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장 : 요셉과 그리스도 + 곁가지
< 창세기 37장 : 요셉과 그리스도 + 곁가지 > 기드온 쿠 형제님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와 같이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매 집회마다 이렇게 성도님들로 가득 찬 것을 볼 때 참으로 저에게도 큰 격려가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모두 바쁜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또 헌신되게 또 시간을 내주심에 또 여러분들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특별히 이 모임에서 저의 이번 방문을 위해서 준비해 주시고 또 계획해 주시고 또 여러 지방에 있는 모임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심에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여러분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돼서 크게 감사를 드리며 또한 여러분께서 저와 함께했던 그 맛있는 식사의 교제 가운데서도 또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한국 음식들이 참으로 저에게 아주 맛있었으며 즐겁게 식사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 한국 음식이 이제 말레이시아 음식보다 더 낫다고 계속 강요를 하셨는데요. 하지만 저의 반응은 '글쎄요,'였습니다. 참으로 여러분 모두가 또 말레이시아에 방문하기를 또한 부탁을 드립니다. 이미 말레이시아에 한 번 또는 여러 번 방문하신 분들이 계실 텐데요, 또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또 여러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몇 부분을 선택해서 본문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요셉에 대해서 이번 시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의 요셉의 생애가 이 창세기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보겠습니다. 37장 1절부터 4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창 37:1-4).
그리고 39장입니다. 11절부터 1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창 39:11-13).
그리고 14절과 15절도 읽겠습니다.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창 39:14-15).
20절과 23절까지 읽겠습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0-23).
40장 20절부터 23절까지 읽겠습니다.
"제 삼일은 바로의 탄일이라 바로가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할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으로 머리를 그 신하 중에 들게 하니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창 40:20-23).
41장입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창 41:14-15).
39절부터 43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창 41:39-43).
45장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1-8).
27절과 2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창 45:27-28).
그리고 마지막으로 50장입니다. 19절부터 22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창 50:19-22).
하나님께서 이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 불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히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비록 그 절반 정도는 아니지만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우리가 며칠간 계속 말씀 집회에서 다뤄왔듯이 이 창세기의 주요 주제 중에 하나는 후손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그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예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부터, 이 성경의 맨 처음 책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실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처음 장부터 이런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은 이삭과 야곱에게로 전달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열 두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이 창세기를 지나서 출애굽기 그 초반에 그 열 두명의 아들이 어떻게 그 열 두 지파와 나라를 형성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나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통해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분의 마음 가운데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제 사람들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많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 하나는 여러분도 그럴 테지만 아마 '레고'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 레고로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소년으로서 이제 레고의 여러 가지 블록들을 이제 함께 모아서 어떤 것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만들면서 배 모양처럼 만들어지면 이건 배다, 하고 우주선처럼 만들어지면 이건 우주선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이제 집처럼 만들어지면 내가 집을 만들었다, 합니다. 그냥 소년으로서 뭘 계획하고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어떻게 만들다 보면 어떤 모양이 만들어지고 그래 내가 이걸 만들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어른들도 사실 그렇게 합니다. 그냥 우리의 삶을 어떤 목적 없이 일단 그냥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인생에 대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시 후에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뤄가시는 데 있어서는 우리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데 어떻게 되는 대로 해나가시다가 그래 내가 이것을 했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그 처음이고 무엇이 마지막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부터 벌써 이 하나님의 원리를 증명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창세기 서두에서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단지 그 사단을 패배케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서 어떤 일을 하실지를 그분의 마음속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창세기를 이와 같은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창세기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게 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요셉은 결국 그 후손의 계통을 잇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유다가 그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다를 통해서 다윗 왕이 나고 그 다윗 왕을 통해서 메시아가 나오십니다. "기드온 형제님, 이 창세기가 그 하나님의 계획, 그 후손과 그 메시아가 나오는 그 계보를 말해주고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요셉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요셉은 그것과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약간 모순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왜 요셉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여기 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요셉이 그토록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창세기 38장을 읽어봐야 됩니다. 우리가 물론 이 시간에 그 장은 읽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이상하게도 요셉의 이야기가 37장부터 시작됩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가 38장에도 나오고 그리고 39장으로 연결돼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38장에 요셉과는 전혀 관련없는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유다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마 집에 돌아가셔서 이 38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38장 마지막 부분에 그 유다로부터 두 아들이 나온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명은 베레스고 한명은 세라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족보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보게 될 때에 베레스가 그 족보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영어적인 표현에서는 '그런데 한 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영어에서 '내 한 편 말이지' 이렇게 많이 말하는 것은 좋은 말하기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지금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하고 있다가 그런데 한편, 또 다른 주제를 이렇게 이어나가는 것은 잘못된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37장을 읽어가다가 갑자기 38장이 나온 것을 보고, 모세가 그렇게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면서 다른 얘기를 꺼낸 건가 생각하게 됩니다. 38장이 원래는 그 앞에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을 까먹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38장에 이렇게 집어넣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37장에서 38장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는 유다가 그 후손의 계보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여기에 요셉이 먼저 이야기가 등장합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한 대답을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알게 됩니다. 요셉은 왜 자신을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보냈는지를 설명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이 그 형제들이 자기에게 잘못 행했지만 용서한 것입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사실 당신들이 나를 여기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보내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웅덩이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리고 애굽에 팔렸고, 감옥에 들어갔고, 그리고 바로 앞에 섰고, 그리고 총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계획을 세우신 것은 요셉이 나중에 바로의 집의 총리가 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큰 기근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그러한 가운데 애굽의 구주로, 아니 이 세상의 구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바로의 꿈을 참되게 해석하고 이제 바로로 하여금 그 7년간의 풍경과 또한 7년간의 흉년을 준비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왜 바로의 그 곡식 저장고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애굽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로의 곡식 저장고를 그렇게 가득 채우신 것은 애굽 사람들뿐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이 야곱의 집, 그 가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없었다면, 그 요셉으로 인한 그 곡식 저장고가 없었다면, 이제 야곱의 집은 그 기근으로 인해서 완전히 절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37장에서 하나님은 요셉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38장에서 이제 유다의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 후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 후손을 어떻게 보존할지를 요셉과 연관지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7장과 38장에서는 두 개의 다른 지역의 인생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이제 유다가 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가나안 땅 지역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재앙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요셉도 처음에는 왜 자신이 애굽에 가야만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요셉은 바로의 곡식 저장고를 그로 인해서 준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에서는 두 개의 다른 인생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가운데서 이 요셉의 삶에 대해서 먼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야곱의 집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요셉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별개의 사건으로 진행되는 것이 한 군데로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이 위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을 다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셉의 모든 이야기는 그 후손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후손의 계보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후손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가 여기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요셉의 이야기가 왜 여기 있는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인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열 두 지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요셉의 다른 형들이 요셉에게 대해서 어떻게 행했는지를 여기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요셉은 그 후손의 개통을 보호하는 데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상징적인 측면에서 이제 그 이스라엘이 하늘의 요셉을 어떻게 핍박하였는지를 또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실질적인 관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통해서 이러한 실제적인 교훈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실질적으로 역사하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37장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이제 다른 한편, 잠깐 곁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37장부터 요셉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제 38장을 먼저 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38장이 때때로 많이 사람들이 상고하지 않는 그런 장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아마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우리가 다루기에는 조금 어색한 그런 이상한 일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이것을 그냥 건너뛰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잘 설명할지 어려워합니다. 참으로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이 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유다는 악당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선 먼저 그의 아들들도 악당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하나씩 죽어갑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은 아직 너무 어렸는데요. 그 율법에 따라 다른 아우들은 먼저 죽은 형의 그 계보를 이어주도록 결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제 셋째 아들이 아직 너무 어리니 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유다는 그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모두 다말과 결혼해가지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시간을 끌려고 그렇게 변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셋째 아들이 자라게 됩니다. 이제 다말과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됐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냥 입을 씻고 아무 액션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제 창녀인 것처럼 꾸미고 그리고 유다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그를 보게 됩니다. 며느리인지 알지 못하고 그리고 그와 동참하게 됩니다. 그 창녀로서 그를 산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은 당신이 나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겠는지를 물어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에게 자신이 나중에 값을 치를 것을 약조하면서 자신의 인장 반지를 그에게 주게 됩니다. 그리고 다말은 그것을 취하고 그리고 다말은 그 유다의 아기를 임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임신 소식이 유다의 집에 들리게 됩니다. 그 다말이 음행을 범했다. 그 아기를 임신했다. 그 다말을 끌어내서 돌로 쳐 죽여라. 이제 다말은 유다 앞에 나오게 됩니다. 이제 유다가 자신에게 준 그런 유다에게만 속한 그 인장 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건 누구 겁니까? 그리고 유다는 말하기를 다말이 나보다 의롭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말은 그렇게 유다의 아기를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베레스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에 우리는 어떤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 이상한 이야기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그 악함이 이 이야기 가운데서 참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그리스도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아주 완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그 그리스도의 계보 앞에 두기에는 여러분이 절대로 택하지 않을 그러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 끔찍한, 보기 싫은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두신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성경에 여러 가지 이상한 이야기들은 참으로 이 성경이 우리가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이것이 사실이 기록된 거라는 것을 믿게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기록하실 때에 그런 이상한 이야기들은 다 삭제해버리고 여러분에게 아름답지만 절반의 진실인 그런 것만 제시하길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많은 그런 슈퍼 히어로 이야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이제 완벽하게 우리한테 제시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 후에 행복하게 오랫동안 잘 살았다고 결말을 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 전설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아주 아름답게 그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영웅에 대해서 이와 같이 이상한 이야기를 쓰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은 온전히 정결하시고 죄 없는 분이라고 전파하고 있을 때에 어떻게 그분이 이러한 이야기 가운데서 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기록자로서 우리에게 그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성경을 우리 생각에는 이것은 성경의 내용을 해친다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이 성경의 진실됨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사는 사실 그대로 진술돼야 됩니다. 그냥 멋진 일만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우리를 위해 기록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성경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역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그리고 참된 진실된 역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허락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의 실패를 이제 바꾸셔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에게서는 그 사람들의 최고의 이상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것은 사람들에게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들의 실패 가운데서, 그리고 죄악 가운데서, 그리고 심지어 그러한 일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그 뜻을 어긋나게 하거나 도중에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의 목적을 위해서 다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그 뜻을 구부리고, 어긋나게 하고, 망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국에는 그 뜻을 곧게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38장은 얼마나 놀라운 장 입니까? 참으로 성경은 정직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제 37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참으로 너무 이제 곁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이제 곁가지가 아니라 이제 메인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저에 대해서 걱정하고 또한 여러분에 대해서도 걱정이 됩니다.
37장 2절에서는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에게 한 퀴즈를 내겠습니다. 이 창세기에서 이 '약전' 얼마나 많은 그 족보가 나와 있습니까? 제가 그냥 다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제 아는 척하시고 단지 집에 가서 그것을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합해서 10개의 세대가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나와 있는 그 10개의 족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 어떤 족보는 그 후손과 밀접한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고 돼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이스마엘과 에서의 족보도 창세기에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족보도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후손의 족보와 그 다른 인물들의 족보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 약속의 후손들과 관련된 족보가 언급될 때는 그냥 이름만 쭉 열거한 것이 아니라 한 이야기로 그것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후손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족보인 경우에는 그냥 이름만 쭉 연결이 됩니다. 여기에 이 원리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참 그들이 말할 만한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후손의 족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속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2절에서 야곱의 약전이,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라고 나온 다음에 그 후에 그의 후손들이 쭉 이름이 열거될 걸로 기대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오히려 이제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앞서 말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요셉의 이야기가 여기 언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후손을 어떻게 보존하고 계신지를 증거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야곱의 계통을, 족보를 보존하고 계시는지, 거기에 요셉이 중요하게 등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 그리고 그다음 바로 이어서 "요셉이 17세 소년으로서"가 언급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말할 만한 가치 있는 이야기가 그들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셨는지 그들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와 같은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가 야곱의 족보라고 언급되면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 또한 요셉의 옷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우선 요셉은 야곱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그가 채색 옷을 받게 됩니다. 여기 특별히 주일학교 학생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또 한 번 실망시켜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여기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그 학생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면서 걱정을 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저는 요셉과 그의 채색 옷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이 요셉에 대해서 그 채색 옷을 보게 될 때에 이제 큰 그림을 보면 그의 옷이 무지개 색깔로 채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모습은 아니라고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단지 많은 색깔을 가진 옷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가 긴 옷'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그 소재로 만들어진, 그가 다리까지 쭉 내려오는 그러한 옷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일학교 학생들이 너무 실망해서 나쁜 꿈을 오늘 밤 꾸지 않길 바랍니다. 그것은 무지개 옷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도 그런 옷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히브리어 단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주 아름다운 옷입니다. 이것은 아주 멋진 옷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옷이라서 그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보고 시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 '아들의 옷'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제 형제들이 그의 옷을 빼앗고 그리고 짐승의 피를 묻힙니다. 그리고 그것을 야곱에게 갖다 줍니다. 그들은 아주 이것을 꾀를 내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것은 단지 그 피가 묻은 요셉의 옷을 보여준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그들은 요셉이 죽었다라고 말을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그 옷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본다면 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옷의 주인이 죽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야곱은 그들의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속임을 당합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장면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거기서 그는 이제 종으로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가 입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옷은 이제 벗겨짐을 당하였습니다. 이제 애굽의 주인 아래에 있는 그 노예의 옷을 요셉은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엇입니까? 보디발의 아내는 이제 그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에게 "나와 동침하자." 말합니다. 요셉은 "아니" 거절합니다. "내 주인이 나에게 이 집의 모든 것을 맡겼지만, 당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맡겼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를 유혹하였고 어느 날 집이 아무도 없을 때 이제 요셉을 또 유혹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도망갑니다. 그리고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그의 옷을 잡게 됩니다. 요셉은 그 옷을 버려두고 도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이 자신을 겁간하려 했다고 그는 거짓말로 고소하게 됩니다. 이제 보디발은 화가 나서 요셉을 감옥에 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아름다운 옷에서부터 그 낮아진 노예의 옷을 입었고, 이제 요셉은 죄수의 옷을 입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실제적인 것을 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특별히 청년분들이 이것을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이 드신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그러한 유혹은 더욱 더욱 우리에게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형제 자매님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이 외모는 여러분의 경건함과 또한 그 신실함으로 꾸며져야 됩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외모는 그 정결함과 그 분별로 꾸며져야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 세상의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특별함이 그들로 하여금 저게 뭐지? 하고 다가오게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디발의 아내가 그에게 눈짓 한 이유입니다. 요셉은 그에게 뭔가 다른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모임에서 36년간 모임 생활을 하였는데 거기서 본 것이 있습니다. 많은 젊은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모임을 떠난 그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 불신자와 결혼하게 된 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불건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 가운데서 사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사는 삶이 전혀 가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를 그분의 손으로 지켜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도망가는 것입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이 청년의 정욕은 단지 그냥 젊은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 형제님들, 참으로 이것은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많은 위대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간증들을 싹 없애버린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분명하게 아니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면서도 말입니다. 참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와 같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제 39장을 보면서 우리는 큰 격려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4번에 걸쳐서 이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하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라" 이제 그 주님과 함께하는 임재와 그분의 축복이 이제 우리에게 보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어떠한 시험이 있거든 어떠한 고난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을 통과하고 이 보상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호화로운 생활을 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떠나면서 그것을 택한다면 거기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슬픈 인생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 하지만 그와 다르게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을 읽게 됩니다. 우리는 보디발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이 번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 간수는 요셉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을 돕는 자로 삼습니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2-23).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렵고 그 힘든 순간도 능히 지날 수 있습니다. 그 시험의 순간 가운데서도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번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통과할 때에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간증이 밝게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포 중부 모임에서 눈물 골짜기로 지나는 그 시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시편 84편입니다. 이 순례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여행은 아주 길고 위험한 여정입니다. 그는 박하 골짜기,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그런 길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눈물 골짜기라고 붙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부상을 입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눈물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기록하기를 "주로부터 힘을 얻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눈물 골짜기가 이제 샘이 솟는 은택을 덧입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 눈물 골짜기가 축복의 골짜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이른 비가 내리고 그 샘이 솟는 곳이 됩니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렵더라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길을 이제 부드러운 길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길이 완전히 쉬운 길이 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제 그들의 받는 그 어려움들이 실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가 거기를 부드럽게 그 어려운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참으로 그분의 시련에 다른 한편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셉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는 이제 죄수로서 죄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 어떤 드라마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가운데서 그 술 원과과 떡관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갑자기 그들이 등장한 것에 대해서 왜 그 사람들이 나오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바로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한 밤에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각각의 다른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떡 굽는 관원장이 나중에 목이 달려 죽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술을 맡은 관원장은 다시 그의 직위가 회복되어 바로에게 그의 술을 다시 올려드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이제 당신이 좋은 일을 맡게 되거든 나를 잊지 말라달라고 특별히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제 바로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 살찐 일곱마리 암소와 또한 야윈 일곱 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충실한 이삭과 그리고 아주 흉한 이삭을 보게 됩니다. 바로는 이 꿈을 꾼 다음에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꿈을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은 이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왔을 때 그 술 맡은 관원장은 기억하였고 요셉은 그의 옷을 바꿔서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그는 이제 죄수의 옷을 벗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 앞에 서기 위해서 단정한 옷으로 입고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애굽에서 둘째로 높은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는 요셉에게 다른 한 옷을 입혀주게 됩니다. 이제 아름다운 그 겉옷을 요셉에게 입혀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비싸고 귀한 옷을 요셉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단을 쌓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판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기둥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옷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옷은 요셉이 어떠한 그의 인생 가운데 어떤 것을 경험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욱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요셉의 그 인생의 여러 부분에서 다른 옷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그러한 어떠하심을, 그분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가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을 얻으신 것을 베드로전서 1장에서 말했습니다. 그의 받으신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하였습니다. 바로 요셉의 생애가 그가 받으신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은 기록하기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의 형제들이 그와 같이 그를 시기하였고 미워서 그를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미움의 그 절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웅덩이에 던져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 이스라엘의 미움의 절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을 거절하였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들이 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의 형제를 애굽에 팔아 넘겨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되었습니. 또한 우리는 요셉의 그 종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종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완벽한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기록된 것처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거짓 고소하였습니다. 그의 입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그리고 이제 보디발은 요셉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했습니까? 이제 감옥에 던져넣고, 그것은 웅덩이에도 던져졌고, 그리고 감옥에도 던져졌고, 만약 여러분이 요셉이라면은 왜 내 인생은 계속 던져지기만 하는 건가? 낮아지기만 하는 건가? 아버지의 집에서 그는 그 웅덩이의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높아졌으나 또 다시 한 번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그에게 여기서 빠져나오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비록 그것은 희미한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의 죽음을 분명하게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요셉은 바로 앞에 높여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분의 옷을 바뀌어서 그는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여기에 요셉의 새로운 얼굴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바로는 요셉에게 아주 놀라운 아름다운 옷을 선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미래에 우리 주님께서 우주적으로 온전히 그 영광을 찬란하게 나타내실 그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분께서 이 땅의 왕으로서 완전히 온전한 영광을 취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하게 요셉의 그 인생을 살펴보게 될 때, 우리는 또한 그 야곱의 족보가 어떻게 그를 통해서 보존되게 하셨는지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또한 요셉 자신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받으시고 영광을 얻으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이 가운데서 우리는 실질적인 교훈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젊은 성도님들이 자주 하는 질문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국만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도 많은 질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제 그것을 한번 비교해서도 들어보실 수 있겠습니다. 그 질문들은 아주 비슷합니다. 젊은 성도님들이 저에게 와서 자주 하는 질문 중에 하나는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참으로 기드온 형제님 참으로 여러분 형제님도 이 질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시작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 질문이 계속 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질문입니다. 단지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젊은 성도님들이, 특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먼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여러분에게 어떤 밝게 빛나는 천사가 나타나가지고 다음 10년 동안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하는, 이제 그렇게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저에게 와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될 때에 그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지금 이 순간에 당장 전부를 알아야 될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언제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는지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까? 그 창세기에 이제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그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간단하게 적혀져 있는 설명서를 주시고 지금 너는 이 계획 가운데 여기에 있다라고 요셉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앞을 향해 바라보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동일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요셉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그와 같이 요셉은 뒤를 돌아보면서 "그렇죠,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팔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애굽에 보내신 겁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이 말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낸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신 이유는 바로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후손들을 위해서 나를 여기 보내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이 그 웅덩이에 던져질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도, 이제 그의 모든 가족과 연락이 끊겼을 때도, 그는 비록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라고 질문했겠지만 그는 왜 하나님이 자기를 애굽에 보내셨는지 그때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 감옥 가운데 던져 넣어졌을 때에도 요셉은 그때 이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사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바로가 그를 높여서 그가 바로의 그 나라를 통치하면서 그것을 준비하면서 그는 이제 점점 더욱 분명하게 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셨고 무엇을 위해서 나에게 그토록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지를 점점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설교자는 아닙니다. 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젊은 분들이 나중에 장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선교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어떤 특정한 사람과 나중에 결혼하겠지라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여러 가지 것들을 다 말하고 있는데요, 또 한국의 누군가와 제가 또 결혼하게 될지를, 뭐 그런 것들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제 말레이시아의 젊은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를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잠깐 말씀드린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잠깐... 우리는 다음 5년 또는 10년 후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인생의 한 순간에 다다르게 될 때에 우리는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왜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게 하셨는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이 책이 아니고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성경을 읽지 않고 살아갑니다. 많은 젊은 성도님들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냥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기만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제 제가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젊은 성도님이 이제 직장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2년 또는 3년을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3년 동안 그 나라에 가서 있는 게 괜찮을까요?"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이러한 말들을 이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그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선 그 핵심을 먼저 말하지 않고 이제 다른 것들을 먼저 이런 것이 가능한가요? 이런 식으로 먼저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여러 가지 것들을 많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10분 15분 동안 이러한 것에서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을 먼저 잔뜩 말한 후에 그리고 나서 "그런데요 말이죠, 그런데 이런 문제가. 제가 아는 한 이런 작은 문제가 저는 아직 거기에 모임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거 문제인데."라고 말합니다. 근데, 그는 또 "그런데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은 지금 거기 가서 모임을 세울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아니면 그 직장을 갖지 않을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둘 중에 뭡니까?" 그는 이렇게 쳐다봅니다. 도대체 뭘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까? 때때로 기도해 볼게요, 라는 것을 이제 변명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참 그것에 대해서 이 성경은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들은 "아, 혹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을까요?" 말합니다. 제가 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까? 분명하게 그와 같은 장소에 가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런 장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거기 모임을 세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젊은 성도님들은 전혀 그것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들이 단지 생각하는 것은 미국 달러를 많이 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될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우리의 환경 가운데서 내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그 뜻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왔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의 최고의 것을 드리기 바랍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모임에 걸길 바랍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다해서 참 고난 가운데서 그분을 섬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그분의 말씀을 읽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참으로 그분의 백성들과 가깝게 교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신자와 결혼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 충성을 끝까지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지금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그 인생 가운데서 계속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돌아보면서 요셉처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베푸신 그분의 긍휼하심에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지혜에 대해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문들을 닫아버리신 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문을 여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심을 따라 그 문을 닫으셨고, 그리고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분께서 문을 여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선하시고 미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죽기 전에 야곱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네가 살아있는 걸 보니 내가 족하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참으로 하나님께 충성되고, 그리고 이 모임을 충성스럽게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선이 계속해서 그분의 보좌에 향하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다 됐다라고 그리고 그전에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그때 그것을 보고 이제 족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의 요셉이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거기에 우리를 위해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볼 때에 우리는 족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늘 밤일 수 있습니다. 아주 금방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참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기다리는 이 기간 동안 그분을 우리의 마음을 다해 섬기기를 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