. 육신을 상징하는 아말렉, 아말렉은 '골짜기에 사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찾지 않겠습니다만, 23편 4절에 보면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떼를 푸른 초장에서 다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때에 지나가야 될 곳이 바로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는 목자가 인도해서 골짜기를 지나 다른 초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 다음 목적지로 가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도 이쪽에서 다른 쪽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어요. 어느 모임에서 섬기다가 그러다 주님이 인도하셔서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이 있으니까 그쪽에 가서 또 영혼들을 섬길 수 있어요. 이렇게 주님이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기에 표현된 단어가 '위드미즈',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러므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말씀하셨죠.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항상 함께' 언제나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이 이쪽 초장이나 저쪽 초장으로 인도할 때 골짜기를, 음침한 골짜기, 골짜기 해가 잘 안 들어요. 그리고 그 골짜기에는 양을 기다리면서 공격하려고 하는 흉악한 짐승이 있어요. 그런데 목자가 함께 있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셨어요.
이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영적인 골짜기를 지나갈 때 아말렉이 공격합니다. 그때에 장소를 살펴보면 한 장소는 높은 곳이었고요. 한 장소는 낮은 곳이었습니다. 높은 곳에는 누가 있냐면 모세와 아론과 훌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는요. 택함을 받은 젊은 40대 중반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갈렙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나가서 한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겠습니다, 하는 군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그래서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싸우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싸움을 싸우는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주님은 이기신 분이고요. 우리는 이기는 자입니다. 요한 서신서에서 믿는 자를 '이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죠. 우리는 주님이 이기셨기 때문에 그 이긴 길을 감으로 이기는 자입니다. 높은 곳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11절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1-12).

높은 곳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몇 살이 더 많죠? 3살인가요? 예, 더 많습니다. 모세가 이때가 몇 살인가요? 80입니다. 택함을 받았을 때 80이었죠. 그러면 아론은 몇 살인가요? 83입니다. 만약에 모세가 80이면 훌은 몇 세일까요? 이 훌이 누구냐?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디에 이 훌이 기록되고 있냐면 31장 2절에, 찾지 않겠습니다. 출애굽기 31장 2절에 부살렐의 할아버지라고 나옵니다. 이 부살렐이 누군지 아시죠? 성막의 성전 기구들을 만들었던, 성막 기구들을 만들었던 장인입니다. 부살렐과 오홀리압이 만들었죠. 그 부살렐의 할아버지예요. 또는 어떤 주석에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남편이 아닌가, 이렇게 추정합니다. 사실 정확히 몰라요. 그런데 같은 건 뭐냐 하면 나이가 많다라는 거예요. 훌도 나이가 많다. 80이 넘었다. 산꼭대기에 누가 있다고요? 80이 넘은 할아버지 세 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들은요. 80이 넘었어요. 모세가 말씀하고 있죠. 시편 90편에 "인생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성경의 한계예요. 출애굽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던 게 갈렙을 제외하고 80이상 살았던 사람이 있나요? 여호수아, 갈렙 제외하고 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레위인은 그 숫자에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은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서 80이 넘으면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 낙이 없다." 시흥 모임에서도 예전에 나이 많으신 분들의 그 비율이 젊은 사람의 비율보다 훨씬 많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 아무 낙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더 잘 받아들여요. 그런 분들이,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고 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사람들이 안 받아주고 자식들하고도 또 이렇게 불화하고 참 내가 떠나야 되나? 빨리 죽었으면 좋겠네요. 이럴 때 또 예수님을 믿어요.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영적인 전쟁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기도하고 있다. 지역 교회에 나이 드신 분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 필요해요. 이제 나이 드신 분들은 이제 은퇴하시고 뒤에 앉아 있어야 되나요? 말씀대로 하면은 아니다. 가장 높은 곳 최정상으로 올라가야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합니다. 그곳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고요. 그리고 전쟁 상황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그 중간 지점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의 승패는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전쟁들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칼과 창으로 나가 싸웠나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지 않았습니까? 영적인 전쟁은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전신 갑주 중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말씀하셨죠. 영적인 전쟁의 칼이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에 복음을 가지고 마귀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구원해내는 것입니다. 그 일을 주님이 아시겠죠? 사람들을 통해서 그래서 이 전쟁은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다. 왜냐하면 전쟁의 양상을 보면 모세가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들면 전쟁이 이기고 피곤해서 손이 내려오면 전쟁이 져요. 이게 어떻게 사람의 싸움입니까?  하나님의 싸움이죠. 여기서 이제 모세가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제 손을 듭니다. 여기에 이 손은 단수로 기록돼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라고 구절에 말씀하실 때 한 손을 이렇게 들었어요. 그런데 피곤하죠. 그러니까 다른 손에 들었어요. 그래도 피곤하죠. 하루 종일 들 수 있어요? 이게 벌이에요. 저도 학교 다닐 때 뒤에서 떠든다든지 선생님 말씀 잘 안 들으면 어떻게 해요? "너 뒤에 나가 손들고 있어." 그러죠 하루 종일이요? 벌이에요. 맨손도 아니고 지팡이를 들고요.
여기 보면은 9절에 보면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팡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모세를 부르실 때에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합니다. "지팡이니이다." 그냥 평범한 목자가 양을 돌보는 지팡이입니다. 그랬는데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냐면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전에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이 부르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사람이 바나바, 권위자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그것을 흉내내면서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죠. 가족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제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도구인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나 지팡이가 이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죠? 이 지팡이는 홍의 물을 가른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행하신 것이죠.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인가요? 땅에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때 살아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세요. 그냥 땅에 뿌리를 박고 그냥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어요. 이 세상이 소망인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나무를 보고 이 나무를 내가 사용했으면 좋겠다라고 칼을 댑니다. 또는 톱을 댑니다. 도끼를 댑니다. 죽이는 거예요. 나무를, 그래야 비로소 사용되네요.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뜨거운 불에 굽고, 껍질을 벗기고, 또 목자의 지팡이 같은 경우는 뭐 이렇게 이렇게 한쪽을 불에다가 달궈서 피고 그렇죠. 그리고 처음과 다른 모습을 합니다. 거기에 이제 옻칠도 하고 칠도 하고 그러죠. 처음에 나무 모양이 아니에요. 변화된 거예요. 영적인 사람이 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영적으로 구원받았다고 바로 사용할수 있는 게 아니네요. 영적으로 하나님이 자녀가 됐다고 사용하시는 게 아니네요.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로 변화될 때에 그제서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 높은 곳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모세가 피곤합니다.
그때에 동역자가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기도로 시작합니다. 1장에, 그리고 계속 기도로 진행합니다. 왜요?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장에 보면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행하신 일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합니다. 주어, "하나님이" 동사, "행하신" 목적어, "믿음의 문을 여신 것"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여시는 것을 행하셨다. 이게 성경 복음입니다. 바울이 했다고요? 그런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손에 있는 지팡이일 뿐입니다. 근데 땅에 소망을 두고 있지 않다, 주님이 뜻하시는 모습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죠. 주님이 기뻐서 사용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 사람이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믿음에 연륜이 있는 분들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다 이렇게 기도에 연륜이 있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산꼭대기에서 깨어 기도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장로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이,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전쟁 상황을 한눈에 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밑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냥 아무나 나가서 아무렇게 싸워라가 아니라 지도자를 세웁니다. 여호수아를 세우죠.

디모데전서에서 보면, 찾지 않겠습니다만 디모데를 이제 일꾼으로 앞서 싸우는 자로 세웁니다. 그때 디모데전서 4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아마도 "네 연소함을 없이 여기지 못하게 하고" 40세가 안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5가지 본을 믿는 자들에게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젊은 자들 가운데 싸움에 앞장서 싸우는 인도자인 것입니다. 5가지 본은 말, 행실, 사랑, 믿음, 정절입니다. 말, 언어. 생활이 은혜스러운 말이 나와야 되는 것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하는 것 같이 말해야 되는 것이죠. 행실, 그의 삶의 방식이 믿는 사람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죠. 믿음, 하나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죠. 어떤 급박한 상황에 자신의 생각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일을 한다. 정절, 불순함과 타협하지 않는다. 항상 순결하고 깨끗하다. 정절을 지킨다. 그리고 끝내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할 때 이게 헬라어로 기노마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형, 계속해서 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이 되다.
그리고 공적으로 섬기는 일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인데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내가 잃을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읽는 것, 공적으로 지역 교회에서 성경을 읽죠. 권하는 것, 그리고 그 읽은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을 권하고 격려하죠? 가르치는 것, 그것을 풀어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죠. 착념하라, 지속적으로 몰두하라. 이런 자가 맨 앞에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인도자는 앞에 서는 자라는 뜻이죠. 맨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인도자이십니다. 참 인도자, 참 목자, 맨 앞에 서셨죠. 예루살렘 올라가실 때도, 골고다를 향해서 올라갈 때도 맨 앞에 서셨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실 때 넘어지시고 또 넘어지셨어요. 그래서 구레네 시몬을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셨어요. 그런데 그 십자가 앞에서 걸어가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인도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이 광야 길을 건너서 홍해에 들어가기까지 주님은 맨 앞장서셨어요. 법궤가 이천규빗 앞에서 행하고 이스라엘이 장막 칠 곳을 하나님이 찾으셨어요. 불기둥과 구름 기둥, 낮에 구름 기둥, 밤에 구름 기둥 가운데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셨어요. 그리고 그 구름 기둥이 머무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은 성막이었고 사방으로, 근방에 레위 자손들, 제사장이죠.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청막을 치고 그 사방으로 이제 세 지파씩 장막을 쳤죠. 중심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움직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따라갑니다. 주님이 인도자의 본을 보여주셨고 그리고 지역 교회에도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모세 아론 후은 높은 곳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승패는 이 기도에 달렸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성도들이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해서 교회가 세워진다, 맞아요. 협업하는 거예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도다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이고요.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출 17:12).

주님 일은 뛰어난 영적 지도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가 필요하다. 기도는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산해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옥에 갇히고 그 뒤에는 매맞기도 하고 그리고 풀려났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어디냐면은 동료들에게 갔다. 그리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냐면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하감하옵시고 종들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어요. 이 상황을 바꿔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십시요. 이 전쟁은 주님이 이기시는 전쟁입니다. 이 상황 가운데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때에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가 택함을 받고요. 그리고 갈렙이 택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로 여호수아가 기록돼요. 갈렙은 별로 기록이 안 돼 있어요. 나중에 가데스 바네아에 들어갈 때 그때 갈렙이 나오고요. 가나안에 들어가서 헤브론을 받을 때, 그리고 85세인가요? 그때 그 헤브론을 취할 때, 그때 그 갈렙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2인자 같아요. 그런데 불만 사항이 전혀 없어요. 주목받는 형제들이 있어요. 주목받는 형제가 있어요. 그런데 주목받지 못하는 형제들이 실망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동역하는 것입니다. 함께 힘을 합치는 거예요. 팔은 모세가 드는 거예요. 지팡이는 모세가 잡고 있어요. 그러나 돕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역 교회들의 교사 형제님들이 있어요. 가르치는 교사들, 또 전도자들이 있어요. 눈에 띄게 주목을 받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자신의 힘으로 주님 일을 다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역 교회가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 돕는 것은, 그런데 주님이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스도의 시상대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우리가 아는 대로 상급받지 않을 거예요. 주님이 아시는 대로 상을 주실 거예요. 우리가 아는 대로라고 하면 아나니아 삽비라도 상 받아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속였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신뢰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내 모든 것이 주님 것입니다. 동기가 이렇게 돼야 되는 것이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죠.

이 영적인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전쟁에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모세가 팔을 들면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지기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이기겠네? 그런 거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데 일부 한두 사람의 힘으로만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군사들을 총동원해서 싸우시는 거죠. 이 하나님의 싸움에는 예외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다 참여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아말렉 전쟁 말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우는 싸움이 있습니다. 발로 밟는 것을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가난에 요단강 서편 지역, 하나님이 처음에 가난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그 땅, 그 땅을 싸우기 전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머물겠다 했던 두 지파 반이 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두 지파 반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양 우리간을 짓고, 집을 짓고, 자녀 처자들을 남겨놓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가서 싸우겠습니다. 함께 가 싸웠어요. 최선을 다해서 싸웠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손해가 있는 게 있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습니다. 원래는 요단강 동편 지역 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갔어야 됩니다. 요단을 건너 갔어야 돼요. 그런데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뒀습니다. 그리고 일부 군인들을 남겨놓습니다. 왜냐하면 지켜야 되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그리고 나머지 택함을 받은 두 지파 반의 군사들이 건너가서 약 6년간의 전쟁을 다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잘했어요. 그런데 그 전쟁을 다음 세대가 못 봅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와 갓 문화세 반지파 지역이 제일 먼저 무너집니다. 다음 세대에게 전쟁을 보여줘야 됩니다. 이 전쟁은 사람의 힘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이다. 그래서 어른 집회에도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참석해서, 자녀들이 참석해서 함께 앉아 있으면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을 배워야 되는 것이죠. 구원도 사람의 힘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구나. 다 배워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배운 것은 지금은 잘 모르지만, 50대, 60대, 70대까지 기억되는 겁니다. 저도 주일학교 때 외웠던 말씀들이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잖아요. 도움이 된다니까요. 그때 배웠던 말씀들, 대부분 다 잊어먹지만, 몇 말씀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니깐요.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충격을 받고 있다니깐요. 주님이 오신다.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 충격을 받았다니까요, 초등학교 때.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때 예수님을 믿어야지 하고 막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속으로, 겉으로는 그냥 예수님 믿었어요. 천국 갈 수 있어요. 그러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믿으면 천국 가나? 더 열심히 믿어야지. 교회 열심히 나오고, 말씀 열심히 듣고, 하나님 말씀 많이 외우고, 어쨌든 그러다가 나중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2세대 자녀들에게 이 전쟁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두 지파 반이 먼저 외세의 침략을 받고 무너집니다.

르비딤에서의 이 전쟁, 전쟁에서의 싸움에 모든 군사가 나가서 싸우는 전쟁입니다. 지역 교회에도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님들이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싸우는 것입니다. 기도도 우리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싸움도 우리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그 전신 갑주에서, 갑주 중에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 이렇게 전신 갑줄을 입으라고 7가지 무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무기를 가지고 나와 싸우는 것입니다.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영적인 칼과 방패와 투구, 기도로 싸우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세대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분열왕국이 생깁니다. 북이스라엘, 남유다, 남유다의 선한 왕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악한 왕도 있습니다만, '아사'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구스 100만 대군이 쳐들어옵니다. 아사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14:11).

이 전쟁은 주님이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저쪽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놀라운 기도입니다. 이게 왕의 기도예요. 이길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싸우고 싶어서, 기뻐서 싸우시는 전쟁이에요. 그리고 여호사밧이 이렇게 암몬, 모압, 세일산 사람들이 동맹하고 침략했을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2-13).

기도하는데 왕만 기도하는 게 아니고, 왕의 측근들만 모여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지역 교회 기도하는데 어른들만 모여 기도하는 게 아니라, 아내와 자녀와 심지어 어린 자까지 여호와 앞에 세웠습니다. 너희들도 보아야 된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말과 병거로 싸우는 게 아니다.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전쟁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전쟁이다.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산헤립이 쳐들어옵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19:19).

이게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천하 만국 중에 신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이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뜻이잖아요. 그리고 이방인들도 홀로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을 때에 한 천사가 그 밤에 앗수르 군사 18만 5천을 다 송장되게 했다. 앗수르왕 산헤립은 얼굴이 뜨뜻해서 고국으로 돌아가서 약 20년 뒤에 아들들이 반역하고 아버지를 쳐죽였어요. 그 뒤에 선한 왕 요시아가 있죠. 요시아, 참 율법을 준수하고 선한 왕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왕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산당을 다 훼파합니다. 심지어 여호사밧도, 히스기야도 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외에 여호와의 산당도 다 무너뜨립니다.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께 예배해야 된다. 훌륭한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실수합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실수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애굽의 바로느고왕이 앗수르와 동맹하고 바벨론과 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경으로 통과해 올라갑니다. 그때 요시아가 가로막으면서 싸움을 겁니다. 그래서 바로느고가 이 싸움은 하나님이 명하신 싸움이다. 요시아와 상관이 없다. 나는 당신을, 남유다를 치러 온 게 아니라 저 위로 올라가서 앗수르와 동맹하고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는 것이다. 요시아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기도했어야 되는데, 요시아가 적에 활을 맞고 죽습니다. 그리고 남유다는 급격하게 부패와 쇠락의 길로 꺾어져버립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멸망당합니다. 히스기야, 조금 전에 얼마나 훌륭한 기도를 했습니까? 그런데 그가 앗수르와 전쟁에서 이기고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죠. 18만 5천이 앗수르 군사가 죽었죠, 하룻밤 사이에. 그런데 그것이 자기 공적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잖아요. 바벨론 사신들이 왔을 때 마치 자기가 이룬 것처럼 왕궁의 보물들과 성전의 보물들을 다 보여주었어요. 내가 이렇게 위대한 왕이다라는 것이죠. 교만이 싹틉니다. 기도가 없어요. 그때는 그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어떨 때 성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나태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닌가? 느부갓네살 왕처럼 이렇게 교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육신입니다. 아말렉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때 공격합니다. 언제 공격하냐면 우리가 승리했다. 애굽의 군사를 다 물리치고 우리가 구원받았다. 그리고 르비딤에서 이게 휴식처라는 뜻입니다.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그때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승리했다. 편안하다. 만족한다. 만나도 있고 물도 있고 편안하다. 이때 아말렉이 공격합니다. 우리가 이 정도 이루었으면, 이 정도 모임을 이루었으면, 이번에도 영혼들이 구원받고 그래서 이 정도면 됐지, 뭐. 이렇게 만족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서 있는 줄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계속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현실에 만족할 수 없다.
육신의 것들로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는 것은 잘못입니다. 부자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가난한데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죄입니다. 나에게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만족합니다. 그런데 만족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만족 못합니다. 계속 진보를 이뤄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을 계속해서 의지해야 되는 것이죠.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1-42).

그러므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죠. 오늘 복음 집회 전에 여러 형제님들이 기도해 주셨어요. 이게 산꼭대기입니다. 이 복음은 말 잘하는 전도자의 말 기술에 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주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영혼을 구원하는 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역사하실 책임감을 느끼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하시는 거예요. 구원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이 있죠. 높은 곳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합력해서 함께 손을 들어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힘써 그리스도의 군사로 앞장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승리는 주님이 주시는 승리이며 우리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리는 승리가 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영적인 전쟁을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데요.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겨서,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믿고, 또 주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뜻이 이루어져서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저희의 생애와 또 모임이 되기를 주님 앞에 소망합니다.

그리고 말도 잘 못하고, 또 학문도 없고, 또 보잘 것 없고, 또 제 직업이 농부예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박사님 초청해서 강연을 듣는데, 대전 중구 모임은 농부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들으시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셨겠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또 주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저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그동안에 사마르칸드 모임에서 잘 분별하고, 영혼 영적인 분별을 해서 구원을 확실히 받았는지 점검해서 침례를 주고 그리고 한국까지 보내줘야 되는데, 네마트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대전 중구 모임 성도님들이 많은 심적, 또는 실제적으로 또 어려움을 또 겪었을 줄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죄송한 마음도 있고 또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다 지나간 일이죠. 사도바울과 같이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서 또 함께 쫓아가기를, 주님이 준비하신 부름의 상을 쫓아가기를 또 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