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 바디매오 / 이명인bro
< 복음 : 바디매오 > 이명인 형제님
네 안녕하세요.오늘 말씀의 주제는 바디매오입니다. 하나님 말씀 마가복음 10장 46절부터 52절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46-52).
우리 주 예수님께서 3년이 조금 넘는 공생애 기간 이제 마치시는 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이때에 두 소경을 만나시는데요. 마태복음에 보면 두 소경이라고 돼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한 소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경에 대한 부분은 중요하기 때문에 사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하다. 자세히 보라,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지를 주의에서 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제 "허다한 무리와 함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유월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절기를 지켜야 되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1년에 세 절기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어떤 축제가 있죠? 구정이 있고, 추석이 있고, 그렇죠. 그런 것처럼 이스라엘에도 이때가 축제입니다. 그런데 우리하고 좀 다른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과 관련된 축제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유대인이면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이든지, 무조건 예루살렘으로 다 모이게 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었겠죠. 그때에 이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인인데 북쪽에서 오는 사람들이면서 동쪽에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왜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올 때 여리고를 지나가냐면 그 북쪽에서 갈릴리 지방 쪼개서 내려올 때에 사마리아인들하고 이 상종을 안 했어요. 원수지간이었어요. 구약의 역사를 다 이 시간에 생각해 보면은 1시간이 부족합니다만, 그 북이스라엘은 아수르로 끌려갔다가 이제 돌아온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이제 북이스라엘에 와서 이제 살았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살았기 때문에 인족이 막 혼혈인이었어요.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섬기는 하나님 그대로 섬기지 않았어요. 자기들도 나름대로 제단이 있고 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들과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쪽에서 오다가 사마리아로 오지 않고 요단을 건너서 동쪽으로 해서 다시 요단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서 여리고로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루트를 사람들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절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허다한 무리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석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역으로, 또 고향으로, 고향으로, 그렇게 몰려드는 것처럼 그렇게 허다한 무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도 그 무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까요? 주님이 유월절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이 '유월절'이라는 뜻은 이집트,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가 문 좌우 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져 있는 집, 피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진 집이 구원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넘어가는 절기, 넘어가는 절기 해서 유월절 구원받는 것을 의미해요. 왜 넘어가는 게 구원이냐면,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집은 심판치 않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있느냐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애굽에서의, 이집트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양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유월절 양 잡는 시간에 십자가에서 오후 3시, 양 잡는 시간이거든요. 이게 저녁 제사 드리는 시간이거든요. 그때 십자가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 죄인들이 그 자신의 죄의 형벌로 심판받고 또 저주받고 사망에 이르러야 되는 그 심판을 주님이 대신 담당하는 그때, 유월절 양 잡는 시간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오신 목적이시죠. 그 길을 이제 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길을 이제 마지막 지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리고를 지나가시면 다시는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육체를 가지고 이제 다시 그곳을 방문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길이십니다. 이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가는 사람들은 함께 동행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또 기적을 행하시고 하는 걸 보겠지만, 여리고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찬스, 기회입니다.
여리고성은 어떤 곳인가? 여리고성은 저주받은 성읍입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 6:26).
이렇게 저주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있었어요. 첫 번째 장애물이 열리고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강히 거부하는 성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땅을 내어주지 않겠다. 문을 열지 않았어요. 걸어 잠갔어요. 하나님을 거부하는 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을 6일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날은 성을 7바퀴 돌아라. 총 13바퀴를 돌고 외쳤을 때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성벽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지금도 저는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끝까지 거부한다면 마지막 7일, 이게 마지막 날이에요.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입니다. 최종적으로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마지막 신약 성경에 기록한 7가지의 심판 중에 마지막 심판에 해당하는 백보좌 심판에서 죽은 믿지 않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을 다 살려내서 백보좌 심판에 세워서 심판하고 지옥에, 형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어요. 그런데 그때에 구원받은 가정이 있었죠. 라합이라는 가정이었습니다. "그 여리고 성벽을 다시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면 그것은 저주받는 것입니다. 어떤 저주인가요? 지옥에 가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오셨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완강하게 문을 철저히 닫고, 마음 문을 닫고 복음을 거절하면 줄 수가 없어요.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값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필요가 없이 감사합니다.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떤 분들이 이렇게 선물을 할 때가 있죠. 생일 선물로 자녀들에게 또는 조카들에게 선물합니다. 저도 어느 결혼식에서 조카를 만났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래서 지갑에서 이렇게 용돈을 꺼내가지고 "반가워, 선물이야. 받아, 용돈이야." 그랬더니 이 돈을 냅다 집어던지는 게 하는 거예요. 얼마나 괘씸하던지, 이럴 수가 있나? 아니 그냥 감사합니다. 받으면 되는데 왜 그것을 집어던지고 가지 너무 화가 나서 쫓아가서 손에 쥐어줬어요. "가져. 그리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돼." 그랬더니 받긴 받았어요. 근데 조금 속이 불편했어요. 그냥 주는데 안 받아요. 주님이 지금까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천국에서 영생 복락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셔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에요. 자기 죄로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죄의 문제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그 죗값을 대신 지불해 주셨어요.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녀들을 위해서 학비도 대신 지불해줘요. 옛날에는 자녀들 대학 보낼 때 소 팔아서 대학 보내고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요. 농촌에서 농사하시는 분인데 너무 팔아가지고 그래서 대학 보냈어요. 그게 어떻게 일군 밭인데, 어떻게 만들어낸 논인데요. 어떤 땅은 개간해가지고 만든 땅인데 그것을 아낌없이 자식을 위해서 내놓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주셨단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런데 그 은혜를 자녀들이 이제 대학 졸업하고 그리고 사회생활, 떳떳하게 이제 사회생활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몰라요. 감사할 줄 몰라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죠. 당연히 감사드려야 되는 것이죠. 얼마나 나를 키워주시기 위해서, 나를 대학 보내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자라게 성장케 위해서,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인성교육을, 또 사회 교육을, 또 필수 교육을, 그렇게 오래 참는 가운데, 자식들을 위해서 속썩을 일도 많이 있잖아요. 그렇게 참으면서 기다렸는데 끝내는 자식들이 부모의 그 마음을 몰라준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셨는데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거예요. 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왜 우리를 죄인 되게 해가지고, 왜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남의 실과을 따먹게 해가지고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들었냐고 막 왜 나를 낳아주셨냐고 말이지, 나를 안 놔줬으면 나 이 고생 안 할 텐데, 이렇게 막 대드는 것입니다. 불효자죠.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만드신 창조자이십니다. 부모 자식에게는, 부모가 있는데 나를 낳아주신 분을 아버지라고 그럽니다. 나를 키워주신 분을 어머니라고 그럽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것에 대해서 당연히 감사드려야죠.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없다, 그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됩니다. 어떻게 설득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가운데도 부모님은 계속 자녀들이 정말 참 사람이 되기를, 부모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막 돈만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를 부모는 계속 기다리며 바라고 있는 것이죠. 이거보다 더 큰 마음, 더 큰 사랑 가지고 오래 지금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저주받은 성 여리고라고 말씀드렸죠. 이 저주받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이 여리고에 사는 사람 그중에 바디매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들의 모형으로 딱 제시해 주신 거예요. 우리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자인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저주받은 땅, 아담이 범죄했을 때 땅이 저주받았잖아요. 그래서 땀을 흘려야 이제 곡식 수확을 할 수 있고 엉겅퀴를 내잖아요. 가시와 엉겅퀴를, 그러한 저주받은 땅에 우리가 살고 있죠. 그래서 한 번 제초제 뿌리면 저도 이제 농사를 하니까요. 제초제 뿌리면 풀이 안 났으면 좋겠는데, 또 한두 달 지나면 여름에 보면 금방 또 자라요. 그죠? 그리고 왜 이 벌레들이 다 막 있어가지고, 그래서 이 농부들을 수고롭게 하는지, 살충제를 뿌렸는데 또 다른 벌레가 달려들고 말이죠. 참 수고롭게 하고 참 힘들게 합니다. 이 땅이 그래요. 그런데 농부만 그런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편 90편에 말씀하셨죠. 수고와 슬픔뿐이다.
신속히 가니 인생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헛된 세상, 수고 많은 세상에, 저주받은 세상에 이 바디매오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주님께서 이 바디매오 앞으로 지나가시네요. 그런데 그때에 그가 46절에 보면은 끝부분에 "디메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모든 사람들은 어떤 길을 갑니다. 그 길이 눈에 보이는 길일 수도 있고요. 또는 무형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성공하는 길, 부자 되는 길, 뭐 이런 여러 가지 또 건강해지는 ,길 이런 여러 가지 길들이 있죠. 그 사람들은 그 길을 추구해요. 그런데 저도 건강해지고 싶어서 매일같이 걷기도 하고, 자전거 타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합니다. 또 다리 근육이 중요하다네요. 다리 근육 운동도 하고, 그런데 또 며칠이 지나면 도로 운동을 안 하면 근육을 점점점점점 잃어가는 거예요. 특히 나이가 들면 자꾸 근육이 줄어가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운동을 하고 건강하려고 노력합니다만 끝내 어떻게 돼요? 병 들고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게 너무 헛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주받은 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이제 이 한 소경이, 거지가 이제 앉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길을 떳떳하게 걸어다니는데 이쪽으로도 가고 저쪽으로도 가고 이 거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소경이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구걸하는 것밖에, 아마도 그 길에는 많은 소경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경들 중에 이 한 소경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특별한 일이 생기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늘에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주목하십니다. 이 한 사람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에게 주목하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서도 감사하실 때에 100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도록 찾으시는 것을 감사드렸죠.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는데 찾도록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한 마리 양, 오늘도 그 한 마리 양, 바로 나를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신다. 너무 감사한 것이죠. 바로 이 바디매오를 만나시기 위해서 주님은 여리고로 지금 지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7).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중에 한 분이다. 선한 선생님이다. 하늘로서 오신 분이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당시에 나사렛 예수라는 뜻은 조금 비하하는 말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면서 비하하는 말입니다. 어떤 말과 비슷하냐면 사마리아 사람 아니야? 서로 상종 안하는데, 그렇게 비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시다. 이렇게 설명해 주었어요. 그런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은 메시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구약에서 세 부류의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죠. 왕, 선지자, 제사장, 이분이 다윗의 자손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은 선지자이며, 이분은 대제사장이면서, 자기 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 거룩에 자기 죄로 말미암아 이르지 못했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 피로 그 죗값을 지불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것이거든요. 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지나가시는 것을 듣고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네요.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욱 48절에 더욱 심히 소리질러 계속적으로 부르짖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 그때 예수님이 발을 멈추시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찾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어디 계시는지 정확히 몰라요. 그래서 더 크게 부르짖습니다. 찾습니다. "예수님 어디 계시나요?" 그래도 예수님이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더 크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하는 자에게 주님은 만나주시고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사람은 그 아버지가 '디매오다'라고 기록하고 있죠. 그래서 디매오의 아들이다. 이 사람의 이름이 바디매오입니다. 맞나요? 바디매오죠. 그 이름이 맞습니다만 사실은 또 아닙니다. 이 사람 이름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세상에서는 무명이에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소경 거지,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누가 알아주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 거예요. 바디매오, 이 '바'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디매오는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그 아버지는 알아요.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은 몰라요. 그냥 디매오의 아들, 그게 바디매오예요. 바디매오라는 뜻은 디매오의 아들이야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명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그런 자기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길을 멈추십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보잘 것 없고 무명이고, 또 연약하고, 뭐 별로 이런 게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셔요.
지금 얼마나 바쁜 길인지 몰라요. 예수님은 이 길을 지나셔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서기관에게 이제 이방인에게 넘김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골고다에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야 됩니다. 지금 바쁜 일정을 가지고 계세요. 그 사이에 또 누구도 만나야 되냐면 삭개오도 만나셔야 돼요. 이 여리고는 두 성이에요. 그래서 여리고성에서 나가다가 또 다른 복음서에서 여리고성을 들어가시다가 이렇게 돼 있어요. 열리고성이 두 성이에요. 북쪽에 구 여리고가 있었고요. 남쪽에 그거보다 작은 규모의 신 여리고가 있었습니다. 거리는 약 1.6kg 정도 떨어졌다라고 추정됩니다. 그 사이에 바디매오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주님이 왜 아시면서도 그냥 그렇게 계속 지나가고 계셨을까요? 이러한 영혼을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목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만나기를,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계시록 22장 17절에 보면 하반절에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리라" 두 부류의 사람을 주님이 기대하고 계시는데, 첫 부류의 사람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생명수를 받으러 주님께 나아오라, 할 때에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목마른 자입니다. 얼마나 목마른지 타는 듯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자가 나오라. 두 번째 부류는 원하는 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얻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섬기는 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부류가 있어요. 두 부류 중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원하는 자는 죄인인 것을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두 부류, 다 괜찮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기를 주님이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에요? 타는 듯한 목마름을 가지고 부르짖는 사람 이러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러한 자에게 꼭 만나주신다. 이러한 자에게 생명수를 주신다. 생명수가 뭐예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신다. 이런 말씀이죠.
여기서 보면 처음에 48절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냐면 바디매오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요. 듣기 싫겠죠. 얼마나 소리 질렀는지,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그래요. 얼마나 크게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부르는지 막 꾸짖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49절에 "머물러 서시면서 저를 부르라" 그때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경을 부르면서 "안심하라.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같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꾸짖다가 나중에는 가라 할 수도 있지만,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눠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를 원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요. 이 죄는 반드시 심판받는 것 알아요. 그게 정의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국가에 법이 있는 것입니다. 법은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악한 자들을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경찰이 의로운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것이지,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정의는 실현돼야 돼요. 그래야 선의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은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법은 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있어야 국가인 것입니다. 국가가 영토, 주권, 국민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법이 없는 국가가 있나요? 무법 천지가 되는 것이죠.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죄인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히틀러는 자살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재판을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디서 재판을 받아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받고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공의로운 것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요.
많은 사람이 꾸짖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저를 부르라 하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소경을 "일어나라. 안심하라. 너를 부르신다."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오도록 주님이 당신을 부르십니다. 안심하십시요. 뭐 어려운 자리도 아니고요. 당신을 위한 자리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나가시죠라고 권했던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은 주님 가까이 계신 분들입니다. 참 좋은 분들입니다. 처음에는 "왜 자꾸 권해? 내가 믿고 싶으면 믿는 거지." 그럴 수 있지만 주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 걸 알기 때문에,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요. 뭐 헌금해라. 이런 의미 아니라 그냥 몸만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고 권합니다.
그때 소경의 행동이 50절에, "겉옷을 내어 버리고" 이때는 지금과 같이 이런 옷을 만들 때, 대량 생산 공장에서 이렇게 대량 생산하는 체제가 없었죠. 그래서 집에서 가내 수공업이죠. 집에서 이렇게 바느질로 또는 이렇게 떠서 옷감을 만들고 옷을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옷들이 비쌉니다. 그중에서 이 겉옷이라고 하면 이것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귀한 거예요. 어떻게 말씀하셨냐면 출애굽기 22장 26절에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이게 겉옷입니다. "전당 잡거든" 돈을 빌려갔는데 안 갚아요. 그래서 돈을 갚을 때까지 전당 잡는 거예요.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아직 돈을 갚지 않았는데 이 겉옷만큼은 돌려줘야 된다. 그래서 밤에 덮고 자고 아침에 다시 그 채권자에게 돌려줘야 돼요. 아직 돈 안 갚았으니까 그러면 채권자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낮 동안에 가지고 있다가 채무자에게 회계해가지고 그냥 또 돌려줘야 해요. 참 귀찮은 일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왜요? 가난한 자를 위해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과부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어요. 과부를 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나그네를 위하셔요.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어떤 자가 나그네냐면,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이 유대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8일 만에, 태어난 지 만 7일째 할례를 받습니다. 이게 진짜 유대인이 그런데 이방인으로 있다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이제 돌아온 이방인들이 있어요. 이들에게는 토지가 없습니다. 자기 재산이 없어요. 이들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이들을 도와줘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꼭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어요. 다 찾으면 시간이 없고요. 이 겉옷은, 이 거지에게 이 겉옷은 밤에 덮고 자는 모포와 같은 것입니다. 밤에 서늘한 그 기운에 감기 걸릴까 봐, 주님이 이렇게 규정을, 율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채권자는 아무리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았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것을 돌려줘야 된다. 언제까지냐면 아침까지. 그런데 이 귀중한 겉옷을 내어버립니다. 그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이 표현은 자세히 보면은 '나아가거늘' 아니에요, "나아오거늘" 예수님 쪽에서 지금 이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야, 예수님께 나가 봐."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예수님 편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그런데 이 사람은 겉옷을 내어 버리고 옵니다.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요 이 사람 거지잖아요. 자기 집이 재산 1호라면, 이 모포 겉옷은 재산 2호인 거예요. 이것을 버리고 갔다. 이 사람의 우선순위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선순위가 있어요. 돈 버는 것일 수도 있고요. 또는 명예를 얻어서, 이제 높은 장관직까지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고요. 다 우선순위가 달라요.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건강하게 되는 게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하는 사람들 있죠. 담배 피는 즐거움, 술 먹는 즐거움, 다 버리죠. 또 이런 즐거움도 있죠. 먹는 즐거움 말이죠. 그런데 뱃살이 늘고 지방이 늘어나면 건강이 안 좋다며요. 그래서 좀 적게 먹고, 채소 위주로 먹고, 그래서 우선순위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겉옷을 버렸다. 그 사람의 우선순위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을 수 있어요. 나의 집안에서, 나의 사업체에서, 또는 학교 공부하는 것, 숙제하는 것,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 중에 오늘 하나님 말씀 앞에 나오는 게 제 우선순위였습니다. 이게 참 은혜 받을 만한 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소경이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말씀드립니다. 51절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는 이제 선생님이여, 이렇게 돼 있는데 이게 원어에서는 '랍오니'라는 것입니다. 랍비보다 다른 단어예요. 더 높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이것이 똑같은 소경이 열리고 소경이 고침받는 장면이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돼 있는데, 거기서는 이 단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주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여'라고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아직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지 않으셨어요. 세상 죗값을 다 지불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 사람이 구원받은 건 아닙니다. 다만 아직 이 사람의 죄에 대한 심판이 유예되고 있는 것뿐이죠. 예수님이 반드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것이고, 그리고 그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실 것이고, 그 예수님을 구원자로,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렇게 됐으리라고 이제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바디매오를 통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대한 그림자 모형으로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죠? 51절에 주님이 묻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되 내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가 소원을 말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 인생 가운데 한 가지 소원을 말해봐라, 하면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자식이 잘 되는 거요? 자신이 건강한 거요? 또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는 거요? 아니면 내가 목표했던 그 물질, 돈, 늘 다 벌어서 부자 되는 거요? 이 소경의 소원, 한 가지 소원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경은 보게 되었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래, 그러면 내가 눈을 뜨고 보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말씀하셨냐면은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저가 곧 보게 되어" 주님은 놀라우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곧, 기적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과 성경의 기적은 다릅니다. 기적은 그 효과가 계속돼야 됩니다. 병이 났으면 계속 건강해야 됩니다. 그때는 잠깐 건강한 것 같은데 또 아,파 그런 게 아니라 병이 나았다. 계속 건강해야 됩니다. 눈이 보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계속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즉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가 완전한 것입니다. 눈을 보는데 처음에 희미하게 보이다가 하루 이틀 지나니까 조금 더 잘 보이다가 일주일 지나니까 잘 보여요. 이런 게 아니에요. 즉각적인 거예요, 완전해요. 효과가 계속적인 거예요. 이 세 가지가 단번에 이루어져야 기적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어떤 훌륭한 의사 선생님 만났더니, 한 1년 치료했더니 암 병이 나았어. 야, 기적적으로 나았어. 이게 기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이 기적입니다. 곧 보게 돼요. 죄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무엇을 구했냐면은 제 육신의 눈이 앞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눈을 보게 되면은 무슨 감사하죠. 그런데 다시 눈을 감게 되는 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와요. 죽는 날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이 눈물 흘리셨어요. 성경에서 주님이 세 번 우신 게 나와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루살렘 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다보시면서 그 백성들을 주님을 영접지 않음과 그리고 로마의 군대에 의해서 짓밟힘을 당하고 멸망당할 것을 내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어요. 전부 다 주님은 눈물 흘리시는 게 사람 관련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주님이 무엇이 중요한 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이 보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구원받는 것이다.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라, 하고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불이 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 대피합니다. 또 어떤 의로운 청년은요, 집집마다 막 두드립니다. "불 났어요. 대피하세요." 그래서 다 대피했어요. 그런데 불난 집에 막 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이거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제정신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들어가냐면 저 안에 우리 아들이 있어요. 지금 잠자고 있어요. 이 소리를 들으니까, 소방관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 들어갑니다.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그런 거예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면 이방인의 손에 넘기고 재판 받으시고 그리고 사형 받으실 것을 아시면서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요?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라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구약의 두루마리 성경책에 기록한 대로 내가 이 일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원망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못 박하는 자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원수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아무리 극악한 원수라도, 십자가에 예수님 양편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 둘이 달립니다. 한 강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죄를 졌기 때문에 죽는 게 당연하다. 이 정도로 죄인이에요.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한 강도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 저를 생각하소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흉악무도한 강도도 구원받았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죽음으로, 심판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마지막 여리고를 지나가는 길에서 바디매오가 주님을 만납니다.
그럼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형체를 입고 '들어오셨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가 있지만 우리 주님은 동정녀, 처녀, 마리아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계십니다. 태어나신 게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들어오셨어요.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것입니다. 그 들어오신 이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디매오입니다. 한 사람을 만나시기 위해서 이 길을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가시는데, 그 바디매오에게 바로 가시는 게 아니라 마치 그냥 지나가시는 것처럼 조금 더 시간을 끄셔요. 더욱 간절히 주님께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52절에 끝부분에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쫓으니라" 여기서 이제 '길에서 쫓으니라'라는 단어가 이 쫓다라는 동사가 계속적 동사입니다. 그래서 주님 만나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주님 제가 이제부터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저희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나요? 십자가로 나아가시는데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라갔다.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을 버렸죠. 다 도망갔었죠. 그러나 그 뒤에 교회가 형성되고, 또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순교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기뻐서, 감사해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로부터 해방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됐죠. 우리 독립군들이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훌륭하신 분들이에요. 그래도 독립할 수 없었어요. 근데 어느 날 독립했습니다. 8월 15일, 1945년, 어떤 일이 있었죠?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일본 천왕이 손을 들었어요. 그리고 라디오 방송으로 방송이 됩니다. 순간 대한민국은 광복의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루지 않았는데, 다른 힘에 의해서 우리가 광복을 얻은 거예요. 자유의 빛을 받은 거예요.
희생은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치르셨는데, 그 은혜와 광복을 우리가 얻은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광복입니다. 죄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이 원리가 똑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말씀 한 곳 보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성경에서 "보라"라고 말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드시 보라!" 이런 의미입니다. 에덴 동산의 문을 지키셨어요. 동편의 문을, 그리고 성막의 문도 이제 성막이 이제 가나안에 들어오게 되고 그리고 성막의 문이 닫혔습니다. 다윗 시대까지 성막이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성전이 이제 시대가 열립니다. 성전의 문도 닫힙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가보면 돔 오브더 락이라고 하는 이슬람 사원이 수세기 동안 지금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될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을 다시 추억하고 그리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불로초를 찾으려고 다니지 말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바라봐야 될 분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 주님이 부활하셨어요. 주님이 누우셨던 무덤이 비어 있어요. 그것을 보래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나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신, 피 흘려 죽으신 그 예수님을 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라는 거예요.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내 손과 옆구리를 보라." 도마에게는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고 믿는 자가 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아담도 끝내 벌거벗음으로 드러났고, 노아도 끝내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 벗었어요.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자라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 주 예수님을 영접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그리고 남은 생에 주님을 섬기시는 자유를, 평강을,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 앞에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