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엘리야

엘리야 10. 엘리야의 미래의 사역들

박이레 2023. 6. 1. 02:43

< 엘리야 10 : 엘리야의 미래의 사역들 > 한봉래 형제님

엘리야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9-1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5-18).

신약 성경 몇 군데 보겠습니다. 로마서 11장입니다. 이 사건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2-5).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6).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2-3).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침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9-13).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3-11).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엘리야에 대해서 저희들이 쭉 살펴봤는데요. 제가 한번 전체적으로 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자, 그래가지고 엘리야가 이제 송아지를 각을 떠서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엘리야가 준비한 제물을 태워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다, 라고 확정합니다. 그때 모였던 백성들이, 그리고 바알을 숭배했던 선지자 400명을 죽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비가 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까지 엘리야가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 회개를 안 하냐면, 아합과 함께 왕궁에 갔었죠. 그런데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가 여전히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이렇게 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다. 바알 선지자는 죽었다." 그랬을 때 이사벨이 "내가 엘리야를 바알 선지자의 죽음처럼 엘리야를 죽이리라." 이렇게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도망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이 대목이 안타깝고 왜 그랬을까? ...그래가지고 이제 호렙산으로 갑니다. 그래서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죠. "너 왜 여기 있느냐?" 그랬더니 엘리야가 하는 말이죠. "제가 하나님께 열심히 특심한 사람인데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는데, 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이제 말을 하죠. 그랬을 때 이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 하나 더 보겠습니다. 이제 "왜 여기 있느냐?"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킵니다. 지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일어났는데 거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있었는데 거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셨냐면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세미한 음성이 뭐냐? 그러면 이 세미한 음성으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보면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엘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네가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7천 명을 남겨두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걸 다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설명을 붙입니다. 어떻게 붙이냐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고소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송사했다. 갈멜산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스라엘을 엘리야가 고소합니다. "하나님 이건 심판하셔야 됩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를 보고도, 하나님께서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대신 사랑하시는 아들을 심판하시는 십자가를 보고도, 갈멜산에서 이걸 보고도 호렙으로 돌아가는 사람, 호렙산은 율법의 산입니다. 이게 시내산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산이죠. 그걸 알고도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 갈멜이 있었는데 호렙에 와 있는 사람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이제 송사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자기 행위로 율법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렇게 됐을 때 하나님이 이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너만 남은 것은 아니다. 7천 명이 있다." 이건 사도바울이 이렇게 풀어갑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스라엘을 송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하고 그게 다른 점이죠. 엘리야하고 달리 그는 남은 자를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남은 자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결국은 회복될 것이다. 이게 로마서 9장, 10장, 11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말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엘리야에게 세 사람을 세워라. 그래서 아람 왕을 세웁니다.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워라. 그가 아직은 이제 왕 밑에 있는 신하로 돼 있는데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북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어마어마하게 살육을 할 것이다. 그다음에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 대신, 지금은 아합 왕이 다스리고 있지만 예후라고 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워라. 예후가 아합과 관련된 집안들을 확 쓸어버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체적인 심판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이제 하늘로 올라가야 됩니다. 그리고 너는 엘리사를 세워라. 이 세밀한 음성으로 하신 이 말씀은 뭐냐하면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한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다. 예후의 칼을 피한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심판을 말합니다. 갈멜산의 은혜를 보고도 호렙에 와 있는 사람들, 은혜를 보고도 계속 자기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다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왜 세미한 음성인가? 하나님은 엄격한 심판을 하실 때 세밀한 음성으로 말하십니다. 저는 말을 할 때 어떤 대목이 나오면 막 흥분을 해가지고 소리를 높이죠. 하나님은 소리를 안 높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한 소리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세미하다고 해서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들이 열왕기상 이렇게 쭉 넘어가면 엘리야 시대가 있고 엘리야는 올라가고 그다음에 엘리사가 남죠. 엘리사 시대는 어떤 시대냐면 엘리야에 의해서 심판이 확정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엘리야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을 연기하십니다. 나중에 보면 아합은 금방 죽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합을 세 번이나 살려줍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도 막 하고 이거 죽어 마땅한데 또 회개했다고 또 연기합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심판이 연기됩니다. 그리고 이 심판이 예정돼 있는데, 실제로 심판이 집행되는 그 사이 시대를 엘리사가 사역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은혜 시대의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심판은 임박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역을 하는데, 이때 사역하는 대상이 누구냐 그러면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적을 행하고 했던 것은 전부 남은 자들입니다. 이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제 왕 아닙니다. 왕에게 사역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빚진, 선지 생도, 이거 전부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에게 엘리사가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기 전까지 은혜를 베풀고 있는, 생명을 베풀고 있는 것이 엘리사 시대입니다. 그렇게 이제 흘러가고요.

이제 오늘은 이 대목을 좀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이대로 끝나는 건가? 갈멜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식적으로 회개시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할 때 그가 이제 도망가버립니다. 이게 엘리야의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대로 끝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7장으로 넘어가면 신약으로 왔습니다. 신약으로 오면 이제 예수님께서 이제 변화산에 제자 3명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데리고 올라갑니다. 올라가가지고 주님이 주님의 몸이 변화되시고 그다음에 누가 오냐면 엘리야가 옵니다. 모세도 옵니다. 그런데 하여간 이 제자들이 누구를 보냐면 엘리야를 봅니다. 그다음에 이제 산을 내려갈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본 사건은, 이 변화산에서 본 사건은 언제까지는 침묵해야 되냐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침묵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거 뭔 소리지? 인자가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게 뭐야?' 하고 이해를 못합니다. 제자들이 이해 못하는 게 뭐냐? 엘리야가 이해 못하는 게 뭐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뭐냐 그러면 주님이 두 번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처음 오셔서 모든 것을 확 하시는 게 아니고, 처음 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두 번째 오셔서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차를 사람들이,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 믿었는데 왜 이렇게 어렵냐? 자꾸 그런 생각하는 거죠. 왜 우리가 기도하는데 빨리빨리 응답이 안 되느냐? 현실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이게 지금 다 엘리야의 착각이고 제자들의, 사도들의 착각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그들이 예수님이 두 번 오신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그리고 재림하셔야 된다는 것을 이해를 못 합니다. 그래서 제 하여간 그렇게 하다가 그다음에 예수님께 용기를 내서 묻습니다. "그런데 주님 왜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된다고 자꾸 그러죠?"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이 질문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기관하고 논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논쟁을 했냐면 이렇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서기관들은 아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다. 왜 메시아가 아니냐?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고 이런 말도 하고 이러시는데 메시아가 왜 아니냐? 서기관들이 성경을 딱 댑니다. 말라기를 딱 핍니다. 그때 이제 구약 성경이 있었죠. 말라기 4장 5,6절 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아가 와야 합니다. 엘리아가 오지 않으면 메시아는 오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제자들이 이제 서기관들하고 논쟁하다가 '아, 그러네. 그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하려면 엘리야가 누구라고 제시해야 되네.'라고 하는 것이 구약 성경을 근거니까 그거 받아요. 이제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우리는 주님을 메시아로 믿는데 구약 성경 말라기에는 메시아 앞에 엘리아가 꼭 와야 된다고 돼 있는데요?" 주님이 대답합니다.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메시아가 와야 된다. 맞다. 서기관들의 분별이 맞다. 엘리야가 와야 된다. 만물을 회복하기 전에 엘리야는 반드시 와야 된다. 말라기 4장 5,6절은 맞는 거다. 서기관들이 분별 제대로 한 것이다." 두 번째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엘리야가 왔다." 다시 마태복음 잠깐만 보시겠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도 표현은 잘 돼 있던데요. 마태복음 17장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마 17:10-11).

그래서 이게 미래형으로 써놨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미래에 일어나야 된답니다. 이게 미래형입니다. 십일절은 그다음에 십이절은 그런데 엘리야가 왔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엘리야가 미래에 와야 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엘리야가 온 것입니다. 조금 복잡하죠. 어떻게 된 건가를 보겠습니다. 13절,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해합니다. '아. 침례 요한을 말씀하시는구나.' 딱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침례 요한과 엘리야를 지금 두 개를 비교하는 겁니다. 구약의 침례의 요한이 엘리야입니다. 침례 요한은 신약의 엘리야가 되는 거죠. 구약의 침례 요한 엘리야고요. 그래서 이제 그러면 침례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엘리야 같은 사역을 했는가? 부분적으로 성취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다시 와서 또 일을 할 것입니다. 미래에, 지금 현재에 엘리야가 할 일을 침례요한이 어느 정도 이루어냈고, 그다음에 훗날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다시 훗날 와서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주님 초림 때 메시아 앞에 보는 엘리야는 침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제가 계시록을 읽어드렸죠. 주님이 재림 때,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그러니까 이건 이제 이스라엘을 위해서 오는 거죠. 지상 재림하실 때, 그 지상 재림하시는 메시아 앞에 엘리야가 다시 옵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렇게 푸시는데요. 이게 조금 복잡하니까, 그러면 이게 침례 요한은 엘리야인 거야, 아닌 거야? 이렇게 되죠. 몇 가지 성경을 조금 더 찾아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요 1:19).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요한은 전부 침례 요한입니다. 침례 요한에게 "당신이 누군데 이렇게 막 이스라엘 백성을 침례를 주냐?"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침례 주지 않습니다. 침례를 받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이 와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침례를 받으라고 그러니까 이게 이제 난처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너희들 하나님 백성 아니다. 회개해야 된다." 이렇게 한 거니까 이게 이제 논쟁이 되고 질문을 한 거죠.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요 1:20).

"혹시 나를 그리스도로 오해하지 마라. 나 아니다." 분명하게 합니다.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 1:21).

그러니까 침례 요한이 스스로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아닌 거죠. 어떤 형제님이 이 구절을 들어서 침례 요한은 엘리야 아니죠. 침례 요한이 맞는데 그냥 아니라고 한 거 아닐까? 겸손하게, 그런데 하여간 침례요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아닙니다. 그러고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누가복음 1장으로 가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는 이제 사가랴하고 엘리사벳, 사가랴가 이제 성소에 들어갔죠. 성소에 들어가서 천사가 침례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죠. 그 대목입니다.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눅 1:11-16).

그래서 침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쭉 이야기합니다. 그다음에 17절입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

그래서 침례 요한은 엘리야는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초림한 주님 앞에서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상 재림할 때 엘리야가 다시 임할 것입니다. 이게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고, 이게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서기관들이 논쟁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다시 이제 엘리야하고 침례 요한하고를 염두에 두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안 찾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야는 언제 사역을 하냐 그러면 이스라엘이 배교했을 때입니다. 여로보암 왕이 북 이스라엘을 세우지요.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이제 남쪽은 르호보암왕이죠. 솔로몬의 아들이 왕이 되고 두 지파입니다. 유다하고 베냐민 지파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해서 유다라고 하는 나라를 이루고 열 지파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이룹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돼가지고 걱정이 되는 것은 율법에 따르면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야 됩니다. 1년에 세 번. 그러면 정통성이 누구한테 있냐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왕이지만 자기 백성들의 마음이 다 다윗 후손 쪽으로 가게 되고 나라가 위험할까 봐 그가 악한 일을 합니다. 단하고 벧엘, 북 이스라엘의 남북에 있는 두 도시죠. 단하고 벧엘의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냐면 이 여로보암이 구약의 역사를 쭉 살펴볼 때 금송아지를 언제 만들었냐면 아론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 그 밑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걸 차용해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내려갈 필요 없다. 솔로몬 성전에서 예배드릴 필요 없다. 단과 벧엘에도 하나님의 단이 있으니까 여기서 예배드리면 된다." 이렇게 합니다. 이게 이제 큰 죄입니다. 이 죄를 이스라엘이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래서 전부 악한 왕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보암이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최소한 아합보다는 낫습니다. 뭐가 낫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렇게 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의 이름은 하나님입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다음에 여로보암이 이제 지나고 나서 그다음에 이제 아합 왕 시대가 됩니다. 오므리 왕조가 들어섰을 때 아합은 어떻게 하냐면 바알이라는 우상을 대놓고 세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안 섬긴다. 우리는 바알라고 하는 신을 섬길 거다, 라고 말합니다. 이걸 배교라고 합니다. 이건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겠다. 정도가 아니고 우상을 믿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이제 아합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왕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사역합니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먹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리고 명백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 시대의 엘리야가 어떻게 사역하냐, 그러면 엘리야가 사역한 겁니다.
첫 번째, 그가 기도해서 기근을 일으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우상을 숭배하면 하늘을 닫아버리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우로가 없게 기근을 구합니다. 그다음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근이 있고, 비도 안 오고 이슬도 안 맺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먹을 것도 떨어지고 사람들이 이제 곤란한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렇게 하죠?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왜 왔을까? 그러면서 이제 질문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고 있는가? 혹은 만약에 이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이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3년 반 동안 이와 같은 고통 속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그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무르 익을 때쯤 갈맬산에서 내기를 합니다.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원래 하나님 백성인데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이 마땅히 심판받아야 되지만 대신 심판 받은 분이 계시고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 그들로 다시 회개시키는 하나님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번에 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성경은 계속 이렇게 말하죠. 예를 들면 이제 어머니 둘이 있어가지고 이거 아들 하나 놓고 이거 내 아들이다. 할 때 솔로몬이 이렇게 재판하죠. 다 두 여자가 다 내 아들이라고 그러니까 둘로 잘라가지고 절반씩 가져가라. 누가 엄마인지 이거 뭐 알 길이 없다. 자르자, 그랬더니 가짜 엄마는 자릅시다. 진짜 엄마는 차라리 저 여자한테 주십시요. 내가 내 아이를 못 키우는 한이 있어도 나에게 손해가 날지라도 나에게는 너무 억울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 아이는 살아야 된다. 이게 엄마죠. 이게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여기 하나님이 배교한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우상은 어떤 존재냐? 우상과 하나님은 차이가 뭐냐? 그리고 이제 침례 요한도 그렇게 묻습니다. 저희들도 이렇게 묻습니다. 세상에도 종교가 여러 개가 있습니다. 불교도 있고, 무슬림도 있고, 무슬림은 잘 모릅니다만 하여간 유교도 있고, 유교는 종교가 아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무신론도 있고 그러면 이 여러 개 가운데에서 어떤 게 진짜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를 침례 요한과 엘리야가 제시합니다. 엘리야가 제시하는 하나님입니다. 마땅히 형벌 받아야 되는데 대신 자기 아들을 죽이고 우리를 용서하는 하나님. 그래서 이제 갈멜산에서 제사를 용납하고 그다음에 뭐가 오죠? 그다음에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리니까 뭐가 되죠? 이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습니다. 이거 다시 신약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배교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고난을 줍니다. 죽음 앞에 서게 하고 어려움 앞에 낮춥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우리의 죄를 마땅히 심판하셔야 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대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신 하나님이다. 그 후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을 닮는 열매를 맺히게 하시는 분이다. 이게 엘리야가 사역하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침례 요한입니다. 침례 요한은 어떤 때 오느냐 그러면 바리새인들 이제 이런 서기관들 있던 이때 이제 침례 요한이 등장하죠. 그러면 이 시대는 어떤 시대냐? 그러면 종교인의 시대입니다. 제가 아까 복음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대제사장이 어떤 제사장이냐면 유월절이라고 하는 형식은 지키면서 자기 속은 살인으로 가득 찬 시대입니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 맨날 돈 받고 성전에서, 성전 뜰에다가 장사하는 사람 넣고, 거기서 나오는 돈 그 돈을 다시 로마 황제한테 써가지고 뇌물로 줘가지고 제사장 자리를 자기가 하고 자기 사위가 하고, 가야바, 안나스가 장인, 사위 관계입니다. 이렇게 돈과 권력과 부기를 추구하는 그러면서 겉으로는 경건하게 제사장이고 율법을 지키고 하고 있는 이 부패한 시대에 침례 요한이 태어납니다. 침례 요한이 사역합니다. 엘리야하고 똑같습니다. 침례 요한은 어떻게 사역하냐? 이렇게 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의 종교와 침례 요한의 말씀이 뭐가 다르냐? 침례 요한은 죄 문제를 건드립니다. 죄를 회개해야 된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죄인 아니다. 우리가 왜 죄인이냐? 우리가 이제까지 건전하게 살아왔고 이스라엘 백성이고 말씀대로 주일 참석하고, 헌금하고, 나쁜 짓 안 하고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잘 살아왔는데 우리가 왜 죄인이냐?"라고 하는 이 종교하고, 침례 요한은 "우리는 죄인이다. 회개해야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라고 하는 이 둘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잠깐 저희들로 보면 세상에 여러 가지 종교가 있죠. 그런데 예를 들면 다른 종교를 좀 비하해서 그렇습니다마는 불교 같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냐면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그가 부처입니다. 자기가 부처입니다. 세상에 이런 종교는 없습니다. 어떤 종교든 당신은 죄인이다라고 찌르는 종교는 기독교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게 침례 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이 죄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나머지는 다 좋다. 괜찮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되고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니까 이렇게 좀 노력하면 되고 이렇게 좀 선행을 베풀면 좋고 다 이렇게 갑니다. 그런데 성경 하나만은 침례 요한과 주님 하나만은 이렇게 갑니다.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한 것을 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 우리는 거듭나야 된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우리는 천국에 못 간다. 이게 침례 요한이 전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이제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전하는 거죠. 우리가 우리 죄를 어찌할 수 없어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걸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그래서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어요. 그리고 죄가 해결됐어요. 이게 끝이 아닙니다. 죄가 해결됐어도 또 죄 지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주 하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를 끌고 가시는 것, 그래서 이제 교회, 성령까지 와야 됩니다. 그래야 이게 비가 오고 추수가 되고 입니다.
이제 엘리야을 생각해 보면 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안 믿을 뿐만 아니라 아예 우상 쪽으로 가버리고 있는 그 시대에 "하나님 어려움을 주십시요. 그들로 하여금 내가 왜 사는지, 인생은 왜 고통스러운지, 삶에는 왜 어려움이 생기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근을 준 거죠. 그리고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제시한 것입니다. 대신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 그래서 이제 갈멜산에서 했는데 여기까지 제시했으면 이제 이스라엘이 돌아와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 어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있는가? 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안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은혜를 선포하는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호렙산에 와서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하나님 이거 심판하셔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들은 가망이 없습니다. 이들은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했으니 이들에게 두 번의 기회가 없어야 한다라고 고소한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이제 엘리야가 이제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사도 바울이 신약에서 이 사건을 들어가지고 다시 풀어냅니다. 이제 계시록 11장인데요. 이제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대가 한 번 더 열립니다. 아합과 같은 악한 왕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도록 했던 왕처럼 이스라엘에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가 옵니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경배하도록 만듭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시 엘리야를 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죽음을 보지 않고 올렸다가 여기 이제 두 증인 중에 물론 어떤 분에 따라서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마는 이 두 중인 중에 한 명이 이제 보통 죽음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에녹, 엘리야, 두 사람으로 보통 봅니다. 이분들이 와서 증거합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 시대에 엘리야의 두 번째 사역이 시작이 됩니다. 그것과 똑같이 합니다. 이제 이들은 어마어마한 환란 속에 들어가 있는 거죠. 그때 이 엘리야가 다시 놀라운 기적을 합니다. 이제 기적을 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이런 일이 있는데요. 사실 성경이 말하는 엘리야 사역은 그런 이제 기적이 있는 게 아니고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환란 가운데 도망다니고 이제 이렇게 하고 있는 전 세계에 흩어져버린 이스라엘, 적그리스도는 이제 그때 발달된 과학을 사용해서 어디서든지 거래도 못하게 하는 이 시대에,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회가 갑니다. 이게 엘리야의 사역입니다. 그가 아합왕 시대에 그와 같은 사역을 했지만 그는 그 사역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하나님 심판하십시요. 하나님 심판하십니다. 세밀한 음성으로 심판을 말합니다. 엘리야한테 "너 3명 세워라. 하사엘, 예후, 엘리사, 세워라. 하사엘이 심판할 거다. 예후가 심판할 것이다. 그 피한 사람 엘리사가 죽일 거다." 그런데 이게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정말 생각과 다릅니다. 저하고 인격이 다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심판하시죠. 그리고 이제 그를 하늘로 끌로 올려냅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사역을 엘리야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환란 시대에 엘리야를 통해서 수많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1장 26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엘리야가 얼마나 놀라운 성공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때 주님이 지상 재림하실 거,고 그때 이제 이사야서 53장이죠.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놀라운 미래에 대한 엘리야의 미래 사역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이게 우리하고 뭔 상관인가? 적용해 보겠습니다. 엘리야의 생애를 기록해 놓은 하나님 의도가 뭔가? 성경은 그 의도를 이렇게 밝힙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밝힙니다. "엘리야는 우리하고 성정이 깉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걸로 들립니다. 주님께서 야고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너희들도 엘리야처럼 일하고 싶지 않느냐? 엘리야 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느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심판받게 길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 일, 그 패역한 시대에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 엘리아는 그것이 실패했다고 느끼고 그래서 송사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수많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일을 시켰는데 그 엘리야가 나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의 어둠을 핑계 대지 말고 그리고 우리가 현실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인해서 현실적으로 열매가 없는 것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하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놀라운 미래를 기대하면서 영혼들을 주께 돌아오는 일에 우리 생애를 드리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다 우상을 숭배하는 시대, 왜냐하면 우상이 바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신이 아니고 이세벨이 살던 페니키아 민족들 신이거든요. 페니키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이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중에 이렇게 바닷가를 보면 한번 확 이제 태풍이 불거나 그러면 바다가 어마어마한 저 배가 뒤집어지고 막 이제 이런 일이 생기죠. 그걸 사람들이 이렇게 보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제 폭풍의 신, 저기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우리를 죽이고 우리에게 불행과 괴로움을 줄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다. 그 힘을 바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바알 신은 어떤 신이 되냐면 풍요의 신입니다. 고대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뭐였냐면 농사 짓는 시대니까 자녀들이 많아야 됩니다. 그리고 농사 지으면 곡식이 막 풍성하게 추수가 돼야 합니다. 이 풍요가 어떤 때는 보면 굉장히 풍요롭게 되는 거예요. 어떤 때는 그냥 똑같은데, 이 풍요롭게, 이렇게 만들어주는 어떤 힘이 있을 것이다. 그래가지고 그걸 바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재앙을 피하고 풍요를 추구하는 것들이 우상입니다. 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마치 두 여자가 누가 진짜 엄마인지 구분해내는 지혜를 갖듯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거죠. 인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풍요로운 것이 인생의 가치냐? 그게 인간에게 행복을 주더냐? 고난이 꼭 나쁜 거더냐? 사람은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 삶으로 제시하는 거죠. 이게 엘리야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요, 침례 요한이 했던 거죠. 뭐라고 해도 종교적으로 겉으로 겉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교회도 다니고 헌신하고 해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짜다. 죄를 회개한 적이 없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죄 용서 확신이 없으면 가짜다, 라고 하는 것이 침례 요한의 사역입니다. 이 두 가지를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고 싶지 않은가? 엘리야가, 침례의 요한이, 지금은 저희들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시는 것이 가까운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내서 우상을 숭배하고 종교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기근을 주고 갈멜 제사를 제시하고 그리고 비를 오게 하는 이 사역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 살지 않겠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 마음을 감동하셔서 저희가 영적인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저희 생애에 하고 주님을 뵐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