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
<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 > 강성찬 형제님
베드로 후서 말씀 보겠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여기에 이제 세상 사람들이 기롱하는, 조롱하는 말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강림하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있지 않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그렇게 말하던 조상들도 그냥 아무 일 없이 죽어서 사라졌고 그리고 그 후에도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정말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처럼 그대로 이 만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코로나가 많이 유행이 되었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코로나가 안 걸리고 그냥 넘어가버리면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이렇게 분명하게 알 텐데 그러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걸렸고 아마도 여기 있는 대부분의 분들이 코로나에 한 번씩 걸렸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하고 있느냐?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개입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강림하신다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일어나게 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오실 것을 분명하게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러실 것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을 또한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베드로서, 여기 3장에서는 세 가지 부분에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지금도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하나님께서 지금 적극적으로 하고 계시는 것이 이 하늘과 땅을 간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간수하고 계시니까. 그런데 여기 이제 물리를 많이 공부하신 분이 여기 계시지만 우리가 이제 고등학교 때도 물리를 배우면 한 가지 배우는 것이 그 핵이 이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그 핵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는 겁니다. 아주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만한 그 핵인데 여러분이 이제 핵폭탄을 잘 알고 계실 것이에요. 그 핵 폭탄이 어떻게 그 큰 위력을 발휘하냐면은 그 핵이 분열되면서 그 분열되는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한 것이 분열되면은 그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마치 화약고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불안정하게 되면, 그게 이제 무너져버리면은 핵폭탄처럼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붕괴되지 않도록 지금 간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간수하는 힘을 놓아버린다면 온 세상은 이제 불로 녹아져 버릴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2).
이 세상읜 모든 것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그 체질이 그 작은 원자가 다 뜨거운 물에 녹아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강력한 손을 놓아버린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간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이제 한 가지를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여기서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온 세상의 물질을 지금 간수하고 계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십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돼 있는데, 원하다는 것이 이제 강하게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하나님이 그냥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적으로 각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돌아보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냥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던 사람에게 사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성경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의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복음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면 내 인생에 그 일이 없었다면 내가 하나님을 만났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게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고 회개하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또 한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여기서는 이제 성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물질에 개입하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개입하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에도 개입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개입하고 계시냐면, 우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도록"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의 착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 이 세상에서 병이 안 걸리고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하나님이 별로 우리에게 개입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병은 병대로 다 걸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나도 또 다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이 전혀 나한테 특혜를 베푸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게 하신다는 이 목표를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내 인생의 구비구비에 개입하고 계시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냥 별 생각 없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을 때에 어떤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보게 하시고 다시 주님께로 나와서 주님으로부터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땅하다'라는 강력한 단어를 써가지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그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게 될 때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앞두고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앞둔 자로서 마땅하게 살도록,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도록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항상 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랬을 때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간수되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심판을 염두에 두고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도록 지금 각 사람의 인생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염두에 둘 때에 그것에 마땅하게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도록 지금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도 그런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 사람들, 그 대표적인 예로 에녹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5-6).
여기에 에녹의 믿음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이 에녹이 우리에게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제 그의 삶에 있어서의 사건은 여기 기록된 것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겼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간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이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하는데, 이 에녹은 그의 삶 가운데서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의 삶은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그의 삶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특징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믿음에 대해서 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의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이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삶을 평가하시고 그것에 대해서 상급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는 믿은 것입니다. 그는 그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삶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보면 "그가 계신 것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제 그가 계신 것을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 이것과 이제 같이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존재하고 그런 나한테 별 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매 순간 매 순간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기 이 그가 계신 것이라는 표현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여기 5절에 보면 그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증거를 받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구약 성경과 한번 비교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그게 이제 어디에 그러면 나와 있냐, 그걸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구약 성경이 창세기 5장에 있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히브리서에서는 이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증거를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옮겨우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과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에녹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냥 하나님이 계시고 나중에 자기한테 상주시는 이심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매일 매일, 매 순간 매 순간을 그 상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상주시도록 지금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잘못된 길로 갈 때에 징계하시고 다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그런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산 에녹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였다." "나를 기쁘게 하였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의 특징적인 것은 그의 아들이 므두셀라라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사람의 이름을 성도님들이 잘 아시겠지만, '그가 죽으면 그것이 오리라.' 무엇이 오냐면은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산해 보면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노아의 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산 사람입니다. 자기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 순간 자기의 걸음이 그 심판에 합당한지 체크하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내 걸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개입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에 대해서 이제 신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유다서에서 글을 특징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약 성경 좀 뒤로 가셔서 유다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4-15).
우리는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에녹의 특징을 동일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신다 이것을 말하였고, 그는 이 관점에서 그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이제 구약 성경의 한 인물을 예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에스더인데요. 이제 에스더서로 잠깐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더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갔을 때에 이제 거기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놀랍게 개입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성도님들이 에스더에 대해서 그 일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니까,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지 않겠지만, 그 에스더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하나하나 보면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바사왕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의 왕비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비를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왕비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이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의 후손인, 유대인인 에스더가 그 왕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하만이라는 아각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다 몰살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유대인인 모르드개를 미워해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자기 집 앞에다가 큰 기둥을 세우고 이제 그 모르드개를 죽이는 허락을 맡으려고 왕에게 나아가서 허락을 맡으려고 할 때, 그때 왕이 이상한 말을 합니다.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여가지고 모르드개를 이제 하만에게 그 앞에 서가지고 이는 왕이 높이는 사람이다라고 외치면서 그 성을 다니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던 그 기둥에 자기가 달려 죽게 됩니다. 참 이런 타이밍과 이렇게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그런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스더서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한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분명하게 그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만물이 그냥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하나하나 사건마다 하나님이 놀랍게 개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이제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니, 그러면은 하나님이 그렇게 개입하시려고 하시고 능력도 있으신데 아 처음부터 어려움이 없게 하시지. 그냥 그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고 그들을 잘 돌봐주고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오지도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난해서 잘 살게 이렇게 보호하시고 그러면 얼마나 좋냐? 그게 정말로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관점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그냥 평안하게 잘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을 상징하는 모압에 대해서 성경은 참 그들은 평안한 민족이다. 그들은 한 번도 침략을 당하지도 않았고 그래가지고 그들은 그냥 교만하게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안연하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성경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육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걸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 가운데서 그 하나님의 날에 마땅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 가지 것들을 오히려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에스더 이 사건이 일어난 그들이 유대인들이 다 몰살 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난 그 시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스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을 때에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에 그들은 다시 가나한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한 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맨 처음에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한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두 번째 그룹이 에스라의 인도하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또 돌아오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한 번에 돌아오지 않고 띄엄띄엄 돌아왔을까요? 첫 번째 귀한과 두 번째 귀한 사이에 그 연도를 계산해 보면 한 8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갑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땅에 포로되어 갔을 때에 이제 거기서 직장을 얻고 또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몇 십 년 동안 살다 보니까 이제 거기서 이제 익숙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이제 터전을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아무것도 없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할 때 모든 유대인들이 다 간 것이 아니라 그중에 일부가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또한 이 에스라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70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또 긴 세월이 지나간 것이죠. 몇 세대가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70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저는 이 한국에서 지금까지 산 게 아직 50년이 되지 않습니다. 7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죠. 완전히 지금 이 상황에 익숙해져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몰살 당할 뻔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에스더서에 보면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구별되어 있긴 하지만 그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지고 있는 그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그런 모습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걸 거의 다 잃어버리고 그 땅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이것을 경험하고 나서 이제 10년 후에 이제 에스라를 필두로 가나한 땅으로 돌아가는 2차 기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위해서 어려움을 허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아무 문제없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대로 안락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러한 가운데 더욱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스더도 사실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고요. 에스더가 한 말을 처음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 8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모르드개가 그 하만이 온 유대인들을 다 이제 멸하라라고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대해서 왕의 허락을 받고 그 명령을 내리자, 모르드개는 그것을 가지고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에 4:8).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하라"(에 4:11).
모르드개는에는 에스더에게 이제 너가 왕비로서 왕에게 이 일을 고하라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처음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함부로 왕에게 나아갔다가는 그도 역시 죽음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위치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위치 자체가 우리에게 때로는 올무처럼 덧처럼 작용할 때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위치에 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에 하도록 하신 것인데, 우리는 단지 그 위치만을 보존하고 내 생명만을 보존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높은 자리에 있긴 하지만 여기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나도 죽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으니까 참으로 우리 직장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그 높은 자리에서 평안하게 거하라라고 하나님이 주신 자리가 아닙니다. 분명히 그 자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길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쉽게 그걸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자리가 나한테 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 잃었습니다. 이러한 에스터에게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를 인도하고 계십니까? 이제 1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를 통해서 몇 가지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이렇게 결단하게 됩니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습니다. 죽으면 죽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것은 될 대로 되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더는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은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시는 데에 합당한 일임을 그는 인식하는 가운데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그의 사회 가운데서 규정하고 있는 그 규제를 어기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그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 사이에 어떤 말들이 있었는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정신 차리고 단지 그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제 모르드개가 13절에 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에 4:13).
우선 첫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음으로 나만 홀로 면할 것이다. 나만 홀로 그 세상의 핍박을 면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이세상은 결코 화합될 수 없습니다. 그 유다인들과 그 아각 사람, 그 이방 사람들이 서로 화합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높은 지위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지 말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롯은 그런 착각을 했습니다. 그가 소돔성에 들어갔을 때에 그 가운데서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경험한 것은 그의 의로운 심령이 매일처럼 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소돔성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굴러 들어온 것이 우리를 주관하려고 한다고 그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14절을 보겠습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에 대해서 항상 상급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잠잠히 있으면 다른 사람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에스더가 필요해가지고, 그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에스더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더가 이 말을 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구원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갑자기 그 왕이 모르드개가 잘한 일을 듣게 하시고 그 모르드개의 상주기를 이미 시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들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해서 상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해가지고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 자신이 경건해지고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일을 우리에게 허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경우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너와 내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원하십니다. 많이 알고 있는 자에게 많은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좋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리는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것을 에스더에게 분명하게 말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 세상과 화합에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상을 주시기 위해서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우리가 상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지금까지 역사해오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책임을 주님께 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르드개의 권면 가운데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자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 가운데 우리 각자는 각각 이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각각의 살아야 되는 인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다른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는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에스더처럼 왕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지금 부르고 맡기신 일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에서의 위치는 그냥 지나가는 우리의 배경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무대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말씀하신 일을 우리가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뜻대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불평할 때가 있고, 나에게 어려운 병이 걸려가지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불평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매 순간에 개입하시고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참으로 에녹처럼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에스더처럼 참 우리가 안주할 때가 있지만 결단하고 죽으면 죽으리다라고 나오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