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서론
< 에스더 서론 > 기드온 쿠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코타카모닝 모임에서 성도님들의 안부를 또한 대신 전해드립니다. 또한 이 가운데 특별히 말레이시아를 직접 방문하신 성도님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성도님들을 기억하면서 코타카모닝 모임의 성도님들이 특별히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 집회 기간 동안에 에스더서를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스더서 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은 아하수에로왕 때에 된 것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 이십 칠도를 치리하는 왕이라 당시에 아하수에로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위에 있은지 삼년에 그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도의 귀족과 방백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에 1:1-3).
"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왕명을 좇아 오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 붙는듯하더라 왕이 사례를 아는 박사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에 1:12-13).
2장입니다. 2장 16절부터 18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하수에로왕의 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이끌려 왕궁에 들어가서 왕의 앞에 나아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욱 사랑하므로 저가 모든 처녀보다 왕의 앞에 더욱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은 후에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방백과 신복을 향응하고 또 각 도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풍부함을 따라 크게 상 주니라"(에 2:16-18).
3장입니다. 1절부터 5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에 아하수에로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 두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였더라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에 3:1-5).
8절, 9절입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부쳐 왕의 부고에 드리리이다"(에 3:8-9).
일단 여기까지 말씀을 읽고 교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이 에스더의 이 이야기에 대해서 그 내용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 이런 말씀 교제를 하는 그런 부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왜 이 시간 에스더를 교제하고자 하시는지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이 가운데 성도님들은 그런 질문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떤 성도님들이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에스터는 자매들이 읽어야 되는 책 아닙니까? 이것은 형제들에게는 그렇게 관련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요."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에스라서는 형제들이 읽는 책이고 자매들은 에스라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분명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 여자의 이름으로 성경책이 이름이 붙은 것이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룻기입니다. 그리고 여기 에스더입니다. 그리고 이 66권의 책 중에서 이 두 권이 특별히 여자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은 것은 우리에게 흥미를 자아냅니다. 그 룻기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책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 그 책의 첫 번째와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룻기를 보고 이것은 단지 그냥 사랑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그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책의 메인 주제는 아닙니다. 그 룻기는 어떻게 끝납니까? 그 책의 마지막 구절은 다윗 왕으로 이름이 끝나게 됩니다. 그 전체 책은 어떻게 다윗이 오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보게 될 때 거기에 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기가 정말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룻라는 여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그 족보의 이름이 거명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이름을 딴 그 책은 굉장히 희귀한 것이고 그리고 또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면 에스더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저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집회가 끝날 무렵에는 여러분이 그 룻기가 성경에 전체적으로 어떠한 중요한 부분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세 번의 집회에 걸쳐서 이 에스더서를 새 관점으로 조망해 보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멀리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방식으로 바라보겠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위해서 전체 그림을 다 담을 수 있는 렌즈를 통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이 에스더서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속적인 그런 세상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에 그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에스더서를 바로 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주님의 뜻이면 우리는 에스더서를 예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겠습니다. 에스더에서에 어떤 예언이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비교해서 에스더서를 보게 될 때에 에스더에 더 많은 예언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물론 에스더서에 담겨 있는 예언적인 내용은 다니엘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또한 스가랴에 담겨 있는 그 예언적인 내용과도 또 성격이 다릅니다. 에스더서에서는 이제 어떠한 그림으로서, 어떤 그 상징으로서 예언을 말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내일 이 시간에 그 하만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적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더서에 기록된 그 사건들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평행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에는 우리가 에스더서를 실제적인 그런 적용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부분에 있어서 더 상세한 것을 살펴보면서 그 적용을 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다른 부분을 읽을 때도 역시 우리는 이 구절이, 이 부분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실질적인 그런 교훈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우리가 전체적으로 바라볼 것이며, 그리고 이것을 예언적으로 또한 볼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를 실질적으로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제 전체적인 방법으로 조망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에스더서를 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이상한 사건인 것입니다. 제가 2시간 전에 제 스스로가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제가 30년간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교제하고 또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저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제가 다른 모임에 또 여러 지역으로 여행하고 있을 때에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나 두렵게도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이제 호텔에 도착해서 제 가방을 이제 풀어봤을 때, 제가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제가 성경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성경도 없이 설교자가 뭘 설교한다는 말입니까?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여러 번 짐을 꾸리고 풀었다가 하면서 뭔가 빠뜨린 모양입니다. 저는 완전히 공포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제가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로비에 나타났을 그렇게 빈손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가지고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매는 그 믿지 못하는 표정을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에스더서에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는 이것은 그냥 이제 연극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이제 갑자기 빠르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반응을 보일 것 이거는 막 기적과 같다. 이것은 정말 그것은 그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건의 이면에 계시고 그 모든 사건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것을 곧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이제 역사적인 사실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에스라 4장을 보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저희가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하니라"(스 4:5-6).
여기 '아하수에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성전이 다시 건축되었을 때에 아하수에로는 아직 즉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하수에로의 아버지 시대에 그 성전이 다시 건축되는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이 활동하였을 때, 그리고 그때에 이제 아하수에로가 즉위하여 왕위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비교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그리고 또 에스더가 어떤 시대에 일어난 일인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서 1장에 고레스가 원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곧 그 일이 멈추고 말게 됩니다. 그 대적들이 나타나서 그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와서 다시 백성들을 격려하였을 때 그 일이 다시 시작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성전이 완성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맨 처음에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온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적은 퍼센트의 이스라엘 사람들만 돌아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바벨론에서 그들의 삶을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들의 집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많은 투자를 바벨론에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제 정착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여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적은 수의 사람만 겨우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서 다시 점령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에스라 1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에스라가 그 성전을 다시 건축을 시작할 때에, 그것이 에스라서 4장, 5장,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에스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라서 7장에 보면 에스라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그 땅에 두 번째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서 이제 성벽을 건축합니다. 그래서 이 에스더서는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과 그리고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한 그 사건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남아 있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 페르시아가 그들을 점령하였을 때, 그때 있었던 일이 바로 이 에스더인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는 그 명령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사라질 뻔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에스더서의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실 여기에 그들을 향한 이제 다소간의 책망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에스더서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이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여호와'라는 단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에스더서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책에 한 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 언급되지 않은 것입니까? 여기에 어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돌아간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전이 건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성벽이 건축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다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에 그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 돌아간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다음에 그 땅에,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시 후에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일을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서 1장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아주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잔치가 군대의 그 행진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된 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에 대한 힌트로 3절의 후반부에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도의 귀족과 방백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잔치는 단지 먹고 마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잔치의 목적은 아하수에로가 자신의 왕국에서 자기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전시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장군들을 다 불러세우고 이와 같이 그의 군대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세상의 역사를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잔치 후에 그들은 메데 족속과 싸우러 간 그 역사적인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는 그 전쟁에서 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 역사 가운데 기록된 아주 큰 전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 큰 전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여기 전혀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역사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그 일이 바로 이 하나님의 역사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하수에로 왕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하나님은 관심을 두고 기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전투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잔치에 대해서는 기록하셨는데, 그 전투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투는 이 하나님의 백성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잔치는 하나님의 백성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잔치에서 와스디가 그의 왕후 자리를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이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만은 이제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데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역사 기록과 하나님의 역사 기록을 비교해서 볼 때에 우리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2장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또한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제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는 바로 그 일로 말미암아 요셉과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마리아가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갈릴리를 떠나 가게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들레헴에 속한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호적을 위해서 그들은 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가이사 아구스도로 인한 그 세상에 있었던 배경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예언이,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 하는 말씀이 응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이사에 대해서 아구스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런데 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세상에 명을 내렸다는 것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언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가 호적하라 명하였다. 제가 또 다른 몇 가지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알렉산더 대제가 또한 성경에 역시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엘서를 보게 된다면 그 그리스의 황제 알렉산더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강력한, 아주 전략을 잘 꾸미는 그러한 장군이었고 왕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그 문명화된 나라들을 다 점령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또한 무력을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점령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알렉산더 대제가 점령한 그것과 우리와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선 그가 그렇게 할 것을 다니엘서가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 알렉산더 대제가 그 온 세계를 점령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는가? 알렉산더 대제가 그 나라를 모두 점령하면서 그는 그 나라들을 모두 헬레니즘 문화로 만들어냅니다. 그가 점령한 모든 나라에 그리스 문화를 심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에 걸쳐서 표준화된 언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모든 세계가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고대의 헬라어였습니다. 이것은 좀 지루해지기 시작할 정도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런 헬라어를 사용하게 된 것에, 바로 그 헬라어를 통해서 이 신약 성경 전체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성경이 전파되기 시작합닌다. 그리고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가 한 언어로 통일되었던 것입니다. 이 마태가 아람어로 그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는 헬라어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또 다른 언어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린도전서는 한국어로 기록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물론 그것을 좋아하시겠지만, 이렇게 신약 성경에 여러 책들이 각각 다른 언어로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다면 지금 굉장히 이 내용이 전파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점령하는 사람들만 봅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들은 알렉산더 대제와 같이 아주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만 집중해서 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 유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냥 사용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런 정복자들이 아니라 이 성경을 손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이 알렉산더의 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세상의 사건인 2차 대전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그 2차 대전에 아주 슬픈 역사적인 사건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만, 또는 600만, 심지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바로 그 2차 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많은 유대인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제 자기들의 나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시오니즘'이라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사건은 많은 성경 학자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이 참으로 사실이며 또한 미래에 있어서도 분명히 이것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의 또 다른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 지금 이 시대에 여기에 이 지역 모임과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주의 깊게 들으신다면 지금 교제되는 모든 내용이 우리의 현재의 지역 모임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로마서 13장을 보게 될 때에, 사도바울이 그 나라와 권세는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거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투표해서 뽑았는데요? 물론 이제 사람들이 선거에서 뽑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투표로 뽑는 그런 행동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고대 당시에는 투표가 없었고 하나님이 그냥 느부갓네살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고레스를 세우십니다. 아하수에로 왕을 세우십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냥 투표로 대통령을 뽑고 총리를 뽑지 않아도 그 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 미국에서 일어나는 그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한국도 마찬가지의 그 정치 상황일 것입니다. 참으로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어느 나라에나 이 정치 활동을 보는 것은 참으로 혼란스러운 일들입니다. 모든 왕, 모든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스더서에서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기 말고 다른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왜 중요하게 기록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입니다. 많은 왕들이 세워지고 망하지만 하나님이 관심을 주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저에게 그와 같은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지역에 각각 지역 모임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로 그 지역에 거기서 하나님의 간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지역에 등대와 같이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바로 하나님이 임재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에 주님께서 임재하신 곳보다 더 중요한 장소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라에 어떤 궁궐이 있을 것입니다. 말레이시아에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 많은 높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이제 유럽 세계연합 같은 회의에 아주 높은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모두 다 합친다 해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지역에서, 하나님의 간증을 밝히고 있는 바로 이 장소인 것입니다. 여러 세상의 정부들은 그냥 세워졌다가 또한 사라집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으로 인해 우리가 더욱 격려를 받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아십니다. 이 세상에 그 높은 사람들은 왔다가 사라지고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는 가운데 바로 이 지역에 그 간증을 밝게 빛나는데 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 모임이 이 땅에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 그 위대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이 지역 모임의 활동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그렇게 배경으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녁에 아주 훌륭한 식사를 하였습니다. 불고기를 먹었습니다. 아주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 모든 음식들이 나왔을 때 이제 통역하는 형제가 음식을 여러 가지로 이렇게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여러 가지 반찬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옳게 보았다면 아마도 그 불고기와 쌀밥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그 외에 다른 밑반찬들이 있었습니다. 콩나물, 또 당근, 또 다른 야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이제 중요한 것에 이제 가장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정부가 그 메인 주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 모임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이 불고기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세상의 여러 가지 조직들은 그냥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저는 이것을 더 오랜 시간 동안 이와 같은 것들을 많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이 에스더서에서 배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여러 소선지자들, 또 여러 다른 성경책에서 동일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보좌의 계속해(?) 앉아 계십니다. 그 왕께서 그분의 백성들의 보존에 대해서 그 마음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그런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성경에 처음 5개 책을 가서 살펴보게 될 때 여기에 많은 기적들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립니다. 그 산에서 천둥이 치고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귀로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분명히 여기에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그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 하나님의 섭리가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이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셨는지 궁금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모든 사건의 끝에 다다르게 될 때에, 그리고 이제 다시 그런 모든 사건들을 뒤돌아서 생각해야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과정 중에 역사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그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늘 모든 경로 가운데 하나님이 다 역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을 다 주관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우리가 에스더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명을 따라 돌아가지 않은 그 사람들이 이제 무엇을 얻게 됩니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아주 화내실 수 있었습니다. 아주 실망하시고 이제 그들을 그냥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제가 앞에 말씀드린 대로 성전이 건축된 후에, 그리고 성벽이 건축되기 전에 그 사이에 이 에스더서 사건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믿기로 이 에스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느헤미야는 그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오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가 그 성벽을 건축하러 돌아갈 때에 그는 아닥사스다 밑에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입니다. 아하수에로를 아세르크세스라고 말합니다. 여기 아버지의 그런 명을 따른 것입니다. 그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와 그 모르드개에게 그 전역을 통치하도록 권한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하수에로의 아들 아닥사스다는 느헤미야 1장에서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예루살렘을 다시 성벽을 건축하는 데 그 목적을 이루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이스라엘 옛 땅을 보호하는데 그들이 역할을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다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다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 이스라엘로 돌아갔다면, 그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 아하수에로 왕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만이 에스더서에 기록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일들은, 그것은 그 하만은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까지 죽이는 그 조서를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벨론 땅에 남아 있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역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돌아간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와 같이 이루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쁜 면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부정적으로 그 면만을 바라봅니다. 모임에 많은 수년간 있었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저는 모임에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이와 같은 교훈을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어릴수록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적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또 나이가 들면 이제 그런 거에 대해서 좀 물렁해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너무나 많은 그 연약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도들을 강하게 하는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연약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는 것을 볼 때에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람들의 실패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성경에 기록된 불량자 중에 아주 가장 나쁜 사람이 유다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유다의 일을 읽게 될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고 고개를 가로젓게 될 것입니다. '아주 그냥 형편없는 사람이야.'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아주 불량자였습니다. 그는 그냥 그 창녀에게 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창녀가 자기 며느리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일이 여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 어떤 결말이 나오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는 이제 그리스도의 그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그런 형편없는 일이 기록된 그 장의 마지막에 두 아들이 그로 인해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한 명의 이름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분명히 실패한 게 맞습니다. 그는 죽어야 될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다가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갈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어두운 형편없는 일 가운데서, 그런데 여기에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의 이름이 베레스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그가 언급됩니다. 제가 물론 이것을 그 죄와 실패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에서 죄는, 또한 개인의 죄는 반드시 정죄받아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한 그러한 죄에 대해서 다루시는 그 역사하는 손길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실패 가운데서도 그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이제 선한 것을 만들어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들은 돌아갔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래야만 했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들은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 가운데 한 역할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또한 어떻게 보존되는지를 다른 면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대인의 역사를 보게 될 때에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돼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바로 왕이 남자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고 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서에서도 또 다른 그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근대 역사에 또 2차 대전에서도 또 다른 홀로코스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환난의 때에 더 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살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키려고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보존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더서 2장 7절입니다.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에 2:7).
스가라서 1장을 보겠습니다. 1장 7절부터 10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리오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슥 1:7-10).
스가랴서는 아주 어려운 책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제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스가랴의 환상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화석류 나무'라는 그 단어가 우리가 앞에 에스더서에서 읽었던 에스도서의 이름, 에스더의 이름 '하닷사'입니다. 그것은 에스더의 유대 이름입니다. 그 에스더의 유대 이름인 하닷사가 화석류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 본 환상 가운데 주님 자신께서 그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계속 읽어가면 화석류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들 사이에 지금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그 화석류 나무에 선 한 사람과 같이, 주님께서는 항상 그들 사이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에스더의 이름은 하닷사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하닷사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저는 학개와 스가랴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에스더가 그때 당시에 존재해서 어린 나이에 있었을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제안을, 이제 부드럽게 제안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이 환상을 말씀하실 때에는 이미 에스더의 일을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어떠한 예언에 자기 이름이 태어나기 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화석류 나무에 섰고 자기 이름이 그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 에스더의 그 이름, 그 화석류 나무에 선 그 한 사람, 그 환상은 하나님께서 항상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그 에스더서를 전체적으로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의 대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만이라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는 점점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간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부터 거의 왕과 같은 그런 권한을 받게 됩니다. 아주 그냥 거만하게 그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앞에 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전혀 자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예언이 하나 있습니다. 다니엘서입니다. 거기에 어떤 한 왕이 큰 신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어떤 악기들을 불게 될 때 그것을 신호로 모든 사람들이 그 신상에게 절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새 친구들은 거절합니다. 그리고 풀무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세 사람 가운데 또 한 네 번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미래에 있을 그 불법의 사람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조금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너무 많이 말하면 내일 할 말이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이 하만은 어디서 온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함무다다의 아들, 아각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각 사람이라니, 한국 음식 이름 같은데요. 아각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사무엘상 15장을 보게 되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 아말렉 사람을 전멸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에 이제 소와 양들을 다 챙기고 왕을 살려줍니다. 왕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은 마치 주일 학교에서 퀴즈 문제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이름이 '아각'입니다. 그리고 하만의 족속이 아각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아각으로부터 나온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하만이 아말렉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아말렉에 대해서 전멸하라고 사울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것을 불순종하였습니다. 때때로 이 불순종의 그 결실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그 결과를 가져 줍니다. 사울이 그 악각을 전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각이 이제 다시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을 전멸하겠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말렉과 이스라엘은 영원한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너무나 잔인하게도 그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남녀노소 누구나 다 죽이라고 명하시다니, 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에, 그 명령에, 그 주권의 의문을 품지 않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먼 미래를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사울이 그 사무엘의 명령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그 하만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말렉은 하나님의 영원한 원수인 것입니다.
제가 흥미로운 것을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이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 여러분이 아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마친 후에 숙제로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14장에 가게 될 때에 아말렉이 처음으로 언급이 됩니다. 이 소돔과 고모라에 거기에 여러 가지 왕들이 서로 싸우는 가운데에 거기에 아말렉이 처음으로 등장이 됩니다. 그리고 창세기 36장에 가게 된다면 창세기에서 마지막으로 아말렉이 언급됩니다. 창세기 14장에 아말렉이 기록된 그 단어는, 맨 처음 단어를 본다면, 그리고 36장에 마지막으로 아멜렉이 기록된 그 단어를 찾아서 그 마지막 단어를 본다면, 14장에서는 '아말락 히트'라고 적혀 있고, 그리고 36장에서 '아마 렉'으로 적혀 있습니다. (칠판) 그리고 히브리어 단어에서 이 a에 해당하는 단어를 택하고, 그리고 히브리어 단어에서 마지막 택해서 그리고 이 모든 나머지 단어들을 이제 수를 세워본다면, 이제 창세기 14장 아말렉이 기록된 그 a라는 단어부터 단어의 수를 모두 세고, 36장까지 아말렉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때까지 그 단어를 다 센다면 에스더서에 기록된 그 히브리어 단어의 수와 같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실까요? 제가 이제 이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 말씀드리기 위해서 특별히 언급을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분명히 이 성경책이 하나님의 영감받은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각 단어가, 그리고 각 철자가 모두 하나님께서 영감에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호흡을 불어 넣으신 바로 그 성경인 것입니다. 이 성경의 모든 그 하나하나 철자가 하나님의 영감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완전 그럴 수 있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 결론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깊이 각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말렉은 그 에스더서의 모든 페이지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된 입니다.것 그 아말렉의 이름이 그 에스더서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적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원수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불해야 되는 대가가 그렇게 큰 것입니다. 사울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말렉을 싫어하시는지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에스더서의 마지막에 다다르게 될 때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 주관하셔서 승리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내일 이 시간에 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적인 그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 다음 시간에는 이런 여러 가지 숫자들 말고 실질적으로 우리 삶에 어떤 것을 적용할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