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고린도전서 16장(요약본)
< 성경읽기 : 고린도전서 16장 > 23년 6월 17일 토요일(요약) / 데이빗 길리란드 형제님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찌어다
(고전16:1-24, 개역한글)
* 길리란드 형제님 :
제가 간단하게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개요를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6장이 이 서신서 전체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6장을 단지 부록으로 생각합니다. 서신서의 다른부분과 특별히 관련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6장의 마지막 한 페이지가 없다고 해도 별로 잃을것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16장의 목적에 대해서 심히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서신서의 앞부분에서 분쟁과 관련해서 다루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무질서함에 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15장에서 잘못된 교리에 대해서 교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는 글을 기록합니다. 저는 이 장의 결론이 10절에 나와 있다고 봅니다. 디모데가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다"라고 합니다. '주의 일'에 대한 표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표현이 신약성경에 다른 한곳에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15:58, 개역한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주의 일이 무엇인가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힘쓰는 자여야 하고 항상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15장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이와같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답이 16장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16장의 여러 부분이 주의 일을 여러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의 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또한 많은 장소들을 말합니다. 주의 일에는 여러 장소가 관련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여러 계획들을 말합니다. 또한 주의 일에는 이와같은 많은 계획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의 일은 돈에 대해서 많이 사용이 됩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이동하는 여행에 대해서 말합니다. 많은 형제들이 다른 장소로 가고 다른 모임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많은 섬김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의 섬김을 봅니다. 아볼로의 섬김을 봅니다. 또한 아굴라, 브리스가의 섬김을 봅니다. 미혼자의 섬김이 나오고 결혼한 자들이 언급이 됩니다. 주의 일에 이와같은 여행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사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을 통해 1세기의 교회의 모습을 한 창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주의 일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장을 보면서 앞에 있는 장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장을 연결해주고 있는 단어가 "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에 대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이 장에 대한 서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을 각 부분으로 나눠볼 때에 개요를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구절에 대해서, 단어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볼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 단락별로 어떤것을 말하고 있는지 기억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때 이 귀한 장이 말하고 있는 바를 기억할수 있을 것입니다. 각 성경의 장은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옆 가지로 나가서 탐험하는 것도 우리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모든 길을 다 찾아갈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1-4절까지 첫번째 단락입니다. 이 단락에서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이 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유대인 신자들에게 돈이 보내지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돈을 보내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증거입니다. 또한 교제의 놀라운 증겁니다. 사도바울이 지중해 유역에서 사역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집회에서 사도바울이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 사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바로 이 지역에서 많은 헌금을 모아서 가져가게 됩니다. 이 지역의 사역에 있어서 사도바울의 사역의 절정이 이 헌금을 모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교제의 끝으로서 이방인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예를 찾아봅니다. 로마서에서도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도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헌금을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이었는지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재정을, 교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첫번째 부분에 대해서 여러 형제님들께서 교제를 나눠 주시고 또 교제를 이어가겠습니다. 자유롭게 질문이나 교제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방식은 성경적인 성경읽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은 60분간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고린도전서에서 사도가 "무엇무엇에 대하여"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사도에게 보낸 질문에 대해서 사도가 답변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혼에 대해서 대답했고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도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여기서 연보에 대해서 대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연보의 의미에 대해서 형제님들 가운데서 교제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시간 질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질서는 이 서신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14:40, 개역한글)
15장에서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실때 "모든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에게 명한 그 질서를 여기서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갈라디아서를 보면 갈라디아서 실제로 연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없습니다. (영어로 이후 말씀하심)
길리란드 형제님 :
* 형제님께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가 직접적으로 헌금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하지만 여기서 보듯이 "내가 갈라디아 교회에게 명한 것 같이" 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이 부분에서 갈라디아 교회에게 명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교회지만 그 진리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때때로 많은 세상의 종교들은 뭘 줘야 한다고 강조해서 신도들을 압박합니다. 하지만 16장 2절에서 보듯이 사도는 신도들에게 헌금에 대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내는 것은 각 사람이,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를 얻은대로 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 주신 대로, 그 비율대로 내는 것입니다.
여기 형제님들 가운데 왜 여기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진 분이 없습니까? 단지 하나님께서 복주신대로 "이를 얻은대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십일조를 따라야 되는것이 아닙니까? 그냥 십일조가 그냥 구약의 옛 경륜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것일까요?
- 김회상 형제님 :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신전국가였습니다. 제사장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제도가 헌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운영하시는데 십일조를 세금으로서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이 그것으로 성전을 유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한국의 상황은 모르지만 영국에서 우리는 정부에 세금을 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부에 내는 세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들에게 내는 십일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법정으로 정해진 세금이 아니라 우리가 감사함으로 자원해서 내는 헌금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절에서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바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신약의 헌금에 해당하는 구약의 모습을 찾자면 성막을 지을때 필요한 재료를 말하고 원하는 사람들은 자원하여 가져오라고 했을때 너무 많이 백성들이 가져와서 금했던 것이 신약의 헌금의 그림자가 아닌가 봅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원해서 내며 율법적으로 몇퍼센트를 내야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9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마음의 정한대로 내는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입니다.
형제님들 가운데서 매주일 첫날에 저축하여 두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 김회상 형제님 : 첫번째로는 정기적으로 냈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는 그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경륜의 시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버지고 우리는 형제의 관계입니다. 형제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희생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본받고 드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우리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고대합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힘쓰는 가운데 우리는 연보할 수 있습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매주일 첫날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앞장에서 사흘째, 셋째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첫날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만찬에 드리는것을 분명하게 연관지어 말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 매주일 첫날이라는 표현을 8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20절에 매주일 첫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매주일 첫날과 주님의 만찬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첫날 만찬상의 두 상징물을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헌금을 드리면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주일 첫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매주 저축하여 두어서 사도가 왔을때 그들이 당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압박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그런 헌금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에서는 그러한 헌금을 다루는 형제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지역모임에서 인정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루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헌금을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헌금은 반드시 책임있는 형제들에 의해서 다뤄져야 합니다. 어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된 좋은 간증을 받는 형제들이 이것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질문이 있습니다. 1-2절에 나오는 헌금은 동일한 헬라어로 되어 있는데 3절은 다른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여러분께서 시간을 두고 고린도후서 8-9장에 나온 헌금을 다루는 표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섬기는 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교제라고도 표현하며 열매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여기서는 연보라고 말하며 이 모든것이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모아서 보여줍니다. 이 모든 용어들을 살펴보면 헌금의 의미를 알수 있습니다. 그 모든 용어들이 헌금의 의미를 하나로 모여줍니다. 이 헌금이 다른 성도들과 연결해주고 그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는 신자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러 표현들을 통해서 사도가 헌금을 얼마나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세상은 드리는 것에 대해서 상업적으로 압박을 가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모임에서 성경에서 드리는 헌금은 완전히 다른 그림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5절에서 주님의 일에 대해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2절까지 우리는 고린도로부터 온 세명의 방문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방문은 그들의 모임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사도바울 자신이 방문하고, 10절에 디모데가 방문할 것입니다. 12절에서는 아볼로가 방문하도록 말하고 있지만 즉각적으로 아볼로가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가 북아일랜드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나라에서 방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줌으로 많은 유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많은 수의 은사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역시 다른 지역에서 은사자들이 방문했을때 그 유익을 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지역모임의 은사를 개발해야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방문해서 우리를 이롭게 하는 은사자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일랜드에는 많은 교사들이 있지만 방문해서 많은 유익을 누리고 있습니다.
- 최병조 형제님 : 저축하여 두었다가 라는 의미를, 급하게 하지 말고 미리 저축하여두었다가 하라고 교제해 주셨습니다. 추가적으로 질문을 드린다면, 월급을 받는 성도가 일정한 수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달에 4주 주일이 있는데 이때 월급을 타는 첫 주일날 마음에 작정한대로 한꺼번에 드리지 않고 네번에 나눠서 드린다는 것이 저축하여 드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헌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에게는 모임에 모여지는 대략적인 헌금의 양을 계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 말고 싶습니다.
- 윤주석 형제님 : 곁들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헌금을 예배의 일환으로 드립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이를 얻은대로 드립니다. 그런데 다른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배를 드리는 마음으로 각자 드려야 하는데 이를 얻지 못하는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지 궁금합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학생들같이 수입을 없는 경우에는 부모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이를 얻은대로 헌금을 낼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율법적으로 따라야 되는 규칙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들에게 공급하실수 있는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것을 볼 때에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일때부터 공공기관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수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양을 헌금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양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두렙돈을 받으신 것처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음 부분에서 형제들의 이동에 대해서 봅니다. 그리고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는 적어도 세가지 것의 영향을 말합니다. 첫번째로 그들에게 사도가 와서 겨울을 보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날씨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8-9절에서 그는 에베소의 많은 일들로 거기 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은 날씨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진행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또 아볼로는 그가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는 동역자인 아볼로의 마음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라고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가 자기와 같은 원리로 일함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가 방문했을때 많은 영적인 유익을 줄것을 확신합니다.
- 윤주석 형제님 : 8,9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광대하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고전16:8-9, 개역한글)
길리란드 형제님 :
* 사도가 에베소에 계속 거하려 한것은 에베소에 여전히 많은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 근방에 위치하게 됩니다.(이해 잘 못했습니다?) 사도가 고린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순절에 출발해야지 미칠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까지의 거리가 6만키로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 많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떠나서 여행을 시작해야 여러 모임들을 방문하면서 교제를 나누고 그리고 겨울에 고린도교회에 도착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은 주님의 일로 작은 창문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기 문이 열려있지만 대적하는 자가 또 많습니다. 주님의 일의 기회가 있을때마다 항상 방해가 동시에 있습니다. 사도는 에베소에서 많은 대적을 만난것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주의 일과 관련해서 형제님께서 돈이 관련됨을 말씀하셨습니다. 16장 1절을 보면 그 돈이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는데 사용되었음을 봅니다. 6절에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사역자를 위해서도 물질이 쓰여짐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가 내게로 오게 하라"(11절) 또한 기회가 열렸을때 사도는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참으로 적절한 코멘트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헌금에 대해서 여러가지 사용처를 이 장에서 보게 됩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그 돈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 돈이 기회를 여는데, 그 문이 열린곳에 사용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사용처가 계속 공급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이 주님의 일, 그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일에 이 23년에도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돈이 포함되어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어떻게 이동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5-12절까지 다른 언급을, 교제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때때로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을 아주 주의하며 세웁니다. "과동할 듯도하니"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디모데가 이른다면" 우리는 계획을 세워야 되지만 항상 주님께서 모든 계획을 주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10절에 보면 "디모데가 이르거든" 11절에 "멸시하지 말고" 디모데가 멸시를 받는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4장에서 "본이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자의 본이 되어서 나이가 적은것이 멸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우리는 디모데에게 얼마나 많은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 보게 될 때 놀라게 됩니다. 이때 당시 디모데는 30세 정도의 젊은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에 가서 사역을 하는것은 우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자리에 있는것과 같습니다. 제가 정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디모데가 이르거든 그에게 합당치 못한 압박을 가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잘 환영하고 받는다면 디모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유익을 받을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사도와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전4:17, 개역한글)
"내 사랑하는 아들" "주 안에서 신실한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를...생각나게 하리라"
- 김회상 형제님 : 고린도 교회의 육신적인 문제 때문에 디모데는 멸시받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분파주의, 육신적인 것을 좇는 마음을 사도바울이 염려하고 있음을 11,12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두 극단을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는 아볼로에게 가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자신도 디모데보다 아볼로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더 환영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아볼로에게 가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면 사도가 그런 부탁을 하고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없는 가운데 아볼로가 더 명성을 얻을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백성들의 번영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여섯번째 짧은 단락인 13-14절을 보겠습니다. 이 짧은 단락의 의미에 대해서 형제님들께서 교제를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이 짧은 표현들이 앞에 있는 장의 문제점과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깨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깨어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서서" 역시 15장과 관련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복음 가운데서 섰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자답게"라는것은 14장과 연관해서 생각할수 있습니다. 20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남자가 되라입니다. 그의 태도에 있어서 성숙한,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강건하여라" 특별히 이것은 사도가 연약한 형제들을 다루고 있을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은 앞의 장에서 그들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으로 행한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 6가지 덕목이 주의 일에 있어서 굉장히 필수적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 고근석 형제님 : "깨어 믿음에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깨어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연보를 드릴 때에 기쁨이 없다면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되지 않고 감사함이 빠진다면 그것은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의미도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라. 성령의 인도 가운데 충만해 졌을때 그가 깨어서 남자답게 담대할수 있습니다. 먼저 남자가 본이 되지 않으면 여자를 인도해 주지 못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15:34, 개역한글)
분명하게 서 있으라는 표현은 사도의 서신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교리들, 모든 풍조에 요동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남자와 같은 성숙함이 필요함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전서의 앞부분에서 사도는 그들이 어린아이로서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는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북아일랜드에서 어떤 형제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작은 아이들은 장난감을 요구하고 때때로 떼를 씁니다. 그리고 금방 울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장난감을 원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역모임의 교제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이제 자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강해졌을때 주의해야 되는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4절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하지만 이 사랑에 대해서 잊지말라. "너희 모든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라고 덧붇이고 있는 것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16장이 주의 일에 여러 말씀인 것을 교훈을 받았는데요. 그리고 그것이 사랑으로 행하여짐을 배우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것과 사역자들을 돕는것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15절의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을 영접하는 것도 거룩함으로 입맞추는 성도들의 교제도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들을 가르치는 모든 것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본을 16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한 위대한 장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15-18절까지 다음 단락으로 연결됩니다. 스데바나의 집입니다. 17절에 스데바나와 같이 나온 두 사람은 스데바나의 노예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꽤 초기 시기에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또 지역 모임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또 많은 편지를 사도에게 가져다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서신을 가지고 왔을 때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린도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육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지만 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스데바나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간증을 나타냈습니다. 아주 어려운 지역모임 가운데서 긍정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의 마음만 시원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너희 마음도 시원하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성도들을 알아줘야 됩니다.
이 시대에도 동일한 일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 장에서 공적으로 일하는 사역자들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와 아볼로입니다. 그들은 전심 사역자입니다. 여기에 또 그렇지 않은 다른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심 사역자가 아니지만 주님의 일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곳에서 주님의 일의 상당 부분이 이 신실한 가족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스데바나의 집에 대해서 더 교제하실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 박형섭 형제님 : 3절에서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연보를 모아서 갖다주는 것으로 설명하는데요. 그것을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믿음의 교제를 저희들이 발견했습니다.
이제 스데바나의 집으로 오게 되면 눈에 띄는것이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다는 대목이 보입니다. 이것이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섬겼는가를 보게 됩니다.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 "너희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
사랑과 관련해서 질문이 있는데요. 우리는 말할수 없는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삶에서 그 은혜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스데바나의 집을 생각해 볼 때도 스데바나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사모한다면 어떤 영적인 태도를 갖는것이 그런 놀라운 믿음의 교제에 동참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을 바라볼수 있는 영적인 안목과 태도를 우리가 어떻게 가질수 있겠습니까?
길리란드 형제님 :
* 형제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때에 15절에서 흥미로운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성도 섬기기로 그들이 따로 구별하여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 섬기는 일에, 돕는일로 전념하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놀라운 기술들이 있지만 그들의 길은 딴데 생각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가정은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 자신을 다른 성도들이 사용할수 있게끔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내용입니다. 다른 성도들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두 그림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가 지역모임 가운데의 교제입니다. 두번째가 지역모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이 두가지 교제가 이 한 장에서 아름답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로부터 19절부터 마치는 인사를 합니다. 교회를 언급하고, 한 부부를 보게 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동료, 모든 형제들이 나옵니다. 교회들의 연결과 형제들의 연결된 교제를 봅니다. 그들 모두가 행복한 교제 가운데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9-20절에 이 아름답고 예의가 갖춰진 그리스도인의 문안 인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21절에 바울은 친히 펜을 들어서 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분명한 서신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들에게 제한없는 자원이 주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항상 함께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 자신의 사랑이 그들과 항상 함께하는 것을 2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22절에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여기서 사도가 사랑에 대해서 사용한 유일한 필레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가페가 아니라 왜 필레오를 사용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길리란드 형제님 :
* 이 단어는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신 사랑이라는 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22절은 엄중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수세기 전에 잉글랜드에 롯쇼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십대였을때 유명한 전도자가 이 구절을 설명한 것을 들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안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설교를 듣고 그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103세가 되었을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80년전에 들은 그 설교가 생각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양심을 찔렀고 103세가 된 노인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주 수년전에 들었던 말씀이 노인을 구원시킨 것입니다. 가정 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않은 일원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을수나 있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낮게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좋은 씨가 좋은 땅에 심겨졌다면 수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