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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 고린도전서 15장 1-19절(요약)

박이레 2024. 3. 2. 18:39

< 성경읽기 : 고린도전서 15장 1-19절 > 24년 3월 1일 금요일(요약)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5:1-19, 개역한글)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개요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읽기를 주된 형식으로 하는 이유는 모든 성도님들이 성경을 다 읽어오시고, 말씀을 묵상하셔서 공통된 인식을 갖고 함께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순종하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형제님들은 한마디씩 말씀하셔서 기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패널들을 세운 이유는 최소한의 침묵을 막기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함께 이루어간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린도전서 개관을 다시한번 하겠습니다. 1-6장까지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투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들은 소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1-6장까지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1, 개역한글)

7-11장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대해서 답한 것입니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고전11:18, 개역한글)

다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들은 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앞부분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세상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11장부터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11장은 또 누구에게 듣습니다. 부활이 없다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룹니다. 왜 이러한 순서가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15장만 교리 문제입니다. 교리 문제를 왜 마지막에 다루는가를 생각할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을때 두가지 책임이 주어집니다. 진리의 기둥입니다. 복음의 진리,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터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경건한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잘못된 교리를 가지면 반드시 삶이 무너집니다.

오늘 살피고자 하는 부분은 고린도전서 15장 1-19절까지입니다.
15장은 12절의 질문을 가지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가운데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사도바울이 설명합니다. 1-11절까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다룹니다. 부활을 입증합니다. 13-19절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7개의 비극적인 결과가 나옵니다. 20절부터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생기는 영광스러운 결과가 나옵니다.

1-2절은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복음을 증거합니다. "형제들아" 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지나갔다고 주장하자 출교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출교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 조재훈 형제님 : 1-11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구약성경의 증거, 목격한 자들의 증거가 있습니다. 알게 한다는 것은 일깨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복음이 어떠함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소 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완료시제입니다. 구원받은 효과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2절 후반부에 "구원을 얻으리라"는 현재형 시제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은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와같은 상태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고 있는 증거가 그들이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헛되이" 라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첫째는 아무런 목적없이, 이유없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때 그들의 지성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은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은 그들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의심한다면 그들은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 이기범 형제님 : 1절에서 "형제들아"라고 시작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더구나 형제들아"라고 시작합니다. 전장에서 내용이 연결될 때에 이렇게 연결되는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은 14장은 교회의 여러가지 실행이 나오고 부활이 나옵니다. 그래서 14장과 15장이 끊어진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14장과 15장은 연결되는 것입니다. 14장에서 교회진리가 문제가 있다면 15장에서 부활의 진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교회진리는 복음과 연관심을 보게 됩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15장의 맥락에서 본다면 3-5절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에 "구원을 얻으리라"가 현재형 동사입니다. 이는 사실이고 진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은 복음이 실제적으로 현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이 복음에 관해서 이 3절의 내용에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을 계속해서 연결해서 얘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 그러나 구원의 현재성, 구원의 미래성에 대해서 그들이 혼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헛되이 믿다"는 것은 생각없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고 믿게하는 것은 저희들이 지양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이 굳이 이렇게 가정법을 쓰는 이유는 그렇게 되었을때 그 결과가 너무 심각하기에 강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1절에 사도는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는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인데 이들에게 다시한번 복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집회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도자들에게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알게하노니" 그들이 알고 있지만, 여기에는 약간 책망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것을 다시한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줄 것입니다. 사도는 마지막에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처음부터 나왔던 분쟁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부활의 교리를 알고 있다면 형제들간의 분쟁의 문제도 해결이 될 것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1절에 "받은 것이요"라고 합니다. 복음은 자기가 생각해 낸것이 아니고 전도자가 전하든지 해서 반드시 받은 것이죠.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받았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전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았습니다.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선 것이요"라고 합니다. 받은 사람이 말씀으로 그 가운데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5:2, 개역한글)

믿는 자들이, 받은 자들이 서 있는 은혜입니다. 서있다는 것이 구원의 신분, 받은 은혜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한 싸움을 싸우고(영-스텐드 어게이스트)"
구원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시고 믿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람쪽에서의 반응이 항상 있습니다.

2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는데 한글성경에는 미래형처럼 써 있지만 이것이 현재형입니다. 이는 현재형일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그러한 조건을 갖췄을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네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장사지내셨다. 부활하셨다. 목격자들이 있다. 이 네가지를 받아들여놓고, 부활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대항하게 됩니다. 이 네가지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에 흔들리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헛되이"라는 단어가 앞으로도 계속 나옵니다. 2절, 14절, 17절에 나오는데 한국성경으로는 똑같지만 원어성경에서는 각각 다 다릅니다. 성경공부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명히 알고 확신해야 거짓에 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3절부터 사도바울은 성경의 증거를 댑니다. 두번째는 목격자들의 증거를 댑니다. 계속 3절부터 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조재훈 형제님 : 3절부터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받은것을 전했습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먼저" 이는 시간상의 먼저가 아니라 그 중요함에 있어서 먼저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먼저 전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복음에도 중요한 중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성경대로" 성경대로 전했습니다.

시편 22편, 이사야 53장은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합니다. 부활하심은 레위기 13장의 초실절, 시편 16편 10절, 이사야 53장 10절이 증거하는 구절 중에 몇 구절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성경대로" 죽으셨다, 장사되셨다. 다시 살아나셨다, 이러이러한 사람들에게 보이셨다. 이 네가지를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설명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의식과 예표로 보이신 것을 다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합니다.
중간에 장사되었다, 보이셨다는 것은 죽으심을 증명하는 것은 주님께서 장사되심입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심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시제가 부정과거형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데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만 완료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주님의 부활에 대한 모든 곳에서) 3-5절 초반까지 그러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 3-8절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말씀대로 네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제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4절에 "성경대로"가 시편 16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3장에서 시편 16편이 인용이 됩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한다"
저는 5-8절까지를 시간 순서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이나 증거의 무게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서신서에서 베드로보다는 게바로 부릅니다. 그 뜻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15장 5절의 게바는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르실때를 생각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가 쓰여진 시기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25년 정도가 흐른 후입니다.
두번째는 열두제자입니다. 요한복음 19장 이하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11제자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왜 12제자를 포함하고 있는지 형제님들께서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세번째는 오백여 형제입니다. 정확히 언제 보이셨는지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뉴베리 형제님은 사도행전 10장 41절을 들고 계십니다. 비록 성경에 나와있지 않지만 굉장히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후에도 대부분 살아있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는 주님의 육신적인 형제인 야고보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 승천하실 때에 모든 사도, 맛디아를 포함해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하늘에 계신 주님이 보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여전히 하늘에서도 부활의 지속적 상태를 보이심을 보게 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이는 능동태입니다. 자원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다른 동사들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장사지내시고 부활하시고 보이시고,
"죽으시고" 이는 단지 죽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으셨는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주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5절 이하에서 증인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시간 순서대로 주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또 그 증인들을 선택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열둘이라는 단어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유다가 빠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열둘입니다.(?)
또 그들중에 태반이나 살아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이는 그들이 부활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7절에 왜 모든 사도를 언급했을까 하는 퀘스천 마크가 생깁니다. 앞의 열둘과 거의 차이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8절에 자기와 다른 사도를 대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닐까로 보여집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주님이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동사를 봐서도,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죽으실수 없는 분이, 죽지 않을수 있는 분이 왜 죽으셨는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이 확신시 되었을때 그때까지 은위하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일어나 주님의 장사를 합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님의 장사를 계획하셨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 야고보, 바울은 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나가서 운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자기를 나타내려면서 왜 숨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야고보에게 나타나셔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아니면 변화시킬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7절의 사도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에 나오는 그 사도들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 부활을 보이신 것은, 그들이 주님을 증거할 책임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는 요백여 형제가 안나옵니다. 120명만 나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행2:1, 개역한글)

이때 오백여 형제들이 이에 동참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오백여 형제는 현제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형제들아"라고 했을때 형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체 전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오백여 형제도 모든 성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는것이 좋을듯 합니다.

- 조재훈 형제님 : 11-12절에는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공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12-13, 개역한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은 자들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13-15절까지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장, 16-19절까지는 복음을 받는자의 입장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살지 못하셨으면" 부활을 뺏을 때에 전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이 헛되었을때, 복음 전도자들이 기대하는 결과도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16절부터는.. "너희 믿음도 헛되고" 그들이 믿은것이 아무 의미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임을 말합니다.

- 이기범 형제님 : 9절을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15:9, 개역한글)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15:11, 개역한글)

그런데 11절에서 사도바울과 다른 사도를 같게 표현합니다. 9절에서는 자기를 사도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데 왜 11절에서는 같은 자로 표현할까요? 10절에서는 은혜에 관한 내용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사도바울의 된 것은, 그 은혜이고 그 은혜는 헛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교제, 사귐을 가져옵니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음에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교제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희나"(11절) 바울도, 다른 사도도 만찬가지로 은혜로 전파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었느리라" 이는 부정과거형입니다. 부정과거형은 어떤 장면, 시상을 말합니다. 그것만 눈앞에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많은 동사들이 부정과거형으로 빛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김회상 형제님 : 8절에 사도바울이 자기를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조산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떠한 자였는데 주님께서 부르셨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주님과 오래 있으며 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께서 맡기신 일로 우리가 수고하게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의 은혜를 잊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성도의 삶입니다.

저희들도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전하는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모임이 동일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사도바울이 자기의 변화된 모습을 언급하는데 왜 이것이 여기서 나왔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부활이 증인들로 하여금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자격을 입을수 없는 자였는데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또 수고합니다. 이는 하늘의 것을 바라며 수고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앞으로의 전망을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고린도교회 가운데 부활을 의심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할을 부인하지 않았기에 "형제들아"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죄 용서를 받게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은 네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우리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2. 장사지낸바 되시고(분명히 죽었고) 3. 부활하셨고 4. 목격자들이 있습니다. 이 목격자들이 기꺼이 순종합니다. 사람은 거짓을 위해서 죽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 네개의 핵심적인 진리를 분명히 확신한다면 구원에 대해서 흔들릴 수 없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은 거룩하게 살수록, 주님을 닮아갈수록 겸손해 집니다. 두번째, 구원받은 사람은 수고합니다. 갈수록 수고해야 합니다. 세번째, 은혜입니다. 영광은 주님께만 가야 함을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을 바꾼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핍박했지만 그것을 주님께서는 주님을 핍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옆에 있는 성도들을 귀중히 여기고 주님을 보고,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소중한 형제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이 있느냐? 어떻게 부활하느냐? 라는 합리적인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주님의 영광을 깎아 내리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교제할 때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을 높이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