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느헤미야

느헤미야 3장 : 후반 5개의 문

박이레 2024. 1. 13. 22:56

< 느헤미야 3장 : 후반 5개의 문 > 한봉래 형제님

예,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제가 주일에 계속 이렇게 살펴보고 있는 느헤미야 3장 말씀을 계속 나가보려고 합니다. 우선 하나님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앞부분을 했기 때문에 이제 뒷부분 살펴보겠습니다.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으며 문짝을 달며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느 3:15).

그래서 15절에서 '샘문'이 나옵니다. 이게 지금 현재 여섯 번째 문입니다. 조금 더 밑으로 가시겠습니다.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하여 동편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어민 망대까지 미쳤느니라)"(느 3:26).

그래서 이제 '수문'이 나옵니다. 영어로 하면 워터게이트입니다. 옛날에 미국에서 좀 문제가 됐었던 그 워터게이트입니다. 수문, 그다음에 조금 더 밑으로 하시겠습니다.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느 3:28).

'마문'은 이 말입니다. 말이 왔다 갔다 하는 문이죠. 그다음에 9번째 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느 3:29).

29절에 '동문'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10번째 문이 31절에 있습니다.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고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누에 이르렀고"(느 3:31).

그리고 32절입니다.

"성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느 3:32).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양문이 언급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쌓은 성문은 첫 번째 양문으로 시작해서 양문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바퀴 쭉 도는 동안에 문이 10개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이들이 어떻게 지었느냐, 누가 지었느냐, 이제 하는 것들은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이 10개의 문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실제로는 12개 문입니다. 문이 12개를 지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10개의 문만 기록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뭐냐? 저희들이 생각해 볼 때 이 10개의 문이 주님을 나타냅니다. 전부 주님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일단 그 말씀을 그와 같은 관점에서 살펴보고 다음번에 이제 어떻게 지었는가? 누가 어떻게 협력했고 어디서부터 지었고 이제 그런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제 15절에 있는 '샘문'입니다. 샘문은 첫 번째, 하나님이 샘이십니다.
이제 성경은 제가 구체적으로 찾지 않겠습니다. 성도님이 찾아보시면 예레미야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참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그래서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들이 잘못한 것,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저축치 못할 웅덩이를 팠느니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다음에 한 게 뭐냐 하면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웅덩이입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는 물이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물을 공급해 주는 그와 같은 웅덩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 말라버리는, 이걸 이제 이렇게 비유적으로 하나님이 예레미야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한탄하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샘이십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우리가 샘이어야 합니다. 이제 이 대목은 제가 이제 이런 사건을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행을 하시다가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습니다. 그때 이제 수가성 여인이 왔는데요.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그랬더니 그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서로 상종 안 하는 사이잖아요." 이렇게 한 거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 그리고 내가 어떤 선물을 주는 줄 네가 안다면, 네가 나한테 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했다면 내가 너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데요. 그래서 이제 샘이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이제 우리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제 옛날에 시골에서 자라면 이렇게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은 뭐냐 하면 물이 땅에서 솟아납니다. 솟아나는데 그래서 이제 물이 이렇게 고여 있는 거죠. 그거 다 퍼내면 또 물이 있어요. 그래서 물의 근원은 지하에 있습니다. 이쪽에서 계속 물이 공급되는 거예요. 그래서 힘은 안쪽에 있는데 물이 나옵니다. 이렇게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성경에서 물을 둘로 나누는데요. 이렇게 솟아나는 샘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편 23편에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고 잔잔한 물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항상 잔잔한 물 그러면 말씀, 솟아나는 물 성령님입니다.
여기서 이제 샘문은 뭘 의미하냐면 요한복음 4장에 있는 대로 하나님이 샘이시고, 그다음에 만약에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에게 구했으면, 그리고 예수님이 선물을 주시면, 그 선물이 뭐냐 하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다시 달리 한번 이야기를 해보면요.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결혼하지 않고 삽니다. 결혼도 안 하고 이제 살아버린 거죠.
죄인이죠. 이 여자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인데요. 어디에서 행복을 추구하냐면, 삶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냐 하면 결혼을 통해서 추구합니다. 결혼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 남편과 사이도 좋고 또 자녀들이 잘 자라주면 이제 만족스럽고 행복한 거죠. 그런데 이 여자는 아마 처음에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깨져버렸습니다. 누구 잘못인지 모르지만 결혼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 재혼을 할 때는 이번에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내가 변함없이 섬길 수 있는 남자를 만나서 이번에는 깨지지 않는, 나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는 가정을 이루어야지, 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결혼을 함부로 하고, 쉽게 하고, 이것도 지금 이게 예수님 당시니까 지금으로 치면 2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요즘에는 막 사람들이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지만 한 5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이혼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연예인들이나 하는 거였어요. 일반인은 상상도 못하는 거였어요. 아무리 불행해도 친정에 가서 친정 아버지한테 나 못 살겠다. 그래도 친정 아버지가 안 된다. 가서 살아라. 뭐 이렇게 속말로 하면 그 집 귀신이 돼야 된다라고 하는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거였죠. 예수님 당시에 이 여자 입장에서는 이혼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누구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다섯 번이나 실패합니다. 제가 이제 결혼 결혼 주례할 때 이제 많이 하는 말인데요. 결혼할 때 이제 삼각형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친밀하게 지내고 서로 알고 서로 섬기고 사랑해야죠. 그런데 이게 이 두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삼각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하면 서로 친밀해지고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느냐? 각각 하나님께 나갈 때 가능합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이 남편과 아내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빼놓고 두 사람끼리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결혼의 삼각형이라고 부릅니다. 이 여인은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게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고 정말로 참된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불행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른 사람한테 구하지 말고, 남편에게 행복을 구하지 말고, 결혼을 통해서 구하지 말고 나에게 구해야 된다. 나에게 구했더라면 내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 성령님께서 참된 만족과 기쁨의 길을 알려주시고 주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하나님은 우리를 왜 창조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참으로 기쁜지를 이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실 분을 주겠다. 이게 이제 요한복음 4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제 샘문은 하나님, 성령님을 가리키고 또 성령님을 모시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 다른 데서 성공하고 어떻게 이렇게 가치를 찾는 게 아니라, 성령님은 항상 주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알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때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같이 살아야 된다. 그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라고 샘문이 보여주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샘문 하나 더 인용해 보면,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 이부서는 이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때 유대인들에게 "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렇게 하십니다. 여기서도 생수입니다. 그냥 물이 아니고 이렇게 솟아나는 샘물의 강이 되어서 흘러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의 배경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절기 때, 명절이 돌아왔는데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절에 가시죠. 예루살렘에" 이제 명절이 됐으니까 다 가려고 이제 준비를 하는 거죠. 나사렛 갈릴리 북쪽에서 이게 남쪽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당시는 나귀 타야 되고, 걸어가야 되고, 도로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게 한참 걸립니다. 그래서 이제 혼자 가지 않고 옆집 또 친척들하고 같이 우리 같이 갑시다 그러면서 이제 먹을 것도 쌓아야 되고 막 이렇게 가는 거죠.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갈 준비를 안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 육체의 동생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말을 하시죠. 아니 예수님을 보니까, 자기가 누군지를 세상 사람에게 나타내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예수님 목적을 보니까 내가 누구냐, 내가 이렇다, 나는 뭐 뭐다, 이렇게 자꾸 말씀하시죠. 그게 목표시라면 당연히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절기에 가셔야지 왜 왜 안 가려고 그러세요? 그거 이상하시네. 그 목적이 그거라면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셔야 되는데 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들은 가라.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예수님이 잘 안 가십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안 오시네. 이제 동생들만 이렇게 간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도 예수님이 오시나? 틀림없이 오실 것 같은데, 그러고 있는데 비밀리에 하십니다. 그리고 그 절기 중간쯤에 갑자기 성전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저기 이제 저희들 같은 경우는 이제 성경이 한글로 번역이 돼 있으니까, 성경을 한글로 읽고 무슨 뜻인지 알고 그중에서 좀 영리한 사람은 그 내용을 잘 깨닫고 설명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성경이 히브리어로 써져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 성경은 이제 물론 지금 아직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만 헬라어로 이렇게 쓰여지죠. 그런데 이 당시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알았냐?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전부 아람어라고 하는 걸 씁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패션오브 크라이스트'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거기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하는 이야기는 전부 아람어로 실제로 나와요. 그리고 그게 영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막이 영어로 딱 뜹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따로 교육을 받아서 히브리어를 배우지 않는 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펴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지?" 이 기이하게 생각을 하는 거죠. 이제 그런 장면들이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하여간 예수님께서 이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 두 가지를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같은 평가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첫 번째,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이 가르치는 말씀,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교훈이, 내가 가르치는 이것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7장에서 저희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이 교훈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려주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뜻을 알고 싶은 유일한 이유가 뭐냐? 순종하겠습니다. 알려주시면 제가 한번 들어보고  하나님 괜찮네. 하나님 뜻이 좋네요. 그러면 순종하고, 하나님 그건 못하겠습니다. 그건 너무하시네, 하면 순종 안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기 뜻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을 알려주시는 대상은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알려주시면, 아무 말하지 않고 순종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그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제 그런 사건이 하나가 나옵니다. 바벨론이 침공을 해요. 그래서 예루살렘은 이제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국가가 멸망하게 생겼어요. 이렇게 될 때 일부 이스라엘 백성이 예레미아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이 하나님께 물어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면 그 뜻이 우리 뜻하고 맞든지 안 맞든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기뻐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게 이제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인데요. 하여간 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남은 자들에게 "제가 그러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 뜻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질문합니다. 하나님 이들이 와서 묻기를 지금 전쟁 느부갓네살이 공격해 오고 어마어마한 군대인데,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질 것이 너무 확실한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싶어서 왔으니 하나님 말씀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 땅에 그냥 남아 있어라. 이 이스라엘 땅에, 내가 이름을 둔 이 예루살렘에 그냥 남아 있어라. 내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 너희들이 전쟁을 두려워해서 만약에 다른 곳으로 피하면, 예를 들어 가장 그 당시에 피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국가가 애굽입니다. 애굽이 바벨론하고 막상막하의 국가이기 때문에, 바벨론이 이쪽은 점령해도 애굽까지는 점령 못할 것이다. 애굽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애굽으로 가면 내가 반드시 그곳까지 전쟁이 미치도록 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 뜻이 우리에게 좋아 보이건 나빠보이건 저희들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조건 하에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대답하셨어요. "이 땅에 남아 있어라. 내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이제 세상에서, 제가 그런 소리를 배웠는데요. 메세지가 옳으면,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맞아요. 그런데 하고 그 말을 안 하고 싶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메신저를 공격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냐면 이제 하나님이 말을 들면 그대로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말을 따르기가 싫어. 아까 말을 해놓고, 맹세를 해놓고 실제로 해보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너무 하시지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으라고 그러면 이건 죽는 건데, 그 잔인한 바벨론이 와서 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보호하시냐?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공격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물어가지고 대답한 거 아니죠. 누군가가 당신한테 와서 저 사람들 이렇게 대답해라라고 누군가의 꾀임에 빠져서, 누군가가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이렇게 한 거지요?"라고 예레미야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피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벨론을 계속 강성하게 하셔서 애굽까지 바벨론이 점령하게 하십니다. 이게 이제 항상, 그러니까 사람은 성령님께서 감동하지 않는 한,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하지 않는 한,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 뜻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맨날 하는 거지만요. 구약의 율법은 이렇게 해라라고 하나님 뜻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뭘 안 줬죠?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안 주셨습니다. 신약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성령이 위로부터 임하거든 사도행전 1장 8절이죠.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합니다. 되라가 아니고, 되라라는 명령이 아니고, 될 것이다라고 보증하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죠. 주님께서 이렇게 진리를 말씀하세요. 그리고 이 진리가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사람이 한 말인지, 사람이지 뭐 예수도, 이렇게 할 건지를 알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그런데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이 성령님을 요한복음 7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예수님의 동생들의 불신한 발언들과 그다음에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라고 하는 약속은 이제 이 성령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이 참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그것이 사람 눈으로는 좁은 길이지만,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생명과 영원한 영광이 있다고 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알려주셔서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신다. 이게 이제 샘문입니다.
이건 저희들이 구원받을 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한 것인지, 그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도우셔서 우리가 죄인인 것과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인 것과 그분의 길이 우리 생각과 달리 하늘처럼 높은 것임을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이렇게 갖게 된 거죠. 우리가 믿은 거지만 그 배후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강권하시고 우리를 이렇게 이렇게 돼 있죠.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의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그리고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거죠. 그때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을 한 것처럼 이제 성령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해주실 것이다. 이게 샘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밝혀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경을 이해하고, 그리고 놀라운 비밀의 길을,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게 이제 샘물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그다음에는 이제 '수문'인데요. 수문은 이제 '말씀'입니다. 말씀을 하는 건데 이 부분은 성경을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이건 나중에 나오는데요. 느헤미야 8장을 한번 가시겠습니다. 이제 3장에서 이제 성벽이 완공이 되죠. 그리고 완공된 것들을 또다시 이제 이렇게 이렇게 하고 완전히 완공됐을 때 느헤미야 8장에서 이제 집회를 합니다. 8장 1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느 8:1).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거죠. 그다음에 2절,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느 8:2).

그러니까 여기 누가 모였냐면, 남자 여자하고 애들 가운데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집회를 방해하지 않고 거기 앉아서 들을 수 있는 아이들은 싹 모읍니다. 그러니까 이제 갓난아이나 이런 애들은 데려올 수 없었다는 거죠.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 8:3).

성경을 읽습니다. 이제 읽으니까 외국어입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느 8: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을 보이는 거죠.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 8:6).

하나님 앞에 경배해드리고요. 그다음에 7절 저기 뒤쪽을 보겠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느 8:7).

이게 이제 통역을 해준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느 8:8).

깨달았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8:9, 개역한글)

그다음에 10절 10절이 핵심입니다. 맨 뒤 뒤쪽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이렇게 말씀을 들으니까 어떤 결론에 이르렀냐면, 이스라엘이 지금 이와 같이 고난의 상황 속에 있는 것은, 이제 포로 귀환해서 이제 성벽을 성전을 짓고 이렇게 하고 있지만 계속 어려운 거죠.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안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고 웁니다. 왜 이렇게 왜 순종을 안 했을까, 순종 안 하면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됐을까, 하면서 웁니다. 그랬을 때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그리고 그다음에 이건 이제 해석을 문법에 따라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이렇게 해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렇게 번역할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여호와의 기쁨이 너희 힘이니라."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두 번째 해석을 따라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다'라고 하는 것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이와 같은 고난 속에 들어왔어도, 슬퍼할 일이 아니고 울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알면,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라고 하는 것을 알면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된다. 이게 수문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말씀을 읽으면 왜 우리의 현실이 이와 같은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은 말씀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알고 그걸 압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 이걸 알게 되고 그걸 알면 다시 힘을 내어 이 길을 간다.
이 길을 가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수문 앞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이제 우리가 순종하기 시작한다. 이게 수문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마문' 하겠습니다. 여덟 번째인데요. 마문은 이제 '말'인데요. 이제 말이 왔다 갔다 들어가는 문인데 말은 전쟁용이죠. 전쟁할 때 이제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전쟁의 말을 타고 오시는 건데, 이건 요한계시록 하나 보겠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하얀 말이 있고 그 말을 타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십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럽고 변함 없으시고 진실 진리를 가지신 분이죠.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래서 이게 마문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주님입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하나님 말씀이니까 예수님이죠.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흰 말을 타고 주님의 뒤를 따라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 19:15).

그다음에 15절, "그의 입에서" 주님 입이죠. 물론 상징적인 거죠.
"검이 나오니" 그래서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말씀으로 싸우는 거죠.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이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맹렬한 진노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래서 주님이 백마를 타고 말씀으로 싸우시는 군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싸우는 자죠.
그래서 이제 다시 한번 이렇게 보면 이제 이런 구절들이 생각이 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이제 디모데 후서에서 죽기 전에 자기의 생애를 이렇게 말하죠.
디모데 후서 4장 8절인가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선한 싸움을 싸웠다. 그다음에 "달려갈 길을 마쳤다." 경주를 완주했다. 도중에 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죠.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그리고 이제 "믿음을 지켰다." 이 세 가지를 말하죠. 그리고 이제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돼 있다. 이게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자기 자신의 생애를 그렇게 요약하죠. 떠날 기약이 가까웠으니 내가 이렇게 이러 했다. 그리고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제 나만 나를 위해서만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소망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렇게 돼 있죠. 주님 공중에 오시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다음에 사랑으로 섬기고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는 거죠.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가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영적인 싸움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다 이게 영적인 싸움이죠. 그런데 이제 싸움의 대상 잠깐 보겠습니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우리가 어떤 싸움 가운데 있냐? 첫 번째 고린도후서 4장 4절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래서 이제 우리가 사단과의 싸움인데 첫 번째 싸움은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사단이 늘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자꾸 합니다.
듣지 못하게 하고, 그러니까 저희들이 늘 경험하는 거죠. 복음 집회 계획하고 초청하면 오겠다고 해놓고 그 전날 무슨 일이 생겨요. 그래서 못 오는 거예요.
그다음에 와도, 이게 이제 왜 너울을 썼냐? 뭐 해가지고, 이제 마음이 벌써 여기 이단 아닐까, 이래가지고 복음을 정확하게 안 듣는 거죠. 그리고 복음 집회는 오긴 했는데 뭐 사업 생각하게 되고 이게 다 사단이 배후에 사는 거거든요. 그다음에 육체적으로는 그게 어떻게 드러나냐면 졸고, 이게 이제 복음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저희들이 이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께서 그 마음을 들려준 말씀을 사용하시기를 기도하고 그래서 복음을 위한 싸움을 저희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누가 복음 사단이 나온 표현 제가 4개를 찾는데 누가복음 22장 사단과 싸움이기 때문에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사단이 베드로를 주님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 이렇게 제가 까불어 보니까 알곡 아니고요. 쭉정입니다." 이렇게 한 거죠. 주님이 기도하십니다. 알곡이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명백하게 이제 부인하고 나면 어떤 생각이 드냐면 내가 무슨 구원받은 사람이냐? 그래도 이제 구원은 분명하다면 이렇게 하죠. 나 같은 사람이 뭐 이제 와서 주님을 위해서 뭐 섬기겠느냐? 내가 주님을 섬기면 사람들이 전부 너나 잘해라. 너 옛날에 그래놓고 뭘 섬긴다고 어디 뭐 간증을 하고 말씀을 전한다고? 이렇게 되는 거죠. 이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이 그가 구원받을 때 그에게 은사도 주시고 그리고 이제 교회를 위해서 섬기도록 지역 모임에 더해 주셨는데 사단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안 돼. 네가 뭘 한다고, 너 자신을 먼저 봐라고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주님은 이렇게 말하는 거죠. 돌이키고, 물론 회개해야죠. 잘못한 거 그다음에 형제를 굳게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형제를 어떻게 굳게 하냐? 내가 이렇게 됐을 때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굳게 하는 거죠. 여러분은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가지 마십시오. 제가 실패했습니다. 정확하게, 그리고 어떻게 회복이 됐냐면,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이렇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생각하면 그냥 뒤로 물러가 조용히 있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형제를 굳게 해라고 했기에 나에게 아무런 자격과 조건이 없을지라도 순종해서 이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해야죠. 전부 그 같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능력이 있고, 할 만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하죠.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에서 말하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죠.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셨기에 그 일을 감당하는 거죠. 이게 이제 두 번째 싸움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싸움은 고린도전서 7장 1절입니다. 사단이 이제 계속 건드리는 거죠.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사단의 세 번째 시험이 있고 우리가 싸워서 이걸 이겨내야 되는 것이 세 번째가 가정입니다. 가정 가운데 형제자매가 불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뭐 여러 가지 잘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갖고 가정을 깨버릴 수도 있고, 가정이 이제 가정이 파괴되면 사단이 원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가정은 교회의 한 중요한 구성 요소입니다. 청년 형제 자매들이 잘 영적으로 자라서 결혼해서 선한 간증을 나타내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리고 복된 가정을 이루어서 교회를 섬겨야 됩니다. 이걸 이제 못하게 하는 거죠. 세 번째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형제 자매들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잘못할 수 있죠. 그러면 그걸 가지고 이제 결국은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데까지 나가도록 사단이 계속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래서 형제 자매들이 먼저, 남편과 아내가 먼저 그 말씀대로,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교회를 위하여 주신 것처럼 희생해야 되고, 아내는 교회가 주께 순종하듯이 순종하고 각각 각각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다른 몫을 요구하지 말고 각각 자기가 할 일을 할 때 주님께서 그 가정을 든든히 세우시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네 번째입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일이 있죠. 교회에 대한 공격은 디모데전서 3장 6절에 있습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입교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다른 데서, 혹은 오래전에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 모임에 처음 들어온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또 지식이 있고, 또 구원받은 지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한 지역 모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장로로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형성된 지역 모임의 질서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부터 배워야 합니다. 겸손부터 배워야 합니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걸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저희들이 사단이 조심해야 되는 것은 성도들에게 특별히 어떤 어떤 경력이 어떤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서 교회에 불란을 일으켜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답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마문입니다. 영적인 전쟁.

그다음에 그다음에 아홉 번째 '동문'인데요. 동문은 동쪽인데요. 동쪽은 해가 뜨는 쪽입니다. 우리 주님이 해입니다. 의로운 해가, "치료하는 해"가 이렇게 돼 있죠. 말라기에 돼 있습니다. 주님이 의로우시고, 보통 이렇죠. 저희들이 이제 뭐 이렇게 빨래 같은 거 해도 이렇게 햇빛에 말립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세균들이 다 죽는 거죠. 그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시는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
주님이 해고, 그다음에 우리는 주님 공중에 오셔서 모든 문제를 우리 연약한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꿔주시고, 그리고 이 모임 지역 모임은 항상 문제가 있죠. 이 지역 모임에 있는 성도들이 다 모여서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되는 영광스러운 우주적인 몸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거죠. 이 소망을 저희들이 갖고 있는 거죠.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이 해야 되는 것, 아까 사도바울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세 가지를 합니다. 첫 번째,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다음에 믿음을 지킵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를 한다면 첫 번째, 영적인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건데요. 군인은 성경에서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군인은 뭐 하는 사람이냐?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군인에게 요구되는 게 뭐냐 하면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나를 부르신 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를 사용하시겠다고 나를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 그다음에 이제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랬는데요. 이건 이제 경주하는 마라톤 선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라톤 선수인데 이 경주하는 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뭐냐 하면 목표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는 22,419km인가요? 하여간 그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가야 됩니다. 이게 이제 경주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 도착하면, 그 목표지에 가면,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그런데 이제 그 목표지까지 가지 못하도록 이제 여러 가지 이탈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유혹들이 있는 거죠. 하여간 주님에게 가야 된다. 나를 기다리시고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힘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격려하고 있는 주님에게까지 가야 된다. 도중에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다. 이게 이제 경주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다음에 "맡겼으니" 이렇게 되는 건데요. 우리는 맡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말씀을 맡아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맡은 자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건 뭐죠? '충성'입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자가 돼야 됩니다. 이것도 성경 한 군데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48-51).

그리고 이제 49절부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종은 악한 종이 됩니다. 늦게 올 것이다. 더디 올 거다. 그렇게 해가지고 49절, 동무들을 때리고 술 친구들도 더불어 먹고 이제 이렇게 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맡은 자로서 가져야 될 중요한 태도는 주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오늘이라도 오실 수 있다라고 하는 절박함, 이걸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밑갓문'인데요. 밑갓문은 이제 계산한다, 회개한다, 이런 뜻인데요. 이게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나타내는 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 은혜로 구원받고 또 성령님의 능력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이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평가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제 비유적으로 말하면 두 개가 있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이제 주인이 달란트를 이렇게 종들에게 주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계산하는데요. 이제 달란트를 줍니다. 그런데 달란트는 각각 다르게 줍니다. 누구는 한 달란트, 누구는 세 달란트, 누구는 다섯 달란트, 이렇게 줍니다. 그리고 갔다 와서 주님께서 이제 다섯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 남겼습니다. 칭찬하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똑같이 칭찬합니다. 다섯 달란트가 다섯 달란트 남겼으니까 더 많이 남긴 거죠, 두 달란트보다. 그래도 주님은 똑같이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많은 은사를 주셨건, 적은 은사를 주셨건, 분량대로 주님의 뜻에 충성스럽게 사용하면 똑같은 칭찬을 줍니다.
그다음에 누가 복음에서는 주인이 어떻게 주냐면 한 므나를 줍니다. 다 똑같이, 이번에는 똑같이 줍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제 누가 이 다섯 므나 남겼나이다 칭찬합니다. 세 므나 남겼나이다, 칭찬하죠. 그런데 이번에는 결과가 다릅니다.
다섯 므나, 다섯 고을 권세를 줍니다. 세 므나, 세 고을 줍니다. 한 므나, 그거 뺏어다가 저기 줍니다. 그래서 이제 이번에는 이제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이 므나 비유는 책임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똑같은 구원이라고 하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똑같이 하루에 24시간이라고 하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다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 더 많은 게 아닙니다. 다 똑같은 건데 그것을 얼마나 책임 있게 했느냐에 따라서 이번에는 결과가 다릅니다. 자기가 이루어낸 결과대로 주님이 축복하시고 책망하시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두 가지 주님이 다시 돌아오셔서 종들과 계산하실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달란트는 저희들이 아는 거죠. 은사입니다. 은사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이 묻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므나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게 뭐냐 하면 구원해 주셨고요. 그다음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는 성경을 복음서만 주신 게 아니고 계시록까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똑같이 주셨어요.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주셨어요. 그래서 주님이 이 주신 것에 얼마나 책임 있게 행동했는가?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놀라운 주님을 더욱 섬겼는가는 이거 개인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밑갓문, 주님이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라고 하는 것들을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살피면서 이제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가는 거죠. 모든 문은 다시 양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제 이걸 보고 저희들은 이렇게 말한 거죠. 주님이 시작하셨고 주님이 마치실 것입니다. 주님께로 나오고 주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찬양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이 높아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고 이거 하나만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바냐서 3장 12절입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습 3:12-13).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고 연약한 백성을 남겨주겠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그래서 스바냐가 이와 같은 책임을 맡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맡고, 보호하고, 양육해야 될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스바냐에게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습 3:13).

그와 같이 이제 보호하심을 잘 입으면 이와 같이 변화됩니다. 악을 거절하고, 진실을 말하고, 이상한 소리 안 하고, 불평 원망 없고, 그다음에 평안하게 거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스바냐에게 내가 고난받고 연약한 백성을 남겨주겠다. 그들을 이와 같은 변화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라고 하는 것이 스바냐의 목표입니다. 스바냐에게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 주위에 구원받지 못한 친족들 친구들을 두셨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생명으로 인도해야 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 이제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 하나만 달랑 받고 여전히 연약한 가운데 있는 세상의 공격 속에 있고, 사단이 조롱하고, 이와 같은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걸 볼 때 비판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내가 너희 가운데 이와 같은 영혼들을 두었다. 그들을 변화시켜서, 뭘로요? 말씀으로, 성경 능력으로, 우리의 삶의 본으로, 또 지역 모임의 한 지체가 되게 함으로써, 그들을 변화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평안하고, 진실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처럼 변화시킬 책임이 주어져 있는 거죠.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지만 영광스러운 임무입니다. 이 땅에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내는 복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게 이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거죠.
샘문, 성령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말씀으로, 잔잔한 물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자기를 정결하게 만드는 작업, 그리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함께 칭찬을 받는 것, 이게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볼 만한, 살아야 될 복된 생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저희 자신 각자가 주님 앞에서 또 어떤 부분을 주님 앞에서 교훈 받고, 또 고쳐내고, 또 주님께 더욱 나아갈 것인가, 새해에 한번 생각해 보고, 또 교회로서 저희 모임이 좀 더 주님 기뻐하시는 모임이 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저희에게 있어야 되는가 생각해보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주시도록 함께 순종하는 그런 모임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