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복 있는 사람
< 시편 84편 :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복 있는 사람 > 기드온 쿠 형제님
다시 한번, 이 저녁 집회에 여러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이와 같이 오신 것에 대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 제가 이곳에서 이번의 마지막 집회인데요. 특별히 이 기회를 빌어서 여러분께서 저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시고 환대하여 주심에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에 대전 성도님들이 목포에 가면 목포의 음식이 더 나을 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건 틀린 것입니다. 그 음식보다도 참 여러분과 함께한 교제가 참 더욱 훌륭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여러 세계에 각처에 있는 성도님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우리가 새로운 모임에서 이제 처음 성도님들을 만나서 이제 친구로 사귀게 되는데요. 그 친구분들이 이제 그 후에 이제 평생 동안 알고 함께하는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동일한 줄로 메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한 찬송가를 먼저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아주 찬송을 잘하지는 못하는데요. 저는 말만 하고 통역하는 형제가 아마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노래가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84편을 오늘 같이 보고자 합니다. 이 시편 84편 전체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2).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복 주실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여기 이 시편을 이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중에 하나가 이제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것인데요. 이 84편도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돼 있습니다. 시편 8편, 81편, 84편, 이 세 가지 시편이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깃딧이 사실 이것이 무엇이는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악기의 종류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라 자손에게 이렇게 헌정된 시인 것입니다. 고라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성경에서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역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는 아주 끔찍한 심판을 받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자손이 이렇게 살아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84편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고라자손의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시편에 앞에 붙은 그 제목에 대해서 이제 더 이상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시편을 읽을 때마다, 특별히 그 시편 앞에 붙어 있는 이 '부제'에 대해서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때때로 이러한 제목들은 이제 이것을 기록하는 기록자들이, 또는 번역자들이 붙인 거라고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히브리 성경에서 이 제목들이 그 해당하는 시편의 1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1절이라고 나와 있는 것은 사실상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2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제목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그런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을 공부할 때에 그 제목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시편 84편은, 그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처음 1절에서 그는 그 장막에 대한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1절부터 3절까지 그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 그 시편의 마지막까지는 그 하나님의 집에 가는 여정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처음 부분은 바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두 번째 부분은 이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을 계획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그 여정이 어떠할지를 그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여정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하나님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을 그는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특별히 "해와 방패"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 그 여정 가운데 하나님이 그처럼 보호하실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시편을 통해서 보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집에 가야 됩니다. 그냥 자동차 열쇠를 들고 시동을 걸어서 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그 엔진을 시동을 걸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길로 차 타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집회에 가는 도중에 한 번 저녁 식사를 하러 잠깐 멈춰서 식사하고 가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지 식사하고 나서, 5분 또는 10분 만에 집회 장소에 도달할 수 있는, 이제 우리가 온 그런 길 같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21세기에 우리들의 그러한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경험입니다. 하지만 이 성경의 시대에는 이 하나님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거기에 성전산 위에 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1년에 세 차례씩 그 여호와의 절기에 남자들은 그와 같은 여정을 떠나야만 됩니다. 때때로 온 가족이 함께 여행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그것은 이제 낮이고 몇 달이 걸립니다. 그리고 때때로 몇 주가 걸릴 수도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 드신 분들 또한 어린아이들이 넘어지고 쉬어야 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거기 길 가운데에 강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른 강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그룹으로 함께 가게 됩니다. 참으로 그 강도의 위험이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건 실제로 있는 그런 일들입니다. 그 길 가운데 강도를 당한 사람이 쓰러져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여정은 길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위험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집에 그들이 가는 것이 참으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여정을 나타내는 시편을 여러 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그 15개는 이제 그들이 그 언덕을 올라가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들이 이제 다른 도시에서 이제 예루살렘 성에 도착했지만, 이제 거기가 끝이 아니고 그들이 해야 되는 또 하나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 성전산을 올라가는 것은 꽤 경사로입니다. 그 절기에 그냥 한두 사람이 성전산을 쉽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사람들이 함께 떼를 지어서 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사 자체가 어려운 그런 경사도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과 어린애에게는 힘든 그런 경사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그들은 그 언덕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그 성전 뜰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그와 같이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의 집인 그 성전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단순하게, 간단하게, 편하게, 올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아주 수천 명이 그렇게 올라오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축복보다도 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 이를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치이고, 서로 부딪히고, 그렇게 하면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모여서 이 자리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편하게 여기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도 하루를 다 소비해야 되는 그런 거리도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말이나 다른 탈 것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 다른 짐승을 탈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 타는 것을 오늘날에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차를 타고 올 뿐입니다. 그냥 10분 만에 도착합니다. 15분 만에도 도착합니다. 여기 한국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나라에서는 집회 오는데 30분이 걸렸다고 사람들이 "어우, 너무 힘들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30분 이상 운전을 한다면 아주 사람들이 불평할 거리가 되고 맙니다. 참으로 사실 이 기술이 오늘날 사람들을 망쳐놓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현대의 삶이 우리를 더 나쁘게 만들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나온 것이 참 어땠을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84편에서 또 한 가지, 왜 우리가 이점이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이 성경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성경의 66권 전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은 백만 장자, 아니면 수십억, 수백억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만 66권 전체 성경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는 어떻습니까? 분명히 왕들만 이 구약 성경의 모든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자면 이 통역하는 형제는 창세기만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또 저는 출애굽기만 한 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또 다른 형제는 레위기만 가지고 있는 그런 것 입니다. 어떤 형제는 시편을 가지고 있지만, 150편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시편의 10개 정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때 이제 레위기를 읽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제 전화를 걸어서 그 형제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바랄 뿐인 것이죠. 전화가 없고 또 메신저를 보낼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레위기을 찾아서 볼 수 있습니까? 이제 그 형제가 있는 그 곳으로 찾아가야 됩니다. 아마도 하루 이상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형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이제 메일로 레위기 좀 보내달라.]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또 이메일이 전혀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한 번 읽으려면 그 하룻길을 가서 그 레위기 있는 형제의 집을 찾아가서 노크를 해야 됩니다. 그 형제가 문을 열고 제가 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 여기 왜 온 거지?"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전화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약속을 하고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오는 지를 미리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단지 나타났을 뿐이 "제발 레위기를 내가 한 번만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그때 가서 말해야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레위기를 사기 위해서 내가 2년간의 월급을 다 들여가지고 산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이 레위기를 단지 너에게 잠깐 보여주고 빌려줄 수 있겠는가?" 이제 형제에게 아주 사정을 합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다. 내일 다시 와라." 그래서 이제 호텔을 잡아야 됩니다. 거기서 이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그다음 날 찾아옵니다. 이제 지금은 좋은 기분으로 나한테 잘 대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 레위기를 한번 보게 해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것이 그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제 그것을 보고 옆에서 복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전체 책을 다 손으로 옮겨 써야 됩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쓸 수 있는 재료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냥 복사기에 있는 종이가 그때 당시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가죽을 사야 됩니다. 그것은 또 엄청나게 비싼 재료입니다. 그런데 그 가죽을 겨우 구했다한다 해도 이제 그 레위기를 다 옮겨 적는데 또 몇 주가 걸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제 그때 당시에 사람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제 조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굉장히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는 열어서 레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어서 로마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84편을 여기 이렇게 열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손 안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사람들이 성경을 가장 조금 읽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쉬우면 우리는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냥 성경을 단지 책장에 둘 뿐입니다. 때때로 그냥 편리할 때, 시간이 남을 때 성경을 열어보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마트폰을 성경 보기를 또한 좋아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렇게 잘 보고 있습니까? 대부분은 그냥 이 성경책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것만 보여지지 않습니까? 또한 그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쉽게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이 한 권의 책에 다 담아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이 성경책을 더욱 열심히 읽기를 바라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예전 시대의 성도들은 참으로 가지도록 그토록 갈망했던 것들입니다. 그와 같은 갈망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들이 그 책을 펴서 읽기를 바라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원했습니다. 참으로 그것이 너무나 불편한 일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기자는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말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집을 사모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왜 그는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집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주의 장막들이" 원어에는 복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그런데 우리는 장막은 단지 하나만 있었는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성전만 있는 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 시편 기자는 여기서 "주의 장막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분명 여러 개의 장막들이 있는 거고, 여러 개의 성전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아주 정말 위대한 것을 말할 때에, 그 아주 위대한 것을 말할 때에 하나이지만 그것을 복수형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의 집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단지 주의 장막이라고만 단수로 표현하기에는 그는 부족함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복수 영어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이런 사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자주 사용되는 한 가지가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이 영어 성경, 또 원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엘로힘"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엘로힘'이라는 단어 자체가 복수형 단어입니다. 그것은 여러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거기에 금방 말씀드린 똑같은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위대하신 분입니다.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말씀을 드릴 때에 단수로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을 지칭할 때에 복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제 너무 지나치게 이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에 대해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엘로힘이 복수형으로 된 것이, 그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동시에 일컫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리적으로 틀린 설명이고, 또한 문법적으로도 틀린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한 분이십니다. 여러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세 인격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도 세 분의 인격을 말하는데 복수 용어로 사용돼야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많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형제님들도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엘로힘이라는 복수형 하나님을 사용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해서 나타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주의 장막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장막에 그 위대함, 그 아름다움, 그것을 온전히 묘사하기 위해서 여기에 복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이제 이 시편 기자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비교급과 최상급, 모든 것을 다 사용해서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내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고 있다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싶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실제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이 집회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는 이것을 우리에게 정직하게, 내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해 보게 됩니다. "내가 정말로 집회를 이와 같이 사모하고 있는가?" 때때로 우리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떤 한 집회에 대해서 "좀 가기 싫은데.." 이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불편하지만, 가기 싫지만, 이제 가야 되는 이제 그런 곳으로 우리는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좀 몸이 아프면, '그래 몸 아프니까, 안 가도 되겠구나.' 이렇게 변명하면서 안 갈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이제 판데믹이 있을 때 일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세계 여러 곳에서 집회를 참석할 수가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주일에도 우리는 단지 집에 있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그런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제 생애에서도 그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주일에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집에 혼자 있었던 그런 기간이 없었습니다. 일요일인데 주의 만찬이 없는 그런 시간이 몇 주가 되었습니다. 그건 저에게 아주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또한 아주 슬픈 마음을 들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 오랫동안 주일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에게 이제 우울증같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냥 바쁘게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팬데믹 기간에는 식사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거기서 아침으로 팬케이크을 먹고, 그리고 달걀도 먹습니다. 그리고 커피도 여러 잔 마시게 됩니다. 원래는 한 10분만 빠르게 먹고 나왔는데, 이제 30분, 40분, 아침 식사를 합니다. 주일 아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생겨 버렸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이것은 뭔가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가야만 되는 그런 존재가 되었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으니까 이상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집회에 참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완전히 어긋난, 전혀 어색한 장소에 있게 된 셈이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도 그때, 그 같이 이 집회를 사모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그 팬데믹 기간 동안에 이제 다시 모일 수 있게 되고, 또 다시 못 하고, 다시 모일 수 있게 되고, 다시 못하고, 이런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집회가 허용되었을 때, 우리는 재빠르게 그것을 놓칠세라 다시 집회를 열었습니다. 참으로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성도님들은 예전에 그러지 못한 방식으로, 또한 감정으로, 더욱 그 집회를 사모하면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오기에 그렇게 사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속했고, 그리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성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루살렘에 나오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동물들이 내 상황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그 건물 가운데에 이제 지붕에 약간 틈이 있는 곳에, 그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참새와 제비들이 그 성전 건축물을 이용해서 거기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으면 둥지를 만들어서 거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심지어 새들도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데,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단 말인가? 제비도 그 성전 안에 자기의 둥지를 두고 있는데, 왜 나는 못 가고 있는가? 참으로 그 동물들보다 내가 못하구나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참새가 거기서 집을 짓는다면, 제비도 새끼둘 보금자리를 얻는다면, 참으로 나도 그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의 제단에서 그 동물들이 자기의 집을 얻고 있다라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의 제단은 멀리서 오는 순례자들이 다 모이게 되는 그러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희생 제물들이 들여지게 됩니다. 멀리서 온 이 사람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 재단까지만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제단 자체가 성전이 되는 셈입니다. 또 거기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 주의 제단을 말할 때,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단은 사실 그 성전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제단은 성막에서도 중심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언약궤가 그 성전과 성막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입구는 이 번제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막의 끝은 속죄의 제가 뿌려지는, 피가 뿌려지는 그 장소가 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제단과 속죄소 그 가운데에 향단이 놓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속죄일에 그 향단에 피가 뿌려지게 됩니다. 밖에 있는 재단에 피가 뿌려지고 향단에 피가 뿌려집니다. 그리고 시은좌에 그 피가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피가 뿌려진 위치를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피가 뿌려져야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이 번제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보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참으로 지역 모임 안에서도, 그래서 번제단이 분명하게 기능을 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번제단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예배의 번제단입니다. 그리고 그 번제단은 우리의 성가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번제단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 번제단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 위에 계속적으로 희생 제물이 타 올라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그렇게 생생한 제단이 돼야 됩니다. 만약에 그 번제단이 생명력 있게 기능하고 있다면, 우리의 모임도 생명력 있게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제단"을 특별히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이제 그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언급합니다. 그는 그 전에 참새와 제비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가까이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다는 짐승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 나보다 더 자주 반복해서 또는 거기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짐승들입니다. 참으로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다 셀라" 그는 그곳에 가기를 원하고 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복"이라는 단어는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이제 "복이 있나이다" "복이 있는 것"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여기 사용된 그 단어였는데요. '행복하다', '기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아시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시편 1편에 기록된 "복 있는 자"는 할 때 동일하게 사용된 그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이것은 항상 사람을 가르킬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복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한번 찾아보겠지만, 12절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 있나이다" 이것은 앞에 말씀드린 첫 번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이 사람에게 사용되는 "복이 있나이다" 이런 단어는 어떤 사람의 어떤 특정한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 "복 있는" 단어의 상태는,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그러한 것이 너무나 잘 드러나서, 다른 사람이 보고 나를 부러워할 만한 그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이 히브리어와 '아시림'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그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우리를 둘러싼 다른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행복하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항상 만족하면서 살아가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도 아닌데 왜 저렇게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의아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른 불신자들이 여러분과 저를 볼 때 이런 것들을 잘 느끼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제가 오래전에 이제 이런 회사에서 다니면서 일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제 동료가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기드온, 왜 당신은 그렇게 항상 기분이 좋죠?" 제가 아주 힘든 하루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저도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했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이와 같이 복 있는 행복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복은,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질문을 하게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편에 기록된 '아시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이 참된 행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죄를 지으면서 이 세상의 쾌락을 쫓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서 그러한 것들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고 있어." 이렇게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은 무엇을 말합니까? 참으로 복 있는 자는 악인과 함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참으로 이 히브리어, '아시림' 이 복 있는 자라면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복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에는 또 다른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잠시 후에 그 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복을 주다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복 주실 때는 '바락'이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그들을 복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와 같이 복 주시는 '바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시편에서 "하나님이야말로 복을 받으실 분이시요"라는 그런 시편 표현을 볼 때, 그들은 사람들이 이제 '바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용하시는, 그리고 또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특별한 때에 하나님께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행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찬송을 드리는 것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분에게 경배 감사의 말씀을 드릴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참으로 그분께서 최고의 것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말씀드릴 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이와 같은 의미에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복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시림'은 우리의 행복한 상태를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또한 '바락'이라는 복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별한 복을 주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살펴봐야 될 시편에서 나오는 그런 복이라는 단어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고" 그리고 5절에 "시온에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주께 힘을 얻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제 출발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긴 여정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위해서 그가 여러 가지 것을, 그 자신이 준비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 여정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께 힘을 얻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5절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 힘을 얻은 자에게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국에 아주 좋은 고속도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차선, 4차선, 편도 5차선, 도로가 있는 고속도로를 보았습니다. 이제 이 고속도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여정을 빠르게 가게끔 만들어줍니다. 교통 체증 없이 바로 쭉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많은 고속도로가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 의미가 그것입니다. 이 대로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목적지에 부드럽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니, 그때 당시에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있다고?'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어떤 실질적인 고속도로,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그 도로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가자가 말하고 있는 고속도로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고속도로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어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할 뜻이 있고, 정말 그것을 바라고 갈망한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실 꾸불꾸불하고, 위험하고, 험난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힘을 얻은 자에게는 그러한 길도 이제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주 편안하고 부드러운 길이 이미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집회에 가는 게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회에 안 갈 수 있는 작은 변명거리가 생기기만 한다면, 이제 그것을 말하면서 집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에 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그가 병원에 입원해서 침대에 누워 있다 할지라도 모임에 참석합니다. 때때로 어떤 한 신자들이 빠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성도는 지난 3년, 5년, 몇 년 동안 한 번의 집회도 빠진 적이 없는 성도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특정 한 날에 안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참 여기 오지 못한다면 그는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고 아픈가 보다 생각합니다. 참으로 그러한 성도가 이 마음속에 대로가 있는 성도입니다. 참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이 교제 앞에 나가고자 하는 성도,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시온의 대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시온의 대로가 있는 그 마음속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로가 없는 자들은 조금이라도 두통거리가 생기면 집회에 빠집니다. 배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집회에 빠져버립니다. 우리가 말레이시아에서 어떤 직장인이 회사에 빠지는 가장 흔한 변명 중에 하나가 이제 배가 아파서 못 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아픈 것은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병원에 가서도 "저 배가 아파요."라고 말하면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뱃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진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진찰을 보았다라고 그 서류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저의 직장에서 저의 근로자들이 그런 배가 아파서 못 왔다는 그 진찰 받았다는 확인서를 낼 때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그러한 변명을 할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는 물론 진짜로 아플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제 나라에서 있는 일을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이 열이 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제 열이 나서 집에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젊은 세대 사람들이 "저 열이 나서 못 왔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열이 나서 못 왔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열이 날 것 같아서 못 왔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생각하기에 나 좀 열이 날 것 같은데, 열이 나는 것 같아서, 열이 점점 나고 있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집회가 시작하는 9시가 되면 분명히 내 머리에 열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말들을 자꾸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도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 마음속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면 우리는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는 여정 가운데 있는 어려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데, 그들은 눈물 골짜기, 바카 골짜기를 통행하게 됩니다. 이 '바카', 우리말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눈물 골짜기'입니다. 이 눈물 골짜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 여정 가운데 이제 어려운 순간들을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주 위험한, 그리고 대적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건들이 예전에도 그 자리에 일어났습니다. 그전에 어떤 사람들은 생명을 잃기도 했던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래서 그 특정한 장소에다가 사람들은 "눈물 골짜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들은 그 눈물 골짜기를 통행할 때에도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만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아주 긍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시림',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주 어려운, 가장 험난한, 위험한 곳을 지나갈 때에도, 바로 그곳이 샘이 솟는 길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과연 무엇이 이 샘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입니까? 이 눈물 골짜기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곳이 아주 건조한 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거기에 물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이 특별히 어렵고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더욱 많은 은혜를 베풀고 계심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험난한, 가장 메마른 땅을 지나가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 샘이 솟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또 일어납니까?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여기에 조금 이제 기술적인 것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좀 더 집중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조금 번역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잘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더욱 복 있는, 복을 나타내고 누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어렵게 말하는 것을 잘 인내하고 들으신 대가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한국어 성경에는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문자적으로는 우리 한국어 성경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한국어 성경이 영어 성경보다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여기 한국어 성경에 나온 것처럼, '은택을 입힌다.' 영어 성경에는 이제 '연못' 어떤 '물이 있는 곳을 입힌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한국어에는 이제 '은택', '은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문자적으로 맞는 표현입니다. 이 이른비가 복을, 은혜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 해도 약간 우리가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어떻게 비가 은택을 입히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이 앞에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바카하'라고 발음을 한다면, 여기에 이제 큰 소리가 들어가서 '바카하!'라고 발음을 해야 됩니다. 제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그렇게 발음하는 것입니다. 박카 골짜기를 지나갈 때, 그 비가 은택을 입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은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버라카'라는 단어입니다. 굉장히 비슷하죠. 약간 차이가 있지만 박카 골짜기가 '바라카'라고 돼 있습니다. 하나는 '박카'고, 그것은 눈물 골짜기를 말하는 단어고, 하나는 '버라카'는 은택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때때로 이제 히브리어에서는 이렇게 비슷한 소리가 나는 단어를 이용해서 연이어서 사용하는 그런 시적인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래서 시적인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박카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이 솟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른 비가 내리면서 은택을 '버라카'를 입혀줍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 시편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 그 박카 골짜기를 지날 때에 샘이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이제 버라카를 지날 때에 비가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슷한 발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것은 눈물 골짜기, 바카 골짜기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버라카 골짜기, 은택의 골짜기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냥 눈물 골짜기, 박카 골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지나갈 때는 샘이 솟고, 비가 내리고, 그에게 있어서 그 골짜기는 바카 골짜기가 아니라 버라카, 은택의 골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이 비가 은택을 입혀줍니다. 그래서 이 은택이, 버라카가 이 비로 하여금 내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골짜기 이름을 바꿔버립니다. 우리의 환경은 우리가 가진 인격에 맞춰 변화됩니다. 우리는 단지 '아시림' 복 있는 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처럼 복을 옆으로 끼치는 '버라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두 가지 종류의 복을 나타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시림'맨이고 그리고 '버라카'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바카 골짜기'가 '바라카 골짜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참으로 그 속도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으며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곳은 바카 골짜기가 버라카 골짜기로 변해버립니다. 그의 발자취에 샘이 솟게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고 보존하시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슬픔의 골짜기가 은택의 골짜기가 됩니다.
여기 4절에 보면, "저희는" "저희가" 또 6절에 "저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다른 구절과는 다르게 단수로 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복수로 "저희가"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이스라엘 다른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는 그런 장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그가 특별히 단수로 말할 때는, 나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때때로 이제 인도자들이 잘 해야지 이 모임이 강하다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강사들이 잘 전해야지 이 모임이 강하게 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시편 기자가 여러 다른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가 이제 한 사람에게 주목해서 말할 때에 이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이 실질적인 교훈은 이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몇몇의 사람들만 강해야 될 것이 아니라, 이 지역 모임에 속한 각각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강해야지, 그리고 저희 모두가 강하고 그 지역 모임이 강하게 서는 것입니다. 여기에 형제도, 그리고 모든 자매님들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각각이 분명하게 굳게 선다면, 우리 각자가 우리가 맡은 책임에 대해서 굳게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하는 한마디 말이, 그것이 모임을 강하게 할 수도 있고 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이 모임의 건강이 각 사람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모임의 각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이 지역 모임의 건강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 지역 모임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성도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성도님들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이 지역 모임 전체의 영적인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5절에서 주께 힘을 얻는 그 한 사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7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그 여정을 계속해서 나아가서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오랜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렇게 그 여정을 걸어가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점점 힘이 빠지고 힘이 빠질 것입니다. 점점 피곤해지고 이제 지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가 여기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제 예루살렘에 나타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전 앞에 도달하게 될 때, 그들의 심장은 더욱 흥분으로 뛰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핏줄에는 영적인 힘으로 가득 차고 역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힘 있게, 마침내 도착하게 됩니다. 힘을 얻고, 더 얻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각기, 각 모두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그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라고 기도합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래서 8절부터 그 이후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 없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단지 사람의 육신적인 힘을 사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며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그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신의 보호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소서" 참으로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펴보아 달라고 외쳐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그 예루살렘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의지할 다른 사람을 하나님 외에는 두고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고 보호자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것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만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지를,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정말로, 정말로, 하나님의 집에 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낫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그것을 선택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문지기이라면 그는 이제 문에 도착해 있는, 하나님의 전에 도착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이미 그 여정의 끝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것은 그의 감정을 그대로 잘 나타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며칠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여러 다른 우리를 즐겁게 하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참 여기보다 더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 그런 장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인생의 쾌락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그런 장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은 시간 동안, 참으로 이 지루한 시간을, 많은 형제 자매님 여러분들이 함께 여기서 모여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이제 수사적으로, 반어적으로 이것을 이렇게 묘사해 드리고 싶습니다. 옆에 지나가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 앞에 밴드도 없고, 여기 어떤 신나는 음악도 없으며, 그냥 소리만 크게 지르는 어떤 한 강사가 앞에서 1시간 반 동안 말씀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주 그냥 특별한 장식이 없는 단순한 교회당에서 말입니다. 참으로 그 꼭대기의 장식과 창문에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지 않은 그러한 교회당입니다. 사람들은 왜 우리가 여기 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편 기자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보다 천날보다 낫다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른 곳에서 그런 화려한 곳에서 천날을 보내는 것보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거기가 내가 가야 될 여정의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하나님께서 방패이실 뿐만 아니라, "해요 방패이시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하나님께서는 해로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고, 하나님께서는 방패로서 우리에게 보호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선한 것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온다. 참으로 오직 그분께 변치 않는 온전한 선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그분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모임의 간증은 때때로 잘 될 때가 있고, 또 침체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때 이것을 인식하길 바랍니다. 참으로 이 장소보다 이 세상에 더 나은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기 다시 한 번 '아시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참으로 주께 의지하는 자가 그와 같이 복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어려운 여정을 이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 버립니까? 참으로 눈물 골짜기가 어떻게 그 은택의 골짜기가 되었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아니고 누가 참으로 그 메마른 눈물 골짜기가 샘이 솟는 골짜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참 우리가 아니고 누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참된 해이고 방패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주께 의지하는 자가 그것을 알고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께 의지하는 자가 참으로 복되다라고 마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우리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전부입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께서 저에게 보여주셨던 따뜻한 교제와 친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